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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6화 (6/96)

6화.

딱딱하면서 말캉했고, 서늘하면서 따뜻하다.

침대인가? 아니면 맨바닥? 병원의 후진 매트리스는 이렇지 않은데.

잠이 덜 깨 몽롱한 정신으로 제가 누운 곳을 확인하려 손을 움직이던 때였다.

“적당히 만지지.”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뜬 연이 그대로 굳었다.

자신이 잠들어 있는 곳이 설우의 가슴팍 위라는 것을 파악하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 어어! 미안해요, 아저씨.”

“…아저씨?”

“아니, 사장님!”

몸을 던져 받아 주고 듣는 소리가 고작 아저씨라니.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대(大) 자 로 누워있던 설우가 허탈하게 웃었다.

핏대 선 굵은 목덜미를 보고 놀란 그녀가 저도 모르게 뱉은 호칭이었다.

“넌 내 직원도 아니잖아. 사장도 별로야.”

“헙! 죄송해요. 그, 그럼 앞으로 뭐라고 부를까요?”

“그건 내려와서 정해도 될 거 같은데.”

원망이 가득 담긴 눈망울과 순진한 금색 눈동자가 부딪혔다.

인내할 수 있는 한계였다.

연은 여전히 자각 없이 피가 몰려 부푼 부분을 문질러대고 있었다.

“네, 지금 내려갈게요.”

“크흑…!”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려 무릎을 굽히는 바람에 연이 설우의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하얗게 질려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설우 때문에 놀라 그대로 힘을 풀어내니 다시 그의 가슴팍으로 넘어졌다.

“어우, 어떡해. 미쳤나 봐. 정말 죄송해요.”

“알았으니까 일단 내려와.”

연이 설우의 옆으로 굴렀다.

더는 사고를 치지 않고 나름대로 가장 빠르게 내려가는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괜찮으세요?”

아무런 움직임 없이 누워 눈을 감는 것을 보니 꽤 아픈 모양이었다.

설우의 옆에 꿇어앉은 연은 안절부절못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신경 쓰지 말고 방에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명상을 하듯 배 위로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올린 설우가 낮게 웅얼거렸다.

아픈 건 둘째치고, 멋대로 달아 오른 몸을 식혀낼 참이었다.

“고맙습니다.”

“호칭은 아저씨 말고 사장도 말고 오빠. 이 얼굴이 아저씨는 아니잖아?”

“네, 오빠. 그럼 편히 누워 계세요.”

편히 누워 계시란다.

붙임성이 좋은 건지, 좋은 척하는 건지.

금세 오빠라고 부르며 고개를 꾸벅 숙인 연이 후다닥 티셔츠를 주워 설우의 침실로 향했다.

이렇게 큰 집에 혼자 사시는 건가.

거실에서 복도를 따라 쭉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침실 역시 한쪽 벽면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있었다.

온통 블랙과 그레이로 이루어진 방을 둘러 보며 옷을 갈아입은 연이 홀린 듯 앞으로 걸어나갔다.

빼곡하게 채워진 나무 데크 중앙엔 거대한 수영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연의 입이 헤벌쭉하게 벌어졌다.

이런 곳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뭐해, 거기서.”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선 설우가 유리창에 딱 달라붙은 연을 불렀다.

“여긴 천국이겠죠?”

천으로 덮인 썬 베드와 나무로 지은 그늘막, 푸른 잎이 풍성한 나무들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거실 테라스에서 보았던 잔디 정원과는 또 다른 세계였다.

연은 여전히 수영장을 바라보았고, 설우는 연의 뒷모습을 감상했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은 직접 만지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게 흩어져 있었다.

“좀 자. 또 갑자기 쓰러지지 말고. 사람 놀라게.”

“안 졸려요. 피곤할 텐데 쉬세요. 저 거실에서 혼자 놀아도 돼요.”

“지하 주차장 옆에 피트니스 있어. 운동하려면 하고, 10시부터 6시까진 가사도우미들 출근하니까 집안일은 신경 쓸 거 없어.”

“제 방 정도는 치울 수 있어요!”

“됐어. 발발거리다 다치는 게 더 민폐니까 그냥 둬.”

“하하하, 네에.”

제 상황 때문인지 민폐라는 단어가 귓가에 콕 박혔다. 정확한 뜻을 아는 단어였다.

‘민폐 끼치지 말고 집구석에 처박혀있어!’

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지겹도록 듣던 말.

“특별히 좋아하는 색 있나.”

“네?”

“두 번 말하는 거 안 좋아해.”

“하얀색만 빼면 다 좋아요.”

“그렇군.”

정신병원을 하얀 집이라 부른다더니. 정말 하얗기만 한 건가.

“갖고 싶은 거나 필요한 건?”

“없어요.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나면 말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연을 보고 픽, 웃은 설우가 시간을 확인했다.

“난 나가봐야 하니까 편히 쉬고 있어. 심심하면 TV 보고, 맞은편 방은 서재니까 책을 읽든지. 펠리체 안은 돌아다녀도 되는데 밖은 절대 나가지 마. 저녁에 데리러 올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자고.”

어느새 출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하루, 이틀쯤 빠져도 무어라 할 사람이 없을 만큼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오늘은 지사 총괄 회의가 있는 중요한 날이었다.

“네!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세요.”

연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좀 이른데.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서있던 설우가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왔다.

설우의 움직임을 따라 또르르 구른 연의 눈동자가 갑자기 뒤돌아선 그를 마주했다.

“옷은 갈아입고 나가야 하지 않겠어?”

“아, 네!”

설우가 침실 안에 딸린 드레스룸을 가리키자 연이 움직였다.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벗겨진 실내화를 잽싸게 주워 달려나가는 모습에 설우의 입가에서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이제라도 연을 찾게 된 건 정말 다행이었다.

***

이태원 먹자 거리에서도 가장 목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3층짜리 건물.

최근 새롭게 리모델링을 마쳐 반들거리는 외관은 깔끔한 현대식 인테리어를 자랑했다.

1층엔 브런치 카페 겸 펍, 2층엔 와인바로 이루어진 값비싼 건물의 주인은 철저한 관리를 통해 젊음을 유지하는 중년의 여자였다.

카페 오픈을 위해 직원들을 닦달하던 여자는 인상을 구긴 채 들어온 상철을 끌고 계단을 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야!”

“전화로 얘기했잖아. 다미 그년 튀었다고.”

“당신 미쳤어? 그게 말이 돼? 내가 걜 어떻게 숨겼는데 이제 와서 놓쳐!”

여자가 짜증을 내며 상철의 팔을 흔들었다. 거금을 주고 세팅한 머리가 덩달아 양옆으로 일렁였다.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상철을 순한 양으로 만드는 유일한 여자는 옅은 화장으로도 원숙미를 뽐내고 있었다.

“평창동에 들이려고 내보냈는데 애들이 넋을 놓고 있었나 봐.”

“걔가 얼마나 눈에 띄는지 몰라? 어릴 때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다 끝이야. 나 완전 빈털터리 되는 거라고.”

사실 그녀는 지금도 빛 좋은 개살구인 처지였다.

불안감에 손톱을 깨물자 기다렸다는 듯 곱게 발린 매니큐어가 벗겨져 나갔다.

세희가 한숨을 몰아쉬었다. 짜증이 또 다른 짜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장세희. 선우 일가가 탄 세단이 전복되기 3년 전, 연과 준의 부친인 선우재호와 결혼한 연의 법적 보호자였다.

“어디 있는지 알아. 곧 다시 데려올 거야.”

“안다고? 그럼 당장 데려와야지!”

“상황이 좀 꼬였어.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자식이 끼어 들어서.”

상철이 으득, 이를 갈았다.

다미를 무사히 평창동에 보냈다면, 세희와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안 돼, 자기야. 이 건물 담보 잡아 대출받은 돈 주식으로 다 날린 거 알잖아. 나 이러다 정말 큰일 나.”

재벌 수준의 씀씀이를 가진 세희는 연에게 남겨진 재호의 재산을 모조리 탕진했고, 남은 거라곤 이 건물뿐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상철의 말을 들어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사고 후 재호와 준의 장례식을 서둘러 마쳤다.

연의 보호자는 당연히 세희가 되었고 그녀는 연의 안부를 묻는 지인들을 뒤로하고 제정신이 아닌 연을 데리고 한국을 떠났다.

연을 두고 한국과 홍콩을 오고 가던 세희는 상철을 만났고 그와 재혼해 선우연을 권다미로 만들고 나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꼭 찾아서 평창동에 보내야 해. 알았지?”

“당연하지.”

상철이 담배를 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희도 세희였지만, 다미를 돌려받지 못한다면 악독한 늙은이의 분노까지 받아야 하는 엿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다.

***

CH 파라다이스의 본사.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휴식도 없이 2시간 째 이어진 총괄 회의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설우가 미국 유학 시절부터 10년 가까이 계획하고 준비한 파라다이스 프로젝트는 경이로운 흑자를 기록하며 완벽하게 성공했다.

취지는 단순했다. 호텔 옆엔 백화점을, 백화점 옆엔 리조트를.

수요가 늘어나는 문화센터에 백화점 별관을 통째로 할애하고 영화관은 필수로 입점시켰다.

그 외에 다른 편의 시설까지 모조리 밀집시켜 놓은 곳이 CH 파라다이스였다.

한 번 들어가면 돈을 쓰지 않고 배길 수 없는, CH로 시작해 CH로 끝나는 하루를 완성시킨 것이었다.

그렇게 CH 파라다이스는 서울과 6개의 광역시로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아시아를 지나 유럽 진출을 앞두고 있었다.

3개국에서의 동시 오픈과 국내 여름 성수기를 앞두고 한껏 예민해진 설우는 거대한 회의실을 채운 경영진을 찢어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국내 지사장들과 전무, 상무급 인사들이 모인 자리의 발표자는 경영본부의 수장이었다.

강남 지사 본부장의 발표 내용이 빈약하면 설우는 가차 없이 지사장을 깎아내렸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발표자인 제주도 파라다이스의 본부장이 고개를 땅으로 처박았다.

“리조트 가진 휴양지들. 정신 안 차립니까? 벌써 6월 중순입니다. 성수기가 코앞이라고. 서머 페스티벌이 지금 몇 군데나 겹친 줄 압니까, 박준태 지사장님.”

“예, 예?”

멍하니 서류만 들여다보던 부산 지사장이 화들짝 놀라 물병을 넘어뜨렸다.

준태는 병뚜껑이 잠겨 있음에 안도했고, 제주 지사장은 타깃이 넘어간 것에, 리조트 부지가 없는 도심의 지사장들은 주제가 자신들과 멀어진 것에 크게 안도했다.

“서머 페스티벌의 종류가 몇 군데서 겹치는지 물었습니다.”

“그, 그게 부산, 울산, 제주, 또….”

지사장이 도움을 청하려 전무와 상무, 본부장을 차례로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박준태 지사장.”

설우와 가장 가까이에 앉은 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부름에 존칭이 사라진다는 건 상대를 철저히 짓밟겠단 예고였다.

“예, 사장님.”

“이번에 면허 취소되셨다고요.”

“아, 그게… 죄송합니다.”

“시간이 남아도나 봅니다. 페스티벌 기획은 이따위로 하고 술 처먹고 운전까지 처하시고.”

펜을 던지듯 내려놓은 설우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죄송합니다.”

부산 지사장은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저보다 스무 살은 어릴 총괄 사장이 호환마마보다 무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3일 드립니다. 전부 계획서 다시 제출하고 다음 주 월요일 2시부터 회의 재개합니다. 점심 든든히 챙겨 먹고 오세요.”

제 앞에 펼쳐진 서류 더미를 대강 주워 담은 설우가 벌떡 일어나자 그의 양옆으로 줄지어 앉은 이들이 재빠르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직원들을 지옥으로 인도한다 하여 염라라 불리는 설우가 퇴장하자 회의실엔 곡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쾅!

“어우, 깜짝이야!”

사장실 소파에 일자로 누워 만화책을 읽던 이든이 거칠게 열리다 못해 벽에 부딪혀 버린 문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형은 문을 왜….”

“다물어, 이든. 저거 지금 건들면 문다.”

설우를 뒤따라 들어온 첸이 칭얼대는 이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닫히지 않은 문밖엔 화가 난 상사를 마주할 자신이 없는 비서실장이 발을 동동 구르고 서 있었다.

넥타이를 마구잡이로 잡아당긴 설우가 담배를 챙겨 테라스로 향했다.

4시부터 시작한 회의가 6시를 지나 끝났다.

영양가 없이 낭비한 시간을 곱씹은 그가 난간에 기대 담뱃불을 붙였다.

“전화.”

불쑥 나타난 첸이 주인 없는 책상 위에 홀로 반짝이던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네.”

-아들, 엄마.

“네, 말씀하세요.”

-딱딱하기는. 호텔에 쇼 예약했다며. 엄마 선물?

“생일이세요?”

-아니.

“그럼 이혼 기념일?”

-아니.

“그런데 왜 선물을 바라세요.”

-정떨어지는 말투는 딱 네 아빠를 빼다 박았어. 여자 것만 본다고 했다며! 여자 생겼니? 아니지, 여자 있어도 이런 거 해준 적 없잖아?

북 치고 장구 치며 호들갑을 떠는 화진의 말을 한 귀로 흘린 설우가 붉게 물든 노을빛을 보며 화를 가라앉혔다.

다 타버린 담배꽁초가 재떨이에 짓이겨졌다.

“이런 거 해주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요. 이만 끊습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호텔에 오지 마세요.”

-내 옷 사는 것도 아닌데 거길 왜 가니? 나 너보다 바쁜 사람이야. 어디 내놓을 수 있는 애는 아닌가 보네. 네 호텔 놔두고 엄마 호텔로 오는 걸 보니.

“내놓고 싶지 않은 애죠. 그럼 들어가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렇게 끊지 않으면 10분이고, 20분이고 말을 붙일 사람이었다.

부모의 사랑이 필요했던 시기엔 나 몰라라 내팽개친 모친에게 이제 와 살가운 아들 노릇은 무리였다.

“저… 사장님?”

“뭡니까.”

“다음 일정 취소할까요?”

“한 시간만 미루죠. 이든, 펠리체에서 연이 데리고 현진호텔로 와.”

이제 막 만화책의 다음 권을 집어 들던 이든이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움직이기 매우 귀찮았지만 건들면 문다니 반항은 넣어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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