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펠리체는 1동부터 25동까지 총 스물다섯 가구로 이루어진 타운하우스였다.
대한민국에서 면적 대비 가격이 가장 비싸기로 유명한 이곳은 ‘사’ 자로 끝나는 직업을 가진 이들부터 재벌, 기업가, 연예인 등 주머니가 넉넉한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어 안달하는 곳이었다.
입주자들만 다닐 수 있는 사립 유치원과 초등학교로 시작해 퀄리티 높은 문화센터, 마트, 병원 등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작은 왕국은 가구 수가 적은 탓에 소식이 빠르고 소문이 많았다.
가장 넓은 부지를 사용하는 1동의 거주자이자 유명인인 설우의 집에 정체불명의 여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퍼지는 덴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오늘의 화젯거리는 1동이었다. 사면이 모두 통유리로 된 브런치 카페에 앉은 여자들은 그 의문의 여자에 대해 떠드는 중이었다.
“정원 돌아다니는 걸 봤다니까. 진짜 백금발이었어.”
“염색이라도 했나 보지. 근데 누굴까? 그 집에 여자 들어간 거 처음이지?”
“처음이지. 서울시장 딸이라는 그 약혼녀도 한 번 안 왔잖아요.”
30대부터 50대까지. 둘러앉은 여자들의 나이대는 다양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비슷한 조건의 상대와 결혼한 이들은 종일 그림을 그리고, 꽃을 만지고, 요리를 배우는 등 취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다 보니 느껴지는 무료함을 남의 이야기로 달래는 것이었다.
“애인인가?”
“누구 얘기하는 거예요?”
큰 눈을 치켜뜨며 다은이 끼어들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을 다물었다.
카페 알바생인 저와 사적인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임을 잘 알고 있었다.
펠리체 입주민들의 습성을 몸으로 부딪치며 배운 다은은 당황하지 않고 음료를 내려놓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아주 거리가 먼 이곳의 사모들은 당연하게 사람의 급을 나눴고 자신들보다 아래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무시하며 따돌렸다.
펠리체 안에서 경제 활동을 하는 이들은 발에 채는 돌 정도로 취급할 것이 뻔했다.
서빙을 마친 다은이 돌아가자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굴 본 사람은 없어요?”
“아직. 1동에 새 가구 들어갔대. 가구들이 그 여자 거면 조만간 만나게 되겠지.”
“얼마 만에 뉴페이스야? 신난다.”
그들 중 제일 어린 아진이 주먹 쥔 두 손을 얼굴 근처로 올려 부르르 떨었다.
다른 이들 모두 그녀의 말에 백 퍼센트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여기가 정말 제 방이라고요?”
“너무 유치하지 않아? 온통 핑크라니.”
“그래. 이건 좀 심했다.”
서랍, 소파, 커튼까지 모조리 분홍색인 방은 지나치게 공주풍이었다.
침대를 감싼 캐노피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은 연이 쪼르르 설우에게 다가왔다.
“마음에 들어?”
“당연하죠! 너무, 진짜, 완전, 좋아요.”
숨을 쉴 때마다 가슴과 어깨가 들썩거렸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동화 속에나 존재할 법한 방이었다.
“쯧, 아직 아기네.”
이든의 큰 손바닥이 연의 정수리를 덮었다.
전날 몽유병 증세를 보이지 않아 한시름 놓은 이들이 연과 함께 첫 주말을 보내는 중이었다.
“여긴 뭐예요?”
“직접 봐.”
두꺼운 벽에 커다란 사각형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연이 충분히 넘어 다닐만한 공간 너머는 드레스룸과 파우더룸이었고, 그곳을 지나면 설우의 방이 나왔다. 둘의 공간을 연결해둔 것이었다.
“우와.”
“일부러 만들어뒀어. 괜찮지? 평소엔 블라인드로 가려두면 돼.”
“괜찮아요. 안심도 되고.”
“사생활 보호가 전혀 안 되는데 괜찮긴.”
“그러니까.”
똑같은 포즈로 벽에 기댄 이든과 첸이 고개를 내저었다. 온갖 유난을 떠는 설우가 새로웠다.
“한번 들어가 봐, 꼬맹이.”
이든이 턱짓을 하자 발발거리며 통로 너머로 사라진 연이 설우의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신이 나 연신 고맙다고 인사하던 그녀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잘 시간이군.”
“잠들기 직전에 저런 식이야?”
“잘 봐둬. 그래야 받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팔을 뻗은 설우가 주저앉는 연을 받아 새 침대에 눕혔다.
“이번에 일어나면 잠든 동안 묶어두는 거에 대해 상의해보자.”
첸이 몸을 바로 세웠다. 눈이 부신 조명등을 꺼준 설우가 방문을 닫으려는 찰나였다.
“어어, 저 안 자요!”
뒤를 돌았던 세 남자가 동시에 연을 바라보았다.
멍한 정신을 깨우려 머리를 흔든 그녀가 걸어 나왔다.
“신선하다.”
“너무 신선해서 놀라울 지경.”
잠이 들어 눕혔더니 1분 만에 일어났다.
첸과 이든은 제자리로 돌아온 연을 훑으며 중얼거렸지만 설우는 말문이 막혀 헛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한 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녀는 당황하는 일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설우를 끝없이 놀라게 만들었다.
“배고파, 밥이나 먹자. 꼬맹이, 뭐 먹고 싶어. 외식할까?”
“좋을 대로.”
“이번에 들어온 돈가스집 괜찮던데.”
점심 메뉴를 고민하며 앞서 걷는 이들의 눈치를 살핀 연이 슬며시 손을 들었다.
“저, 사실 먹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편하게 말해.”
첸이 이든을 밀며 연의 눈높이에 맞춰 자세를 낮췄다.
“라면이요.”
“라면? 겨우?”
“네, 꼭 먹고 싶어요.”
병원 직원들이 간식으로 라면을 끓일 때마다 자극적인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병원에 갇히기 전엔 질리도록 먹었던 라면이 너무 먹고 싶은 날엔 눈물도 찔끔 흘린 그녀였다.
“그래. 라면은 또 내가 기가 막히게 끓이지.”
이든이 개구지게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듯한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든을 쫓는 연을 보며 피식거린 첸과 설우도 천천히 그들을 따랐다.
“다행히 포크가 있네.”
수납장을 뒤져 포크를 찾아낸 첸이 연의 그릇 안으로 넣어주었다.
김이 펄펄 올라오는 라면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던 그녀는 마지막 순서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포크 똑바로 잡아야지.”
“아, 네!”
적당한 크기의 김치를 올려준 설우가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
“먹고 마트 다녀오자.”
“괜찮겠어? 연이 외모도 그렇고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텐데.”
“어차피 앞으로 여기서 살 거잖아.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댔어.”
순식간에 면을 해치운 이든이 국물에 밥을 말며 중얼거렸다.
“뭐라 지껄이든 관심 없어. 아직 필요한 게 많을 테니 마트에 가서 직접 골라.”
연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햄스터가 해바라기 씨를 저장하듯 빵빵해진 볼이 격하게 흔들렸다.
뭐든 좋았다. 힘든 운동을 하자고 해도 즐거울 것이었다.
“먹을 걸 많이 사야겠어. 먹는 양이 어마어마하네. 밥 좀 줄까?”
“네, 많이요.”
“천천히 먹어, 체하겠어.”
“버릇이 되어서요.”
맛있는 라면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연이 이유 없이 헤실거렸다.
“마트에서 잠들면 어쩌지.”
“뭘 어째. 카트에 넣어서 끌고 와야지.”
이든이 놀리듯 킥킥거리자 그녀가 눈을 흘겼다.
“이게 어디서 오빠한테 도끼눈을 떠.”
옆자리에 앉은 이든은 연신 장난을 치며 연의 이마를 톡톡 밀었다.
“밥 먹는 애 놀리지 말고 나갈 준비나 해. 연이는 모자 하나 쓰자. 쳐다보는 거 불편할 거야.”
“네.”
진짜가 아닌 자신을 완벽하게 선우연으로 대하는 게 신기했다.
어색함 없이 저를 대하는 탓에 정말 그녀가 된 것 같았다.
빈 그릇을 치우고 먼저 방에 다녀온 첸이 노란색 야구 모자를 연의 머리 위에 씌웠다.
모자의 끝부분이 코까지 내려앉자 놀라 어깨가 들썩였다.
“이런, 너무 크네.”
“저 그거 할까요? 머리 색깔 바꾸는 거.”
모자를 벗은 연이 화려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그냥 가, 모자는 가서 사면 돼.”
설우가 그녀를 위로하듯 뒤통수를 문질러주며 일어났다.
첸의 예상대로 지나다니는 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주말인 탓에 마트엔 사람이 꽤 많았다.
“와, 씨. 또 분홍색이야.”
이 형이 분홍색에 한이 맺혔나.
먼저 계산해온 모자의 색을 확인한 이든이 혀를 찼다.
“눈치 그만 보고 먹고 싶은 거 담아.”
넓은 마트를 분주하게 둘러보는 연을 과자 진열대 쪽으로 돌려놓았다.
“이게 누구야, 차설우 사장님!”
4동에 사는 아진의 남편이 반가운 기색을 내비치며 빠르게 다가왔다.
1동에 들어온 의문의 여자를 마주한 아진은 심 봤다, 는 얼굴로 열심히 눈을 굴리더니 이내 입술을 삐죽였다.
체격 좋고 잘생긴 남자 셋 사이에 둘러싸인 여자가 내심 부러웠다.
“아, 네.”
친근하게 다가온 우석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맞이한 설우가 내민 손을 잡았다.
우석은 CH 계열사 중 하나인 차 병원의 최연소 성형외과 과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든, 첸. 그런데 이쪽은?”
안면이 있는 둘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우석이 한참 아래에 있는 연을 보았다.
연은 커다란 이든의 뒤로 몸을 반쯤 숨겼다.
“동생입니다. 이름은 선우연이고요. 앞으로 펠리체에서 함께 지내게 됐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아진 씨.”
귀찮아 입을 닫은 설우를 대신해 첸이 나섰다.
이런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그럼요. 아내가 신경 써줄 겁니다.”
누구의 친동생도 아니란 건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지만 우석은 내색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설우는 무조건 가까이 두어야 하는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백아진이에요.”
어서 인사하라는 남편의 다급한 눈짓을 본 아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
“선우연, 인사해야지.”
이든에게 달라붙어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부르자 튕기듯 앞으로 나온 연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대체 저런 인사는 어디서 배워 먹은 건지.
손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설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인사를 마친 연이 쪼르르 이든의 옆으로 돌아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보다 이든을 더 의지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서 과자 골라.”
이든이 긴장한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밀어내자 그녀가 힘없이 밀려났다.
“이번 달 정기 모임엔 참석하십니까? 저번 달엔 오지 않으셔서 다들 서운해했습니다. 추워지기 전에 필드도 한 번 나가셔야죠.”
“골프는 이든이 즐기죠.”
“병원장님께서 손꼽아 기다리십니다. 시간 한 번 내주세요, 사장님.”
“시간이 나면 연락하죠.”
어린 권력자에게 극존칭을 쓰는 남편을 외면한 아진은 수백 가지의 과자를 일일이 집어 구경할 기세인 연을 지켜보았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타입이었다.
“대신 이번 달 모임엔 셋 다 참석하겠습니다.”
“첸.”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렇게 알리겠습니다. 평소보다 더 좋은 장소를 섭외 해야겠네요. 동생 분은 같이 안 오십니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럼 저흰 먼저 가보겠습니다. 음, 동생분이 과자를 정말 좋아하나 보네요.”
아진을 부르려다 의도치 않게 연을 보게 된 우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제야 과자 코너에 있는 그녀를 확인한 세 남자의 입에서 허,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연은 네모난 과자 상자를 테트리스를 하듯 맞춰 쌓는 중이었다.
틈이 보이지 않게 행과 열을 맞춘 과자 상자가 벌써 넉 줄째였다.
“귀여워 죽겠네, 진짜.”
입을 막고 큭큭 거린 이든이 먼저 연에게 다가섰다.
모자챙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자 그녀가 허공에 두 팔을 저으며 반항했다.
“그럼 이만.”
“아, 예. 그럼 모임 때 뵙겠습니다. 여보, 뭐 사야 한댔지?”
“스테이크 고기요.”
펠리체에서 젊은 부부 축에 드는 둘은 제법 다정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설우가 첸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모임에 가려는 이유는 알겠는데, 역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어.”
“사람 심리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펠리체 안에 사는 자칭 귀족들한텐 대놓고 어필하는 편이 낫지. 동생이든 아니든 연이는 우리가 아끼는 아이니 건드리지 말라 움직여줘야 해. 그래야 펠리체에서 편하게 살지.”
첸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설우가 연과 이든을 흘깃거렸다. 이든까지 합세하여 과자 탑을 쌓는 중이었다.
“정신연령이 비슷한가.”
“그럴지도. 카트는 하나 더 끌고 와야겠네.”
과자로 가득 차기 직전의 카트를 허망하게 바라본 첸이 새 카트로 향했다.
“다 고른 거야?”
“네, 충분해요!”
“충분해야지, 이걸 다 채웠는데.”
“이제 다른 코너로 가자. 요거트 같은 거 좋아해?”
“근데 이거 꽉 찼어요.”
“첸이 가져올 거야. 요거트 저쪽에 있네.”
설우가 슬쩍 연의 어깨에 손을 올려 제 쪽으로 당겼다.
어떤 종류의 질투인지 모르겠지만, 저보다 이든을 편하게 대하는 것이 마음을 상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