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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9화 (9/96)
  • 9화.

    쌔근쌔근, 고른 숨을 뱉으며 잠든 연을 둘러싼 세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거듭했다.

    “어쩌지?”

    “어쩔까.”

    “죽은 듯이 자는데?”

    “어제도 죽은 듯이 자긴 했어.”

    설우의 손엔 검은 넥타이 하나가 들려있었다.

    “묶어 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안 묶었다가 다치면.”

    “묶지 말고 문을 잠그는 건 어때?”

    “그럼 뭐해. 방안에 위험한 것투성인데.”

    태평한 대답에 설우가 눈가를 찌푸렸다.

    이든은 생각나는 대로 던지는 중이었고 진중한 첸은 애꿎은 메탈 시계만 뱅뱅 돌려댔다.

    “그냥 묶자.”

    “뒤척이다 손목이라도 부러지면.”

    “아, 묶지 마. 그럼!”

    “어제처럼 돌아다니다 모서리에 머리라도 박으면.”

    “아오!”

    극단적인 첸의 답을 듣던 이든이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답이 없는 문제를 두고 씨름한 지 30분을 넘어서는 중이었다.

    “우리 앞으로 매일 이 짓을 해야 하는 거야?”

    “최대한 빨리 장 박사한테 보여 줘야지.”

    “오늘은 일단 이렇게 두자. 어제가 심했던 걸 수도 있잖아.”

    “연이 방엔 유리나 뾰족한 것들은 넣지 마.”

    “알았으니까, 좀. 여기서 셋이 밤샐래?”

    이든의 재촉에 마지못해 뒤를 돈 설우가 방문을 열었다.

    “이든, 근데 너 술 마신 거 아니야?”

    “이미 내 차 타고 집까지 와 놓고 일찍도 물어본다. 안 마셨어. 내가 아무리 막 나가도 음주 운전은 안 하거든?”

    “막 나가는 건 아나 보네, 다행이다.”

    이든의 머리를 툭 건드린 첸이 먼저 방을 나섰다.

    “술 얘기하니까 또 먹고 싶네. 간단히 한잔할까?”

    “그러자.”

    답지 않게 흔쾌히 수락하는 설우를 미심쩍게 바라본 이든이 자는 연을 흘깃거렸다.

    “여기서 마실까?”

    “깨.”

    “그럼 문만 열어두자. 애가 조막만 해서 뼈도 금방 부러질 거야.”

    겉으로 툴툴거린 이든도 꽤 걱정되는지 쉽사리 방을 나서지 못했다.

    셋 모두 많이 배우고, 경험해 지식이 풍부했지만 처음 마주한 수면장애 앞에서는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었다.

    “공부하자. 다들 태블릿 챙겨 들고 나와.”

    “술 먹자며!”

    “먹으면서 하는 거지.”

    “난 벌써 챙겼어.”

    먼저 자리를 떴던 첸은 노트북을 챙겨 들고 홈 바로 내려왔다.

    경건한 얼굴로 무테안경을 끼는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흘렀다.

    공부는 늙어 죽을 때까지 해도 다 못한다고 하더니.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 그들이었다.

    노란빛을 띠는 조명등보다 밝은 태블릿 액정이 홈 바를 밝혔다.

    “기면증이야.”

    “아니 몽유병이야.”

    “렘수면행동장애 같은데.”

    이든, 첸, 설우의 차례로 연이 가졌을 법한 병을 유추했다.

    빼곡히 적힌 증상을 읽던 설우가 눈가를 긁적였다.

    “가만히 있다가 잠든다며, 기면증이지!”

    “자면서 움직였으니까 몽유병이야.”

    “조용히 해 봐.”

    틱틱거리는 첸과 이든에게 손을 휘저으며 술을 한 입 머금자 이도 저도 아닌 맹맹함이 입안을 채웠다.

    잔에 담긴 얼음이 사라진 걸 보니 쥐도 새도 모르게 다 녹아버린 모양이었다.

    “이거네! 수면장애는 대게 복합적으로 형성된다. 뭐야, 맛없어!”

    해답을 내려줄 단락을 찾아낸 이든이 힘차게 소리치다 인상을 찌푸렸다. 애주가인 그가 용납할 수 없는 맛이었다.

    위스키 본연의 맛을 잃은 술을 치운 이든은 스트레이트 잔을 꺼내 놓았다.

    “설우 형이 말한 건 뭐야? 렘수면행동장애?”

    “꿈을 재현한대. 뇌 이상으로 생기는 병이고 관리를 못 하면 퇴행성 질환으로 이어진다는군.”

    “퇴행성 뇌 질환이면, 알츠하이머나 파킨슨이네.”

    첸의 목소리가 단번에 낮아졌다.

    이제 막 꽃을 피울 어린 나이에 퇴행성 뇌 질환이라니.

    “억지로라도 병원에 데려가야겠어.”

    “찬성.”

    “나도 찬성.”

    장난스럽던 분위기가 잦아들고,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직 제대로 알아보진 못했지만, 처음 가게로 도망쳐 온 모습과 몇 가지 행동들만 보아도 연이 살아온 환경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일반적인 수면장애가 아닌 거 같지?”

    “아니지. 근데 병원에 있었다며 치료는 못 받은 건가?”

    “방치했겠지. 알아보고 있지?”

    “시켜 뒀어. 곧 연락 올 거야.”

    “선우 아저씬 재산도 많았어. 할아버지가 많이 챙겨줬거든. 제주도에 펜션, 강남에 건물. 현금도 부족하지 않았을 거고. 그걸 다 뺏어 처먹고 애는 저 지경을 만들어 놨어.”

    생각만 하던 것들을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분노가 배로 찾아들었다.

    “새엄마 짓이겠지?”

    “참 대단하네. 돈 때문에 신분 세탁까지 하고.”

    “사고가 났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설우가 잔을 비웠다.

    차 회장에 의해 외국으로 보내진 그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되었다.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전까지 돌아보지 않은 건 완벽주의자인 설우의 선택이었다.

    3년을 지냈던 제주도의 펜션과 함께 증발한 일가 때문에 그는 한동안 패닉 상태로 지냈다.

    그들의 사고를 알리지 않은 차 회장을 얼마나 원망했던지.

    일생을 냉혈한 사업가로 살아와 인간적인 면이 없는 차 회장은 혼자 남은 연을 찾지 않았고, 설우는 오래도록 찾지 못했었다.

    “찾으면 어쩔 거야?”

    “아주아주 천천히 망가뜨릴 방법을 생각 중이야. 너희도 의견 내.”

    “나 그런 거 잘해. 사람 괴롭히는 거.”

    바뀐 주제가 마음에 쏙 든 이든이 신나게 답했다.

    “원하는 걸 가졌다 잃는 게 가장 고통스럽지.”

    “줬다 뺏기! 큰 틀은 이걸로 잡는 게 어때? 아, 간만에 재미있겠다.”

    “좋아. 그러니까 빨리 알아 와. 누군지 알아야 원하는 걸 모두 쥐여주지.”

    설우가 입가를 비틀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세 남자의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이 될 여자는 그들의 살벌한 작당 모의를 모른 채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

    현진 그룹 본사 정문.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검은 세단이 들어서자 기다리던 임원진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익숙하게 두 줄로 늘어선 이들은 뒷좌석에서 내린 여자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이런 것 좀 하지 말라니까.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턱 끝을 스치는 단발머리의 여자는 짱짱하게 비추는 정오의 태양을 가리며 건물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서른 중반의 장성한 아들이 있다고 감히 생각지 못할 정도로 잘 가꿔진 외모였다.

    절제된 아름다움과 오랜 시간 공들여 빚은 우아함을 자랑하며 앞장선 그녀는 현진을 이끄는 수장이자 10대 기업을 통틀어 최초로 총괄 회장직을 가진 여성 오너였다.

    “회장님. 한주희 씨가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구?”

    “한주희 씨요.”

    “그게 누군데.”

    “한강일 서울시장의 차녀이고, 차설우 사장의 약혼 상대입니다.”

    “그렇게 말해야 알아듣지.”

    비서실장이 태블릿을 들어 주희의 사진 몇 장을 보여주었다.

    아들 소식은 궁금해하는 양반이 3개월 후면 며느리가 될 여자의 이름조차 모르다니. 차씨 일가 못지않게 무심한 성격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시간 얼마나 있어?”

    “30분 정도 비어있습니다.”

    “아으, 좀 쉬려고 했더니. 나 본사 출근하는 날인 건 어떻게 알고.”

    “매주 금요일 이 시간에 본사로 출근하시니까요. 인터넷 검색만 해도 알 수 있을 겁니다.”

    답을 바란 말이 아니었는데.

    또박또박 정답을 늘어놓는 비서실장 성재를 노려본 화진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20년이 넘도록 함께한 그는 아부 없고, 가식 없고, 거짓 없는 딱딱한 비서이자, 오랜 친구였다.

    “이름이 뭐라고 그랬지?”

    “한주희, 32세. 피아니스트로 현재 모교인 한국대 음대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내년 상반기에 독주회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설우랑 겨우 2살 차이야?”

    “상견례 때 보셨을 텐데 전혀 기억이 안 나시나 봅니다.”

    “그러니까. 영 안 어울렸던 모양이네. 머릿속이 새하얀 걸 보니.”

    “결혼식이 3개월 남았습니다만.”

    “그게 뭐. 마음 바뀌면 하루 전에도 엎을 자식이야.”

    화진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집무실 로비로 들어섰다.

    비서실 한쪽에 앉아 있던 주희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반겼다.

    “안녕하셨어요, 어머님.”

    “그럼요. 주희 씨도 잘 지냈죠?”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그럴까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사람을 상대하는 일엔 도가 튼 여자였다.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던 주희에게 온화한 미소를 짓는 화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성재가 직접 차를 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와, 너무 깔끔하고 고급스러워요. 설우 씨 집무실이랑 분위기가 비슷하네요.”

    “취향은 날 닮았거든. 외모는 반반이고, 성격은 제 아빠를 빼다 박았지. 앉아요, 구경할 거 별로 없어.”

    집무실을 넓게 둘러보던 주희가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을 쓸어 소파에 앉았다.

    상석에 앉은 화진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주희를 관찰했다.

    외모든, 나이든. 잘난 아들을 가진 엄마로서 크게 마음에 차진 않았지만, 시아버지인 성태는 오로지 차기 대권 주자의 딸이란 조건에 혹한 듯했다.

    잠시 대화가 끊긴 타이밍에 들어온 성재가 가장 무난한 녹차를 내려두었다.

    “많이 바쁜 시간에 찾아온 건 아니죠?”

    “마침 30분 정도 여유가 남아서. 갑자기 찾아온 용건이 궁금한데.”

    “상견례 이후로 한 번도 뵙지를 못해서요. 결혼 전에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기도 하고요. 큰 용건은 없어요!”

    “설우는 자주 보고?”

    “아뇨. 설우 씨도 워낙 바빠서요.”

    주희가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어제 스위트룸을 빌려 거하게 쇼핑한 설우를 아는 입장이라 그런지 주희의 말에 웃음이 났다.

    설령 결혼하게 되더라도 평생 사랑받지 못할 것이 눈에 훤했다.

    “우리 설우 어디가 좋아?”

    딱 보기에도 이쪽은 정략결혼이 아니었다.

    기대와 설렘이 감춰지지 않는 눈엔 어서 결혼하고 싶단 열망이 가득했다.

    “다 좋죠.”

    “약혼하고도 여자 만나는 거 같던데. 서로 이해하기로 합의 본 거지?”

    “그렇긴 한데… 안 만났으면 하는 마음은 있어요. 설우 씨한테 말을 못 할 뿐이죠. 어머니께서 한 말씀 해주시면 안 돼요?”

    “글쎄. 조건을 맞춰서 합의했으면 그건 지켜줘야겠지? 나도 사업가고, 정략혼을 해본 입장이라 이런 쪽엔 냉정하거든.”

    설우의 마음을 얻지 못해 불안한 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정치인 아버지 밑에서 온실 속 화초로 자란 주희는 조건, 계약 등을 중요시하며 손익을 냉정하게 따지는 기업가와 마인드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네, 맞는 말씀이세요. 제가 더 노력해야죠, 하하.”

    주희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화진은 차성태 명예회장보다 훨씬 더 불편한 상대였다.

    나이 든 노인은 저를 손녀처럼 예뻐하기라도 했지. 친절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지만 가까워질 틈은 내어주지 않는 화진에게 주눅이 들었다.

    “어머, 시간 빠른 것 좀 봐. 나이를 먹었더니 한 시간이 10분 같고 10분이 1분 같고 그렇다니까.”

    “아직 젊으신데요! 관리도 너무 잘하셨고요.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어머니 시간 그만 뺏어야죠.”

    “다음부턴 꼭 연락하고 와. 그래야 식사라도 같이하지.”

    앞말엔 불쑥 찾아오지 말라는 숨은 뜻이 담겼고 뒷말은 입버릇처럼 하는 빈말이었다.

    둘 다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 주희는 방긋거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안 맞아.”

    “하나 있는 아들 내어주기가 싫다고 하시죠.”

    “그런 거 아니거든? 애가 너무 소녀 감성이잖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랄라야. 차설우가 저런 애랑 잘 살겠니?”

    동의를 구하듯 성재를 보았지만, 그는 찻잔을 치우며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쯧, 하고 혀를 찬 화진이 궐련형 전자담배를 꺼내 스위치를 켰다.

    그동안 테이블을 말끔히 비운 성재가 노란 봉투를 열어 사진을 차례로 나열하자 시원하게 연기를 내뿜은 그녀가 시선을 깔았다.

    “얘 데리고 쇼핑한 거야? 누구야? 예쁘네.”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며 사진을 확인한 화진의 눈썹이 오르내렸다.

    “모릅니다.”

    “이 자식 미쳤나 봐, 왜 안고 돌아다녀. 기자들 기삿거리 없을까 걱정해 주는 거래? 제 엄마가 매번 기사 막느라 얼마를 쓰는 줄도 모르고.”

    파파라치가 붙을 정도로 알려진 주제에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설우를 대신해 화진은 주기적으로 논란거리를 걷어 들였다.

    덕분에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터치는 일체 하지 않았다.

    “차 사장이 알았다면 하등 쓸모없는 짓이라 비난했겠죠.”

    “세상 혼자 사는 놈이잖아. 너무 잘나게 낳아놔서 그래.”

    욕을 하는 척 교묘히 아들을 칭찬하는 팔불출에 성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아볼까요?”

    “됐어, 직접 챙기는 애인 거 같은데. 지랄 같은 성격에 당장 쫓아와, 그거. 기사만 잘 막아.”

    “알겠습니다. 회의 준비 끝났습니다, 가시죠.”

    다 쓴 스틱을 깔끔히 빼내는 데 집중했던 화진이 구겨진 옷자락을 피며 일어났다.

    빡빡한 오후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움직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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