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주차를 위해 직원에게 차 키를 건넨 설우가 정원을 가로질렀다.
한남동 주택촌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다섯 채의 단독주택 전부 CH의 소유였다.
한 채는 차씨 집안의 큰 어른인 차성태 명예회장의 집이었고, 그 옆으로는 차 회장의 핏줄들이 모여 살았다. 욕심 많은 차 회장의 명령이었다.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 혼자 지내는 것은 오직 설우 뿐이었다.
“설우 왔니?”
“안녕하셨어요, 큰어머니.”
“나야, 뭐. 늘 똑같지.”
“오셨어요?”
똑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저녁을 준비하던 차현수 사장의 부인과 며느리들이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설우를 맞이했다.
차 회장은 남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CH그룹 며느리 십계명이란 타이틀로 다큐 방송이 나올 정도로 악명 높았다.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아온 화진은 남존여비 사상이 깊게 새겨진 가풍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들의 이혼에 결정적인 이유로 삼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식구들과 안부 인사를 나눌 때 종종걸음으로 나온 여자를 본 설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왔어요?”
“그쪽이 왜 여기 있지.”
“왜긴. 곧 내 손주며느리가 될 아이니 미리 와 배우는 거지.”
“당신 옷 갈아입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올라가요, 도와줄게요.”
“하하하! 한 시장이 딸을 참 곱게 키웠어. 예의 바르고, 참하고.”
서재에서 나온 성태가 호탕하게 웃으며 칭찬하자 주희가 쑥스럽다는 듯 제 뺨을 쓸었다.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설우의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내가 일곱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옷 갈아입는 걸 왜. 됐으니까 하던 거나 마저 해.”
“시중을 들어 주겠대도 저리 무뚝뚝해서야, 쯧.”
갑작스럽게 호출한 이유가 이거였군.
방으로 들어와 스타일러에 카디건을 걸어둔 설우가 잠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벌써 제 아내라도 된 것처럼 구는 주희가 거북했다.
서류 한 장으로 얻는 이득을 위한 결혼이었다.
공적으로 이루어진 관계, 사적으로는 전혀 손댈 수 없는 관계.
애초에 그렇게 약속된 비즈니스인데. 주희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부부로 얽히고 나면 멋대로 선을 넘고 성가시게 굴 성격을 저도 모르게 드러내는 그녀가 못 미더웠다.
이젠 연이도 함께 해야 하는데. 저 여자가 과연 용납할 수 있을까.
-어, 나야.
“연이는?”
-이든이랑 게임해. 춤추고 난리야.
휴대 전화 너머로 커다란 음악과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갑자기 쓰러지니까 조심하고, 잠들면 잘 지켜봐. 2층엔 절대 못 올라가게 하고.”
-자고 오려고?
“아니, 조금 늦을 수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잘 챙길 테니까.
“그래.”
똑똑.
“설우 씨, 식사 준비 다 됐어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가는 목소리에 설우가 방을 나섰다.
“결혼 전부터 시집살이가 하고 싶나.”
“시집살이라뇨,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다들 힘든 건 안 시키세요. 반찬 덜고 수저 놓는 게 전부예요, 나.”
“언제까지 그 정도가 전부일지 궁금하군.”
“예?”
“내려가지.”
주희의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설우의 아내가 된 것만 같았다.
어서 드레스를 입고 그의 옆에 서고 싶어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 원망스러웠다.
“먹자.”
거대한 식탁에 앉은 이들이 일제히 식사를 시작했다.
수십 가지 반찬들이 널찍한 공간을 빼곡히 채웠다.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만 가득한 침묵을 끊어낸 건 상석에 앉은 차 회장이었다.
“전자, 건설. 두 군데 다 현진한테 밀렸다고.”
“예, 죄송합니다.”
CH그룹 총괄 사장인 현수가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에 물을 마셨는데 또다시 갈증이 일었다.
“네 전처가 실력이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사업적 감각이 워낙 뛰어난 사람이니까요.”
차남이자 설우의 아버지인 CH자동차 사장 현준은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현수가 총괄 사장 자리에 앉은 후로 매출 하락은 물론이고 CH물산이 분식회계 의혹을 받아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악재가 끊이지 않았다.
CH파라다이스의 높은 수익으로 적자를 면하고 있었지만 하나둘씩 현진에게 업계 1위 자리를 빼앗기는 탓에 최근 현수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능력이 부족한 현수를 장남이란 이유로 총괄 사장 자리에 앉힌 차 회장도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는 밀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예, 아버지.”
온화하게 표현했지만, 마지막 기회를 준 것과 다름없었다.
회사를 동생에게 뺏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두 주먹을 꽉 쥔 현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설우는 결혼에 차질 없도록 준비 잘하고. 그래야 내년 대선 준비가 편해.”
“준비할 게 있나요. 식장에 서기만 하면 되는걸.”
“네 처 될 아이는 바삐 움직이는데 같이 밥 한 끼 할 시간도 안 내어준다며. 앞으로 주에 한 번은 함께 식사하거라.”
주희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약과를 선물하며 넌지시 던졌던 한마디가 효과를 보였다고 생각했다.
거절이나 싫은 내색도 하지 않는 설우를 보니 차 회장의 입김이 예상보다 더 강력한 듯싶었다.
식사를 마친 설우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조부를 보았다.
알고 있군. 성태의 곧은 시선을 피하지 않던 설우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정말요? 헙…!”
쉽게 떨어진 승낙에 오히려 놀란 주희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키웠다.
순간 이목이 쏠리자 다급히 입을 틀어막은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서재로 따라 들어오거라.”
차 회장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설우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뒤를 따랐다.
“기어이 찾아냈더구나.”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셨으면 좀 더 수월했을 텐데요.”
서로의 의중을 숨긴 채 매끈하게 찢어진 눈매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외로웠던 탓이었을까.
잔정이 없던 손자는 선우 가(家)의 아이들에게 이상하리만큼 강한 애착을 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정말….
설우가 연을 찾자마자 차 회장 역시 그녀의 사진을 받아보았다.
사랑스럽던 꼬마가 어떻게 자랐을지 궁금했고 호기심은 금세 걱정으로 바뀌었다.
고작 사진일 뿐인데.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이는 사람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연예계로 흘러들었다면 국민들을 들끓게 했을 것이고, 화류계로 흘러들었다면 남자를 안달하게 하는 에이스가 됐을 성싶었다.
“펠리체로 데리고 들어갔다고.”
“예.”
가지고 싶은 건 전부 가질 수 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이들은 너무 많이 가져 그만큼 무료하다. 때문에 희소성에 열광한다.
너는 가질 수 없고, 나는 가질 수 있는 것.
찰랑대는 금발과 신비로운 금빛 눈동자를 가진 동양인. 누구든 손에 쥐고 싶어 안달할 특별함을 가진 아이.
과거의 인연을 차치하더라도 희소성의 가치 하나만으로 끝내 설우를 몸 닳게 하겠지.
“고작 3년인데 그 아이가 뭐 그리도 애틋해.”
“그러게 말입니다.”
“양녀로 들이면 어떻겠니.”
“그럼 연이가 제 고모가 되는 건가요?”
“비꼬지 말아라. 본가로 들여보내. 결혼 앞둔 신랑이 여자애를 끼고 살면 어쩌자는 거야. 못다 한 공부도 시키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CH 그늘에 두면 된다.”
“결혼은 그저 사업입니다. 사생활 간섭은 없는 걸로 얘기 끝냈고요. 연이는 제가 데리고 있어야 합니다.”
“딴맘 품을 생각은 접거라.”
“저 욕심 많은 거 아시잖아요. CH는 제가 가질 겁니다, 큰집 손에 쥐여줄 생각 없어요. 그러기 위해선 한주희가 필요하죠. 연이는, 그때와 같은 동생일 뿐이에요.”
차 회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숨긴 마음 한 가닥까지 꿰뚫어 보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했다.
“그 마음, 끝까지 변치 말아라. 다 늙은 할아비 손 더럽히지 않게 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찌 됐건 본가에 한 번 데려와. 죄다 새카만 사내놈들 밖에 없어 적적하니 손녀 하나 생긴 셈 쳐야지. 가여운 것.”
평온하던 설우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정말 가엽게 여겼다면 그때 보호해주셨어야죠, 적어도 제게 사고 소식은 알려주셨어야죠.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킨 설우가 괜히 시계를 지분거렸다.
“군말하지 않은 건 아이를 두고 거래를 하잔 의미였구나.”
“제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제안하신 거잖습니까.”
“좋다. 모른척할 테니 한 시장 딸과 주에 한 번 식사, 잊지 말거라.”
“다른 게 더 이득이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답지 않은, 하찮은 조건인데요.”
“제 아비한테 어리광을 피운 모양이야. 모임에서 한 시장이 우는소릴 하더라고. 이빨 빠진 호랑이 취급받고 싶지 않다. 체면치레는 해야지.”
가지가지 하는군. 그 나이에 남자를 두고 부모에게 투정이라니.
설우가 허탈한 미소를 지우며 눈가를 매만졌다.
감정적인 동요를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가보겠습니다.”
“파라다이스는 문제없고?”
“물론이죠.”
자신 있게 답한 설우가 미련 없이 서재를 나섰다.
“같이 가요, 설우 씨!”
다이닝룸에서 뒷정리를 하던 주희가 재빨리 따라 나와 팔짱을 꼈다.
설우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밀었다.
“화났어요?”
“귀찮게 굴지 말랬잖아. 남들 다 똑같이 하는 정략결혼에 왜 그쪽만 유난을 떨어.”
“사, 상대가 당신이라면 다들 나처럼 행동했을 거라고요!”
위협적인 설우의 말투에도 주눅 들지 않은 주희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설우는 미리 시동을 걸어둔 차로 다가갔다.
“설우 씨!”
“비켜.”
“매주 금요일로 해요, 우리 만나는 날.”
“수요일. 경고하는데 더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서슬 퍼런 눈매가 닿자 주희가 한발 물러났다.
언제라도 이 혼약을 깨뜨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탁탁탁, 스테인리스 볼에 만든 핫케이크 반죽을 고르게 섞은 첸이 프라이팬에 정량을 부었다.
오일이 반죽을 감싸자 표면에 기포가 오르기 시작했다.
두세 번 뒤집개를 넘나들며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핫케이크가 차곡차곡 쌓였다.
부드럽고 폭신한 빵이 늘어날 때마다 첸의 뿌듯함도 함께 늘어갔다.
“뭐해.”
출근 준비를 마친 설우가 다이닝룸으로 들어섰다.
펠리체로 들어와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고소하고 달큰한 냄새가 풍겼다.
“어제 재료 샀잖아. 안 먹을 거지?”
“응, 어제도 조용히 잘 자던데. 그때만 심했던 건가 봐. 쫓기느라 힘들어서.”
“그러게.”
“근데 지금 거기에 생크림을 또 바르는 거야?”
보기만 해도 단맛이 느껴졌다.
생크림을 고르게 펴 바른 첸이 핫케이크 한 장을 다시 덮고, 또다시 생크림을 발랐다.
그렇게 5단을 쌓아 올린 후 딸기 두 개를 얹어 마무리했다.
“연이 거. 완전 초딩 입맛이더라고. 어제저녁을 먹는데 햄, 달걀, 갈비. 이렇게 세 가지만 골라 먹는 거 있지.”
“살만하니 식성이 돌아왔나 보군.”
채소도 잘 먹는다 자랑하던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굿모닝, 브라더.”
목에 수건을 걸친 이든이 리듬을 타며 계단을 내려왔다.
“핫케이크 먹을 거야?”
“나 단 거 안 좋아하잖아. 아, 우리 셋 다 안 좋아하지.”
“핫케이크!”
“나왔네, 핫케이크 주인.”
그리웠던 달콤한 향에 이끌려 벌컥, 방문을 열고 나온 연이 기다란 복도를 달렸다.
쿵!
“으악!”
“연아!”
“뭐야, 무슨 일이야!”
슬리퍼를 신고 달려오던 연이 다이닝 룸을 앞두고 힘없이 고꾸라졌다.
그녀가 방을 나온 순간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설우가 가장 먼저 달려나갔다.
이든의 입에 차있던 주황색 액체가 다시 유리컵으로 쏟아졌다. 놀란 첸은 핫케이크 접시를 그대로 손에 든 채 거실로 나왔다.
“괜찮아?”
“하하하. 네, 괜찮아요.”
“팔다리 움직여 봐, 손가락도! 어디 부러진 거 아냐?”
“아니에요.”
“일단 일어나.”
호들갑을 떠는 이든을 밀어내고 연을 일으킨 설우가 그녀를 이리저리 돌려 훑어보았다.
“죄송해요, 맛있는 냄새가 나서.”
“뭐가 죄송해. 가자, 네 아침이야.”
“다신 뛰지 마, 알았어?”
첸의 손에 들린 접시를 보고 환하게 웃던 연이 금세 시무룩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는 거야, 괜찮아.
작게 중얼거린 이든이 연의 어깨를 감싸 다이닝 룸으로 들어갔다.
첸이 놓아준 포크와 나이프를 꼭 쥔 연은 감격한 얼굴로 한참 동안 핫케이크를 내려 보았다.
“고마워요, 첸. 너무 맛있겠다.”
“메이플 시럽은 먹을 만큼 뿌리고.”
“와, 진짜 오랜만이다.”
기다란 유리병을 든 연이 핫케이크 위에 시럽을 쏟아부었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럽에 놀란 세 남자가 눈을 깜박이며 핫케이크 접시와 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무 달게 먹잖아. 몸에 안 좋아.”
참다못한 설우가 잔소리를 했다.
그제야 시럽 통을 내려둔 연이 무슨 말을 하려 입을 달싹거렸다.
“왜, 할 말 있어?”
첸과 이든은 출근 준비를 위해 올라가고 맞은편에 앉아 먹는 것을 지켜보던 설우가 뾰로통한 연의 표정을 알아채고 물었다.
“해도 돼요?”
“해.”
“정말요?”
“하라니까.”
설우가 답을 재촉했다.
“오빤 잔소리쟁이에요. 병원에 있던 간호사 아줌마 같다고요.”
물론,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만.
혼날까 무서워 작게 속삭인 연은 고개를 처박은 채 핫케이크를 써는 데 집중했지만,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설우는 이든이 다이닝룸으로 내려올 때까지 목석처럼 앉아 그녀의 정수리를 바라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