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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12화 (12/96)

12화.

활짝 열린 대문 앞에 선 이든과 첸이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형, 나 연차 쓸래.”

“헛소리하지 말고 나가.”

“그럼 난.”

“오늘 지사 회의야.”

팔랑이는 잠옷을 입고 배웅 나온 연을 두고 아무도 대문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차고에서 미리 꺼내둔 주인 잃은 차들의 엔진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정이 드는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오래전에 함께한 설우는 그렇다 쳐도 이든과 첸은 이미 연을 친동생처럼 대했다.

“그럼 형 먼저 나가.”

이든이 설우를 툭 밀었지만, 그 역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연은 멀뚱히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일하는 분들 언제 오시지?”

“곧.”

“안 되겠다, 꼬맹이. 너 먼저 들어가. 혼자 들어가다 잠들면 큰일이잖아.”

훠이훠이, 새를 쫓는 것처럼 손을 흔든 이든이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여기까지 나왔는데 얼른 가요. 전 빨리 뛰어 들어가면…….”

연이 말을 잇지 못하고 설우의 눈치를 살폈다. 다신 뛰지 말라고 타박하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강아지를 혼자 두고 나간다면 이런 기분일까.

평생 모르고 살았던 월요병이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아주머니들 금방 올 거야. 계단은 절대 오르내리지 말고, 딱딱한 거 근처에도 가지 말고, 웬만하면 앉아있고. 어제 이든이랑 게임 했다며, 그거 하면 되겠네.”

“네, 그럴게요.”

연이 저를 잔소리 많은 아저씨로 취급해도 어쩔 수 없다.

1분에 하나씩 떠오르는 걱정거리가 잊히지 않으니 입 밖으로 꺼내 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밥은 좀 천천히 먹고, 오늘부터 교정 젓가락 쓰기로 한 거 잊지 마, 그리고 또…….”

“조심히 들어가, 연아. 우린 이만 가야겠다.”

큰 눈을 끔뻑이며 잔소리를 듣는 연에게 방긋 웃어준 첸이 이든에게 눈치를 주고, 곧바로 이든과 함께 양쪽에서 설우의 팔을 감았다.

이것도 직업병인가.

회사 직원들을 쥐잡듯 잡는 것으로 모자라 연에게까지 상사 노릇을 하려는 그를 끌고 나갈 셈이었다.

“다녀오세요. 정말 조심히 있을게요.”

아, 가기 싫다.

연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세 남자의 어깨가 축 가라앉았다.

딸바보, 시스콤(*시스터 콤플렉스, 여자 형제를 광적으로 좋아함) 따위의 신조어들을 격하게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쿵,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펠리체의 거대한 문이 한쪽으로 밀렸다.

흡사 성문과 같은 위압감을 풍기는 바리게이트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킨 현태가 기다리던 세단이 미끄러져 나오자 카메라 셔터를 빠르게 눌렀다.

조수석에 앉아 햄버거를 욱여넣던 상철이 허리를 세웠다.

각자 취향대로 뽑은 값비싼 외제 차가 뒤이어 따라 나왔다.

“누구 탔는지 보여?”

“선팅이 진해서 안 보이네요.”

“하, 젠장. 돌겠네,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함에 상철이 마구잡이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틀 내내 신은 양말이 꿉꿉해 벗어 던지니 구수하면서도 역한 냄새가 차 안을 채웠다. 현태가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어쩌죠, 평창동은 아직 조용해요?”

“이번 주 내로 데려오란다.”

경찰이나 할법한 오랜 잠복을 따라 하는 둘은 뻐근한 몸보다 창석의 불호령을 더 걱정하는 중이었다.

“다미가 정말 이 안에 있을까요?”

“나온 적도 없고, 가게 안에도 없었다며! 차설우가 직접 데리고 나간 게 아니면 그년이 하늘로 솟았겠냐, 땅으로 꺼졌겠냐, 애초에 네 놈이 놓치지만 않았어도 이 꼴 안 봤어!”

“죄송합니다.”

상철이 위협적으로 다가오자 현태가 고개를 숙였다.

다미를 잃어버리고 대역죄인이 된 그는 상철의 핍박을 받으며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차 사장 회사 근처에도 애들 심어 놨지?”

“예.”

“절대 놓치면 안 돼. 계속 감시해. 24시간 붙어 있다 보면 다미 그림자라도 보이겠지. 다미 발견하면 무조건 잡아 두라고 해. 일단 데려다 놓으면 뒷일은 어르신이 처리할거야.”

“근데 왜 데려온 걸까요. 물론 다미 외모가 단번에 관심을 끌긴 했겠지만, CH의 젊은 후계자가 욕심낼만한 타입은 아니잖습니까? 정신연령도 어린 데다 애가 멀쩡하지도 않은데요. 혹시 옛날에 다미와 알던 사이인 거 아닐까요?”

설우를 직접 마주했던 순간을 되뇐 현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만난 여자를 숨겨준 남자라 여기기엔 적대심이 깊었다.

당시엔 그저 제 구역을 침범한 외부인이 언짢아 나온 반응이라 생각했는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쉽게 출입이 불가한 거대한 성안에 다미를 숨겨둘 줄이야.

“말 같은 소릴 해.”

한심함이 가득 담긴 시선이 닿자 주눅이 든 현태가 입을 다물었다.

정답을 오답으로 치부한 상철이 담배를 물고 창문을 내렸다.

먼 훗날 지옥문 앞에 다다른 그가 땅을 치고 후회할 많은 순간 중 한 장면이었다.

***

종잇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가득한 설우의 집무실 안.

외부 일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한 이든이 노크 없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타이밍 좋게 마지막 결재를 마친 설우가 이든의 손에 들린 두툼한 봉투를 보았다.

서류 봉투를 두어 번 흔든 이든은 넥타이를 헐겁게 풀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생각보다 빨리 가져왔네.”

이든을 따라 들어 온 첸과 책상에서 일어난 설우까지 모두 소파로 모여들었다.

사람을 시켜 알아본 권다미란 이름의 주인을 찾은 것이었다.

“의심스러운 게 워낙 많으니까.”

밀봉된 노란 봉투 매듭 끈을 잡아 돌린 이든이 안에 든 종이와 사진들을 우르르 쏟아내었다.

“부모는 권상철, 장세희. 권다미는 권상철과 전 부인 사이의 딸이고, 장세희와는 10년 전쯤 재혼했어.”

“권상철,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첸이 사진 한 장을 골라 설우에게 건넸다.

낯익은 얼굴을 확인한 설우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창동 심부름꾼이네.”

“대박이지?”

흥미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간만의 유희를 즐기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해나가는 이 시간이 이든을 들뜨게 했다.

설우를 도와 경영에 참여하는 첸과 달리 가드 포지션인 이든은 비교적 무료한 시간이 많았다.

새 장난감을 쥔 아이 같은 얼굴로 몸을 흔들던 그가 뭉친 서류 더미를 설우에게 내밀었다.

“권다미, 금치산자(*마음의 장애로 사물 변별력과 의사 결정력이 없는 상태로, 재산 관리 능력이 없다고 선고 받은 자)야.”

“계속해서 금치산자 판결을 받게 하려고 정신병원에 가둔 건가.”

“남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치워야겠고, 주무르기 편하게 법적인 속박도 해둬야겠고. 뭐, 겸사겸사였겠지.”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흔적도 없이 숨겼나 했더니. 상철로 인해 새로운 이름을 가진 것이었다.

“진짜 권다미는 어디 있는데, 죽은 거야?”

“아직 몰라. 일단 겉핥기식으로 쓸어 온 거고, 자세한 건 더 알아봐야 해.”

“여기 이 여자가 장세희. 연이 새엄마 이름은 이게 아니었지. 머리카락 조차 보이지 않는 게 당연했네. 이런 줄 모르고 엄한 곳만 들쑤시고 다녔으니.”

“권상철이랑 아직 같이 살고?”

“주소는 같아. 강남 건물주로 떵떵거리고 사는 것 같은데, 담보 대출도 많고 여기저기서 돈을 많이 끌어다 썼어.”

“그 많던 재산을 다 썼다는 거네.”

설우가 짜증스럽게 입가를 비틀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권상철과 장세희. 두 사람의 사진이 나란히 테이블 중앙에 놓였다.

“사람 하나씩 붙여 두는 게 좋겠지?”

“당장. 진짜 권다미는 어디 있는지, 이 둘이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게 뭔지 잘 알아보라고 해. 어떤 미끼로 유혹해야 멍청하게 빨려 들어올지도.”

이쯤이면 되었다는 듯, 들고 있던 종잇장들을 내던진 설우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오늘 재개하기로 했던 지사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설우를 따라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첸을 뚱한 얼굴로 올려보던 이든이 텅 빈 소파에 몸을 뉘었다.

“형.”

이름 없는 형을 부르자 필요한 것들을 챙기던 첸과 설우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나 먼저 퇴근하면 안 돼? 연이랑 놀고 있을게.”

“심심하면 회의 들어오든지.”

“재미없잖아. 꼬맹이 걱정 안 돼? 혼자 있다가 머리라도 깨지면! 아주머니들이 잡아줄 순 없잖아.”

허공에 두 발을 구르며 소리치는 이든을 두고 첸이 문가로 향했다.

“안 돼, 불공평하잖아. 우린 일하는데 너만 연이랑 놀겠다고? 절대 안 되지.”

얄밉게 웃은 첸이 소파 뒤로 길게 뻗어 나온 이든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가고 싶다, 정말 격하게 가고 싶다. 펠리체를 이렇게까지 그리워하는 날이 오다니.

“회의 빨리 끝내, 퇴근하게.”

설우와 첸이 회의를 하는 동안 도망이라도 칠까, 하는 고민을 거듭한 이든이 결국 체념한 채 고개를 파묻었다.

“그럴 거야. 연이 오늘 입원시킬 거거든.”

“오늘?”

다시 벌떡, 190센티를 넘는 길이가 요동쳤다.

“응, 오전에 장 박사랑 통화했어.”

“그래, 검사가 시급하니까.”

며칠 전 이야기했던 퇴행성 뇌 질환을 떠올린 이든이 걱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입원해 있어야 한대?”

“일주일 정도? 일단 나가. 회의부터 끝내자고.”

태블릿을 든 설우가 걸음을 재촉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멘탈이 과자 조각처럼 부서지더라도 최대한 시간을 단축할 셈이었다.

탁탁탁, 차고와 현관 복도를 이어주는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든이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러댔다.

첸과 설우는 비교적 점잖게 서 있었지만 속내는 이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머, 일찍들 오셨네요.”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평소 귀가가 늦어 마주치기 힘든 세 남자를 맞이한 황 여사가 밝게 인사했다.

“연이는요?”

“방이요. 먹성이 어찌나 좋은지. 차려주는 족족 맛있게 먹으니 간만에 요리할 맛 나더라고요.”

식사를 전담하는 황 여사가 연신 미소를 지었다.

뭐라도 계속 내어주고 싶을 정도로 잘 먹는 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차 회장의 본가에서부터 일을 봐준, 오랜 경력자인 그녀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연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별다른 일은 없었죠?”

“네, 없었죠.”

“오늘부터 일주일 정도 병원에 있을 거니까 식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네 분 다요?”

“예. 가끔 들리겠지만, 아마 밥은 안 먹을 겁니다.”

“네, 그럴게…….”

“애 없어!”

첸과 설우가 황 여사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연의 방으로 갔던 이든이 일그러진 얼굴로 돌아왔다.

“없긴 왜 없어.”

“진짜 없다니까? 방에 안 보여, 욕실에도 없고.”

“그럴 리가요, 분명 방에 있었는데. 나가는 건 전혀 못 봤어요.”

방으로 들어가는 연을 봤던 황 여사가 이든을 안심시켰다.

설우가 급히 다가가 방을 둘러보았다. 주인을 잃고 뒤집힌 이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었다.

“설우 방으로 간 거 아냐?”

첸이 블라인드가 걷힌 통로를 가리켰다.

벌컥, 잔뜩 뻣뻣해진 몸으로 제 방문을 거칠게 민 설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터벅터벅 다가간 설우가 베개를 끌어안고 러그 위에 잠든 그녀를 안아 침대 위로 올렸다.

“자면서 온 거겠지?”

“여기 와서 자진 않았겠지.”

설우가 이불을 잘 덮어주며 넓은 방을 둘러보았다.

“서재에도 있는 책상을 왜 기어이 방에 들여놨을까.”

“뭐?”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책상을 보고 설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삼백만 원을 호가하는 커다란 중역 책상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심히 거슬린 탓이었다.

“저 쓸모없는 그림도 다 치워야겠어.”

“쓸모없다고? 한점에 돈 천짜리가?”

벽에 기대어 놓은 그림들도 모두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연이 잠결에 걷다가 걸려 넘어지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 스탠드들은 전부 내가 산 건가?”

“미쳤군. 침대 옆에 있는 건 심지어 경매에서 네가 직접 낙찰 받은 거야. 명인이 한 땀 한 땀 꼬아 만든 작품이라며. 지구상에 하나뿐인 거라고 아주 좋아했었지?”

“끌어안고 잘 기세였지.”

같은 장소, 같은 상황. 잠든 연을 둘러싼 남자들의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한때는 마음에 쏙 들었던 장식품들이 모조리 거슬렸다. 넋을 놓고 돌아다니는 연에게 해를 입히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침대 프레임도 너무 높아.”

“그래서, 뭐. 방을 다 뜯어고치겠다는 거야?”

“모서리 보호대 같은 걸 붙이는 건 어때.”

“나쁘지 않네.”

이든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자 첸이 동조했다.

현실적으로 집안의 모든 가구를 들어내는 것보단 수월할 일이었다.

첸과 이든이 설우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가늘어진 눈으로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집을 다 뜯어고칠 기세네.”

“이 형은 그러고도 남지.”

두 남자의 티키타카가 이어졌다.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는 설우는 연의 안전을 위해 심사숙고하는 중이었다.

“좋은 생각이네.”

“그치? 모서리에 푹신한 스티커를…….”

“새 식구가 왔으니 뜯어고쳐야지. 마침 시간도 있네, 연이 입원한 동안.”

“잠시 잊은 모양인데, 우리 회사 요즘 되게 바빠. 물론 위험한 물건들 치우는 건 나도 찬성이지만 좀 한가할 때 하지?”

“한가한 사람 있잖아, 여기.”

삐딱하게 선 설우가 이든을 향해 검지를 세웠다.

“저요?”

설우와 똑같이 손가락을 펴 자신을 가리킨 이든이 침을 꿀꺽 삼켰다.

왜 갑자기 화살이 이리로 튀는 거지.

“회사에 있기 심심하다며. 일주일 동안 외근해. 집 구조 바꾸는 거 감독하고, 연이 챙기고. 이 정도면 휴가 아닌가?”

설우의 말을 곱씹던 이든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펠리체는 고용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연의 병원에 붙어있으면 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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