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CH를 제치고 업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호텔인 만큼 꽤 늦은 시간에도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넘실거리는 금발 탓인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 탓인지. 입구 쪽에 앉아 식사를 하던 사람들이 연을 흘깃거렸다.
“저기….”
“괜찮아.”
낯선 장소와 날 선 시선에 주눅 든 연이 설우의 옷깃을 잡았다. 애초에 사람이 많은 곳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앞서 걷던 설우는 연이 입을 떼기도 전에 답했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마감 2시간을 남기고 숨을 돌리던 지배인이 설우를 발견하고 재빨리 뛰어나왔다.
“룸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창가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을 위해 늘 비워두는 룸으로 앞장서며 흐트러진 넥타이를 정리한 지배인이 홀을 지키던 직원에게 다급히 눈짓했다.
눈치 빠른 직원은 메뉴판과 물을 챙겨들고 뒤를 따랐다.
연은 스위트룸에 들어갔을 때와 같이 잔뜩 커진 눈으로 라운지 레스토랑 여기저기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볼이 들뜬 그녀의 기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적당한 코스로 준비해줘요. 와인은 됐고, 이쪽은 딸기 주스.”
“예, 알겠습니다.”
예의를 차린 지배인이 룸을 나서고 연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테이블에 놓인 기본 식기들을 만지작거렸다.
“못 먹는 거 있어?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라던가.”
어릴 적 연이 좋아했던 딸기 주스를 시켰지만, 혹시 자라면서 식성이 바뀌었을까 싶었다.
“없어요. 주는 대로 다 잘 먹어요.”
“채소, 안 좋아할 거 같은데.”
편식이 심해 콩밥이나 잡곡밥을 먹는 날엔 꼭 제 밥공기로 모조리 골라내던 그녀였다.
“고기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채소도 잘 먹어요.”
신이 난 연이 발을 동동 구르며 커다란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시원하게 펼쳐진 한강의 야경이 더욱 입맛을 돌게 했다.
“편식해서 안 큰 거 아니고?”
설우가 한쪽 눈썹을 밀어올렸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란 건지 연은 확실히 체구가 작았다.
하긴, 어렸을 때도 맨날 앞자리에 앉는다며 징징거리곤 했었지.
“편식도 사치였는걸요.”
일상을 전하는 덤덤한 말투였다.
이젠 아무렇지 않았기에 나온,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
병원에서 나오는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없었다.
양이 적은 것은 물론이고 태도가 좋지 않은 날엔 물 한 모금조차 내어주지 않던 곳이었다.
처음 병원에 갇혀 온갖 반항을 해댔던 연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얌전하게 구는 쪽을 택했다.
먹을 것은 모조리 입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편식이 가능할 리 없었다.
식욕이라는 원초적 본능에 굴복해 모든 걸 체념한 채 병원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식전 빵과 수프 먼저 놓아드리겠습니다.”
2단짜리 서빙 카트를 끌고 온 직원이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접시를 차례로 꺼내 올렸다.
코스의 시작부터 휘둥그레진 눈으로 음식과 설우를 번갈아 구경하던 연이 어느새 잔뜩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먹어.”
설우의 허락이 떨어지자 숟가락을 집어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말아 쥔 연이 눈치를 살피며 바르게 바꿔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마구잡이로 입속에 넣었을 테지만 아름다운 야경이 내려다보이고 티슈 케이스 조차 고풍스러운 내부에 있어서인지 먹는 것이 망설여져 설우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설우와 똑같이 수프를 세 번 떠먹은 연은 그를 따라 빵을 집어 들었다.
설우가 빵을 수프에 찍으면 연도 빵에 수프를 찍었고, 크림치즈를 바르면 그녀 역시 크림치즈를 발랐다.
이게 귀여운 짓만 골라 하네.
빵을 뜯는 설우의 입매가 위를 향했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눈망울과 저를 쫓아 움직이는 작은 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전채요리와 샐러드 놓아드리겠습니다.”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된 애피타이저를 본 연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눈치 그만 보고 평소처럼 먹어.”
입맛을 다시는 연에게 제 몫의 음식까지 밀어준 설우가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안 드세요?”
“메인 나오면. 이건 네가 다 먹어. 맛있을 거야.”
“정말요?”
“정말.”
테이블에서 멀어져 팔짱을 끼는 설우를 흘깃거린 연이 포크를 맘껏 움직였다.
전부 한 입 요리인 탓에 접시는 순식간에 비워졌다.
볼이 터지도록 음식을 집어넣은 연은 달 뜬 얼굴로 설우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다음 코스를 기다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설우가 부드럽게 턱 끝을 매만졌다.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는 게 이렇게 뿌듯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 중인 그였다.
뒤이어 나온 메인 스테이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연에게 건네준 설우가 차가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먹으면서 들어.”
“우음, 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환상적인 육질을 맛본 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이런 음식들도 존재하고 있었구나.
“나랑 사는 동안 너는 선우연이 될 거야. 권다미가 아니라.”
“이든이 처음에 불렀던 이름이네요. 그게 누군데요?”
큼지막하게 고기를 썰어 소스를 듬뿍 묻힌 연이 연달아 포크를 움직였다.
세 덩이, 네 덩이. 제대로 씹지도 않고 고기를 밀어 넣는 그녀를 보던 설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뒷말이 이어져야 할 타이밍에 침묵이 흐르자 연이 쭈뼛거리며 포크를 내렸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저 때문에 비위가 상해, 설우의 미간이 한껏 좁아진 듯싶었다.
“그런 거 아니야. 더 먹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 전부 드러나는 참 단순한 성격이었다.
제 얼굴이 꽤 굳었음을 느낀 설우가 설핏 웃어주고 나서야 연이 다시 포크를 들었다.
미어캣이 떠오를 정도로 끊임없이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니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얼마나 숨 막히게 키웠으면.
끔찍했을 연의 시간을 떠올린 설우가 이를 악물었다.
연을 이렇게 만든 인간들을 잡아 단죄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설우가 입을 다문 건 갈등이 되어서였다.
이렇게 뜬금없이, 아무 준비도 없이 네 이름은 권다미가 아니라 선우연이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연이 병원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탓에 현재 상태를 정확히 판단할 수도 없었다.
충격을 받아 더 큰 문제가 생길까 조심스러웠다.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며 고민을 거듭하던 설우가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차피 계속 내 품 안에 둘 텐데 급할 거 없지. 일단은 이름만, 천천히 하자.
“내가 꼭 찾고 싶은 여자야.”
“선우연이요?”
“그래, 선우연. 너랑 아주 많이 닮았어.”
“저랑 닮았다고요?”
닮았다는 말에 놀란 연이 포크로 얼굴을 가리켰다.
세희는 저 같은 돌연변이는 세상에 하나뿐일 것이라며 늘 경멸했다. 그런 저와 닮았다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응. 그런데 너무 꼭꼭 숨어 찾을 수가 없네.”
“그럼 절 구해 주신 게?”
“연이랑 닮아서.”
씁쓸한 미소를 지은 설우가 앞머리를 젖혔다.
눈앞에 앉은 연은 전혀 기억이 없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러셨구나.”
“네가 내 집에서 선우연으로 살아줬으면 해.”
진지한 설우의 얼굴에 연이 슬며시 손을 내려두었다.
이상했다. 원래 제자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우습게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다정하게 챙겨준 이유가 모두 다른 사람과 닮았기 때문이었다니.
순간 피부에 달라붙는 목걸이를 느낀 연이 뜨거운 열이 오르는 얼굴을 숙였다.
조금 전 스위트룸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창피함이 밀려왔다.
이런 이유를 가진 사람에게 제 몸을 줄 것처럼 굴었으니.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말 그대로. 우린 널 연이라 부를 거고, 너는 네 이름을 버리고 펠리체에서 사는 거고.”
그렇게 살다가 자연스럽게 기억을 찾으면 진짜 선우연이 되는 거고.
“그래도 전 그분이 아니잖아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난 내가 보고 싶은 얼굴 봐서 좋고, 너는 여기 살면서 보호받으니 좋고.”
“좋아요, 할래요. 선우연 할게요, 내가.”
사실 망설일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분에 넘치는 좋은 대우를 받고 있으면서도 서운한 감정을 느낀 제가 한심했다.
“잘 생각했어.”
“아빠가 절 찾을지 몰라요. 정말 괜찮을까요?”
“괜찮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 되게 무서운 사람이거든.”
그녀가 말하는 아빠가 누구인지 아주 궁금했다.
스테이크를 써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탓에 듣기 싫은 쇳소리가 울렸다.
찾아오지 않아도 친히 찾아가 줘야겠지.
설우의 서늘한 눈매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쓰고 있는 이름을 알았으니 연을 손에 쥐고 있던 사람을 찾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장님. 도와드릴까요?”
설우가 여자를 안고 룸을 나오자 화들짝 놀란 지배인이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아닙니다. 카드는 룸 테이블 위에 뒀으니 결제하고 내 집무실로 보내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 많은 접시를 싹싹 비우고 후식까지 든든히 챙겨 먹은 연은 룸을 나서기 직전 다시 잠이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잠드는 그녀에게 금세 적응한 설우는 당황하지 않고 연을 안아 밖으로 나왔다.
마감 시간이 지나 홀엔 직원들뿐이었다.
음식은 입에 맞았는지,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수다스럽게 물었을 지배인은 조용히 설우를 따랐다.
두 번에 걸쳐 자동문 버튼을 눌러주고, 엘리베이터까지 함께 올라타 부지런히 에스코트하는 지배인의 친절함이 마음에 들었다.
“라운지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죠?”
“올해로 10년입니다. 홀 지배인이 된 지는 이제 2년 됐습니다.”
“그렇군요. 라운지 관리가….”
“으음.”
“이런, 시끄러운가 봅니다.”
지배인에게 말하는 건지, 혼잣말을 하는 건지.
자세가 불편해 뒤척거리려는 연을 단단히 받친 설우가 미소를 지었다.
「1층입니다.」
기다리던 소리가 들리자 먼저 나선 지배인이 재빨리 열림 버튼을 눌렀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발렛 호출이라도 해드릴까요?”
“아뇨.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든에게 미리 연락을 해둔 설우가 지배인의 배웅을 받고 입구로 향했다.
힘없이 떨어져 달랑거리는 가는 팔이 신경 쓰여 설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호텔 로비를 지나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뚫고 밖으로 나서자 차를 세워 두고 기다리던 이든이 다가왔다.
“뭐야, 또 자는 거야?”
“설우, 설우니?”
연을 눕히기 위해 뒷좌석으로 향하는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셨어요?”
“이든이구나. 오랜만이네. 넌 아직도 키가 자라는 거니? 어째 못 본 사이에 더 큰 것 같아.”
“하하하, 그럴 리가요.”
“아, 외삼촌. 잠시만요.”
열린 차 문으로 연을 누인 설우가 뻐근한 어깨를 두어 번 넘기며 뒤를 돌았다.
그의 외삼촌이자 현진호텔 대표인 성진의 눈엔 호기심이 가득 담겨있었다.
“여자친구?”
“아뇨, 동생이에요.”
“우리 누님은 딸이 없는데. 혹시 네 아버지한테 자식이 하나 더 있었던 거냐?”
“그런 건 아니고요.”
허허, 하고 웃은 성진이 열린 뒷좌석을 힐끔거렸다.
조카가 여자를 안고 호텔을 나오는 모습을 봤으니 눈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누님이 이 장면을 봤어야 하는데. 네가 매형을 빼다 박아 무뚝뚝하다고 어찌나 불만이 많던지. 허구한 날 아들 타령인데, 같이 밥도 먹고 해.”
“자라든지 말든지 나 몰라라 내팽개쳐둔 아들을 왜 갑자기 찾는 답니까. 이래서 호르몬 변화가 무섭다고 하나 보군요.”
“젊었을 때 워낙 워커홀릭이었잖아. 누나도 이제 지치고 늙을 때지. 핏줄이 당길 시기고.”
“전 아직 그런 시기가 아니라 살가운 아들 노릇이 쉽진 않네요. 천천히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부모보다 더 저를 챙겼던 외삼촌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설우가 이든에게 눈짓을 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다 늙어 생긴 막냇동생이 손이 많이 가거든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 이든이 먼저 운전석으로 향했다.
뒤이어 차에 오르려던 설우가 문득 떠오른 얼굴에 다시 성진 쪽으로 몸을 돌렸다.
“라운지 지배인이요, 외식사업부 인사팀이나 관리팀 쪽으로 가면 괜찮을 거 같던데요.”
“아아, 그 친구 괜찮지. 나도 눈여겨보고 있던 참이었다. 까다로운 네가 칭찬할 정도니 더 두고 볼 필요 없겠네.”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래, 조만간 밥 한 끼 하자. 네 동생도 같이 오던지.”
설우를 놀리려 동생이란 호칭을 강조한 성진이 호탕하게 웃었다.
품에 안고 온 아이가 여자든, 동생이든 조카에게 특별한 존재임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