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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13화 (13/96)
  • 13화.

    기분 나쁜 향이다. 아니, 향이란 단어조차 아까운 역한 냄새.

    “코 찡긋거리는 것 봐.”

    어, 이든 목소리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찰싹, 하고 살이 맞닿는 소리가 울렸다.

    “만지지 마.”

    “와, 진짜 치사하다.”

    “연이한테 허락받고 만져.”

    “아니, 허락받아도 안 돼.”

    덩치 큰 남자 셋의 유치한 대화를 듣는 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곱게 감은 눈꺼풀 안으로 눈동자를 두어 번 굴린 연이 천천히 정면을 바라보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새하얀 천장이었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고, 지겨워하는 그것.

    두 번째로 보인 것은 제 몸 곳곳에 연결된 수많은 전선.

    폐쇄병동을 떠올리기 충분한 상황에 겁을 먹은 연이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깊게 잠드니 누가 업어도 모르네.”

    설우가 그녀를 안심시키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나한텐 하지 말라더니.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는 설우를 흘겨본 이든이 간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 병원이에요?”

    제대로 둘러보니 열 평도 안 되던 그곳과 매우 달랐다.

    넓게 트인 공간엔 푹신한 가죽 프레임으로 된 침대부터 다인용 소파, 최신식 가전제품, 취사를 위한 작은 주방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검사 받으러 온 거야, 너 아프잖아. 하는 김에 다른 검진도 할 거고.”

    첸과 이든, 설우가 모두 함께 있어도 트라우마가 주는 불안감이 완벽하게 수그러들지 않아 두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감춘 연이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뭐가 많네요, 주렁주렁.”

    이마와 귓불, 코와 목, 가슴과 복부, 팔과 다리까지. 온갖 센서들이 매달려 거추장스럽게 흔들렸다.

    “검사 중이었어. 이따가 잠들면 다시 검사 할 거야. 잠깐 떼어달라고 할까? 저녁 먹어야지.”

    부드러운 첸의 목소리 덕인지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차 제 속도를 되찾아갔다.

    “오늘 많이 먹어야 해. 수면 검사 끝나고 본격적으로 검진하기 전에 쫄쫄 굶어야 하거든.”

    “저 굶는 거 잘해요!”

    그게 뭐 자랑이라고.

    장난기 가득한 이든의 말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한 연이 가라앉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 건 신나게 말할 필요 없어.”

    연은 웃음이 헤펐다.

    어릴 적엔 엄마 세희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방글거렸고, 병원에 갇힌 후에는 죽고 싶어질 것 같아 끊임없이 웃었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버티다 보니 어느샌가 버릇이 되어 버렸다.

    “뭐 먹을래? 말만 해.”

    설우의 반대편에 자리 잡은 이든이 지갑과 휴대 전화를 챙겼다.

    “전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무거나, 는 없어. 병원에 있는 동안 매일 하나씩 말해, 사다 줄 테니까.”

    연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렀다.

    이든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자세로 그녀를 채근했다.

    “음… 햄버거?”

    “역시 초딩 입맛.”

    “다들 종류는 상관없지? 내가 알아서 사 올게.”

    병원 별관에서 본 수제버거집을 떠올린 이든이 병실을 나서자마자 의료진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비켜, 이 자식들아. 등빨 좋은 것들이 둘러 있으면 진료를 어떻게 보라는 거야.”

    “좀 전에 보고 갔잖아요.”

    “환자가 깼으니 다시 봐야지. 이쪽은 신경외과 김성태 교수, 이쪽은 신경정신과 박은주 교수. 둘 다 알아주는 권위자야.”

    “안녕하십니까, 신경외과 김성태 과장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은주예요.”

    “안녕하세요, 권… 아니, 선우연입니다.”

    나이 많은 이들이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일에 익숙한 설우는 고개만 까딱였지만, 연은 서른 살쯤은 많아 보이는 의사들에게 곧바로 예의를 차렸다.

    설우의 옆으로 조그마한 얼굴이 튀어나오니 늘어선 의료진들이 놀라 동공을 키웠다.

    감탄이 절로 새어 나올법한 그림 같은 외모였다.

    설우도, 첸도 웬만한 배우들은 발아래 둘 정도로 잘생겼지만, 연은 다른 차원의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뭘 이렇게 많이 달고 왔어요? 부담스럽게.”

    젊은 수련의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연에게 닿자 심기가 불편해진 설우가 다시 그녀를 가렸다.

    “잘나신 분이 행차하셨으니 다들 따라나선 거지.”

    “다음부턴 셋만 오세요.”

    “알았다. 반가워요, 선우연 양. 주치의 장은태예요. 컨디션은 어때요?”

    “좋아요.”

    “자, 기본적인 문진표니까 천천히 읽고 답해줘요.”

    “네.”

    “애 밥 먹어야 하니까 이것들 좀 잠시 떼죠. 어차피 제대로 된 검사는 수면실에서 해야 한다며. 그때 다시 붙여요.”

    “그래, 오늘은 먹어야지.”

    은태가 연의 몸에 붙은 것들을 하나하나 떼어 놓았다.

    기다란 전선들이 떨어져 나가자 몸이 한결 가벼워진 연이 문진표를 집었다.

    “증세는 언제부터 시작됐죠?”

    “어렸을 때요. 퇴원한 지 얼마 안됐을 때였던 거 같아요. 방에 서 있다가 갑자기 잠이 들었고, 잠든 곳이 아닌 다른 데서 눈을 뜨는 경우가 많았고, 꿈속에서 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재현했어요.”

    “정신병원에 들어간 이유가 그거 때문인가요?”

    “네. 상태가 점점 나빠지니 엄마가 절 정신병원에 보냈고, 거기서 주는 약도 먹었어요.”

    “어떤 약인지는 알고 먹었고요?”

    연이 고개를 저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으니 뭔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챙겨 먹었다.

    식사 시간과 잠깐의 자유시간이 아닐 땐 손발이 묶여있었고, 짧으면 반나절, 길면 하루 내내 잠을 잤으니. 설우를 만난 후에야 수면장애의 실체를 다시 마주한 것이었다.

    “혹시 어느 병원에 있었는지 기억해요? 담당 의사나 간호사 이름이라던지.”

    “아뇨, 모르겠어요.”

    연이 괜스레 아려오는 팔목을 매만졌다.

    7년 내내 묶여있는 족쇄가 사라진 것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첸에게 담겼던 연민이 분노로 바뀌었다.

    그깟 돈이 뭐길래. 한 사람의 인생을 박살 내야만 했던 걸까.

    “햄버거 왔다. 보너스로 치킨까지… 어? 안녕하세요, 장 박사님.”

    “그래, 어서들 먹어. 9시쯤 다시 올 테니 문진표 작성 부탁해요.”

    “네, 감사합니다.”

    “이만 나가지.”

    병실을 가득 채웠던 의료진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커다란 봉투 두 개를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은 이든은 안에 든 음식을 꺼냈다.

    달짝지근한 데리야키 소스와 고소한 기름 냄새가 솔솔 풍기자 눈을 반짝이며 침대에서 내려온 연이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또 쓰러질까 걱정되어 서성거리던 설우도 연의 옆자리를 채웠다. 포장을 벗긴 먹음직스러운 버거 하나가 연의 앞에 놓였다.

    “넉넉하게 사 왔으니까 먹고 더 먹어. 치킨도 먹고.”

    연이 격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먹을 때가 제일 신나지.”

    억누를 수 없는 함박웃음과 함께 작게 손뼉을 치는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먹는걸요. 매일 맛있는 거 먹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할 거 없어.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해.”

    잔소리쟁이 아저씨에서 다정한 오빠로 돌아온 설우가 거슬리는 긴 머리를 뒤로 넘겨주고 콜라를 내밀었다.

    와구와구, 순식간에 버거 하나를 밀어 넣은 연이 버겁게 부풀어 오른 볼을 열심히 움직였다.

    “자, 여기 하나 더.”

    한 손에 닭다리를 든 연의 다른 한 손에 새 햄버거가 들렸다.

    치킨과 버거를 번갈아 무는 연이 신기했다.

    저렇게 허겁지겁 먹어도 소화가 되는지, 작은 체구에 비해 위가 큰 것인지, 하는 갖가지 생각들이 차올랐다.

    연은 어느새 세 번째 버거를 받아 들었다.

    식탐을 부리는 모습도 전혀 밉지 않았지만, 걱정은 되었다.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설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이 들고 있던 버거를 내려놓았다.

    빠른 반응에 당황한 건 오히려 설우였다.

    “먹을 땐 그냥 두지.”

    이든의 타박이 이어졌다.

    “선우연, 내가 무서워?”

    호텔 스위트룸에서처럼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화들짝 놀란 연이 뒤로 물러났다.

    “아, 아뇨.”

    “거짓말하는 사람 질색이야.”

    “저러니까 당연히 무서워하지.”

    “내 말이.”

    똑같은 자세로 소파 등받이에 기댄 첸과 이든이 혀를 찼다.

    왜 저렇게 빡빡하게 구는 건지.

    “그런 거 아니에요. 말을 잘 들어야 계속 이렇게 지낼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아야 하니까.”

    “괜찮아, 얼른 먹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연이 또박또박 설명하자 울컥한 첸이 다시 손에 버거를 올려주었다.

    연은 흘깃, 설우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 말라는 뜻 아니었어. 너무 빨리, 많이 먹으니까 체할까 봐, 배부른데 계속 먹는 걸까 봐 물었던 거야.”

    설우가 그녀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멀어지자 연이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복잡한 세 개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겨 붙었다.

    정상이 아닌 행동들이 걱정되었지만, 쉽사리 고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

    <배우 한서준, 드라마 ‘달이 빛나는 밤에’ 촬영 중 부상.>

    <대역 없이 액션신 촬영 중 사고.>

    <한서준 측, “검사를 위해 일주일 정도 입원 후 복귀 예정”>

    한서준, 제 이름 석 자를 검색해 오늘 업로드된 기사를 대강 훑어본 서준이 댓글 창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나 드라마 스태프인데 정말 경미한 부상임. 넘어져서 무릎까진 정도. 촬영하는 데 전혀 지장 없을 수준인데 쉬고 싶어 꾀병 부리는 거.]

    쾌유를 빈다는 많은 응원 글 사이로 출처를 알 수 없는 악플 하나가 튀어나왔다.

    수십 개의 비공감과 수백 개의 반박 글이 달렸지만, 이런 글 하나하나에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멘탈이 최악이었다.

    “그런 걸 뭐하러 찾아 읽고 있어.”

    “굳이 찾으려고 한 건 아닌데. 너무 잘 보인다, 형.”

    손톱을 잘근거리며 문가를 힐끔거리는 서준을 안타깝게 보던 민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17살부터 모델로 활동한 서준은 10년이 지난 지금 나라를 들썩이게 만드는 톱스타가 되었다.

    사생팬의 수가 아이돌그룹을 뛰어넘고 팬이 많은 만큼 안티도 많은 그였기에 날이 갈수록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늘었다.

    사생활이 없는 직업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입원한 김에 정신과 상담 한번 받아보자. 이 병원 VIP 병동 보안 철저하기로 유명해. 전담 의사도 따로 있고, 시스템 좋아.”

    “어디서든 새어나가게 되어있어. 괜한 구설 오르기 싫어.”

    “준아, 그러지 말고 한 번 받아보자.”

    열혈 매니저로 시작해 지금은 대형 소속사의 대표가 된 민준은 서준의 친형이었다.

    다크써클이 잔뜩 내려앉은 형의 눈가를 발견한 서준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 처방 없이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구해 먹는 저를 보며 애간장을 녹일 그였다.

    “몸에는 별 이상 없다고 하지?”

    “응, 타박상 빼면.”

    그럴 줄 알았지. 앞서 읽은 댓글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 간절히 쉬고 싶었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사람들의 시선에서 숨어야 했다.

    상태가 이렇게 심해질 줄 알았다면 작품은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병원 앞에 기자들 많아?”

    “기자고, 팬이고 쫙 깔렸지. 그래도 여긴 못 들어와. 병동에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있어서 평소보다 두, 세배 가드가 많대.”

    “하아, 벌써 갑갑하다. 웃기지 않아?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길 바랐는데 막상 병원에 있으니 답답해하고.”

    “복도 끝에 전용 테라스 있다더라, 나갔다 오자.”

    “드론이라도 띄웠으면?”

    “적당히 하자, 동생아. 지나치게 비관적이야, 빨리 일어나.”

    잘생긴 얼굴이 더는 빛나지 않았다.

    늘 즐거웠고 행복했던 직업인데, 이 슬럼프를 어떻게 이겨 내야 할까.

    민준의 재촉에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서준이 수액이 걸린 링거대를 끌었다.

    서준이 나오자 데스크를 지키던 간호사 셋의 표정이 환하게 피었다.

    사인이나 사진을 요청했다간 VIP 병동 데스크에 다신 앉지 못하게 될까 봐 꾹 참고 눈으로만 담았다.

    “요즘만 같으면 소원이 없겠다.”

    “완전 꽃밭이지. 맨날 나이 든 회장님에 갑질하는 사모님만 보다가 이게 웬 떡이냐.”

    “차설우 사장 받고 한서준이라니. 눈 호강 제대로야.”

    한가한 오후 시간.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수다를 떠는 간호사들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연이 못 봤어요?”

    “예?”

    “A7호, 선우연이요. 금발.”

    “아! 그 환자분 아까 테라스로 나가시던데.”

    “혼자 가게 두면 어떡합니까. 관리 똑바로 안 해요? 테라스에서 쓰러지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잠깐 펠리체에 다녀온 사이 텅 빈 병실을 보고 놀란 이든이 데스크로 뛰쳐나와 언성을 높였다.

    위협적인 말투에 당황한 간호사들은 금붕어가 된 듯 입만 뻐끔거렸다.

    특별관리대상인 건 알았지만, 아직 병명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라는건 알지 못했다.

    이든이 테라스 방향으로 몸을 틀자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손을 흔드는 연이 보였다.

    “이든!”

    지나가는 사람들에 가려 제가 보이지 않을까, 방방 뛰는 그녀를 보자 험악했던 인상이 사르르 풀렸다.

    “쪼끄만 게 진짜, 사람 간 떨어지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든이 연에게 다가갔다.

    처음엔 일정한 속도로 제게 다가오던 연의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터벅터벅, 불안한 걸음걸이와 풀려가는 눈꺼풀을 확인한 이든이 기겁하며 달려나갔다.

    그녀에게 닿지 못할 것 같아 다급해진 그가 연의 가까이에 있는 남자들이 듣길 바라고 외쳤다.

    “잡아 주세요!”

    수트를 입은 남자가 의아한 눈으로 뒤를 돌았다. 민준이었다.

    “앞에 여자애 곧 넘어지니까 잡아주세요, 지금!”

    간절한 목소리를 들은 서준이 정말로 넘어질 듯 휘청이는 연을 바라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주삿바늘이 달린 불편한 팔을 움직인 그가 연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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