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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5화 (5/96)

5화.

화려한 외형의 단독주택들이 줄지어 선 평창동 골목으로 들어선 상철이 룸미러를 흘깃거리며 제 차림새를 점검했다.

오늘 데려다주기로 한 다미를 잃어버려 곤욕을 치러야 할 판에 다른 트집까지 잡혀 좋을 것이 없었다.

육중한 대문 앞으로 차가 서기 무섭게 보안 요원들이 뛰쳐나왔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어르신께 전달받은 사항이 없었는데요.”

“급하게 오느라 따로 연락을 못 넣었습니다. 점심 방문 대신이라 생각하세요.”

이 집에 처음 오는 사람도 아니건만. 경계를 풀지 않는 보안 요원에게 까칠하게 답한 상철이 다 핀 담배꽁초를 발로 짓이겼다.

창석에게 받은 호칭은 실장이었지만, 그저 심부름꾼 정도였다. 저택의 고용인들에게조차 괄시 받는 게 그의 자리였다.

그동안 숨만 붙여 놓은 의붓딸을 빌미로 입지를 다져보려 했건만.

기대만 잔뜩 하게 만들어 놓고 다미를 데려오지 못했으니 재떨이가 날아와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었다.

“들어오시죠.”

저택 내에서 직원들이 사용하는 무전기로 몇 마디를 주고받던 보안 요원이 길을 열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는 대문을 지나자 볼 때마다 감탄하게 만드는 거대한 면적의 저택이 서서히 드러났다.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현대식 한옥으로 방송을 탄 적도 있는 이 집은 상철이 방문하는 본채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별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저택 사람들이 쉬쉬하곤 있지만 저 많은 별채들엔 창석의 후처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평창동 늙은 호랑이가 갈수록 짱짱해지는 이유가 젊은 여자 정기를 빨아 먹어서라는 괴소문이 돌기도 했고.

“어르신, 권 실장 들어왔습니다.”

옛것을 좋아하는 노인처럼 보이기 위해 본인은 물론 상주하는 직원들은 모두 개량한복을 입고 생활했지만, 한옥의 내부 인테리어는 뭐 하나 불편함 없는 최신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들어 오라십니다.”

드르륵, 창호지가 발린 미닫이문이 열리자 개중 화려한 복장의 젊은 여자가 물이 출렁이는 플라스틱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뽀얀 비눗물을 보니 발이라도 닦인 모양이었다.

“간밤에 편히 주무셨습니까, 어르신.”

“우리 약속은 오후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리고 왜 자네 혼자인가?”

매서운 창석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인 상철이 입술 안쪽을 잘근거렸다.

한쪽으로 치워놓은 원목 협탁 위에 제가 찍어 보여준 다미의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몽롱한 표정마저 그림 같은 아이, 이 아이를 데려왔어야 하는 날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미리 준비를 시켜두려 어제 병원에서 데리고 나오는 도중 아래 것들 실수로 아이가 도망쳤습니다.”

“잡아 오면 되지 않나. 갈 곳 없는 어린아이 잡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손이라도 빌려 달라 찾아 온겐가?”

“저, 그게 다미가 도망쳐 들어간 곳이 CH 차설우 사장 소유의 가게였는데, 병원 보안팀장 말로는 차 사장이 다미를 숨겨 주었다고….”

뜬금없는 이름이 나오자 창석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없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 두는 모습을 보며 상철은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차 사장이 숨겨준 게 확실하고?”

“예. 보안팀장이 차 사장을 직접 마주친 거 같습니다.”

불 같이 화를 낼 줄 알았건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협탁을 툭, 툭 두드리던 상철은 다미의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말 욕심이 나는 화려한 아이인데, 하필 차설우라니. 창석의 하얀 눈썹이 오르내렸다.

설우는 상대하기 껄끄러운 인물 중 하나였다.

재계 1, 2위를 다투는 CH그룹의 차남과 현진그룹의 장녀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로 정계 붙박이 인사들도 감히 깔아보지 못하는 로열 핏줄이었다.

성격 차이를 이유로 부모가 이혼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현진과 CH를 잇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거기다 이번엔 한강일 서울시장의 딸과 혼약까지 맺었으니 서른 중반의 나이에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되는 셈이었다.

“근데 차 사장이 왜.”

“예?”

“자네 딸 말일세. 차 사장이 숨겨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곧 혼사도 앞두고 있고… 아니지.”

저보다 더 혈기왕성할 나이의 사내인데 이런 특별한 아이를 보고 욕심을 내지 않을 이유 또한 없었을 테지.

“어떻게 할까요, 어르신. 저희 마음대로 들어가 데리고 나올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애초에 잘 살폈어야지!”

혼자 중얼거리던 창석이 갑작스럽게 쾅, 협탁을 내려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아 신경질이 나던 참이었다.

그저 호기심에 숨겨 주었다가 내보내면 다행이지만, 만일 내어놓지 않는다면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제가 먼저 보았다고 설우를 찾아가자니 면이 서지 않았고, 무턱대고 상철을 들여보내기엔 후폭풍이 두려웠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르신.”

“이쪽도 방법을 찾을 테니 자네는 잘 지켜보다 납치라도 해오게! 그렇다고 너무 나대지는 말고.”

금빛을 뿜어내는 아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서양인이고 혼혈이고 모두 아이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다. 웬만하면 마음을 돌렸겠지만, 쉬이 체념이 되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약속한 돈은 아이를 이곳에 데려오면 곧바로 넣어주겠네.”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만일 데려오지 못한다면, 늙은이를 놀려 먹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걸세.”

누가 누굴 놀려 먹었다는 거야! 나라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냐고.

“물론입니다.”

부아가 치미는 마음을 숨기고 소리 없이 일어난 상철이 90도가 지나도록 허리를 숙였다. 한참 동안 바닥을 바라보던 그는 창석이 대답 없이 몸을 틀고 나서야 방을 나설 수 있었다.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철은 창석의 고민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다미가 특별해도 차설우 같은 대단한 남자가 아쉬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뭐, 금방 내보내겠지.”

대문을 건넌 상철이 담배를 물고 중얼거렸다.

설우와 다미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하는 그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

“와, 말도 안 돼.”

겹겹이 쌓인 보안시설을 통과해 차고와 이어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연은 현관과 내부를 잇는 복도를 지나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원하게 트인 거실의 끝으로 더 시원하게 트인 푸른 정원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간간이 병실로 넣어주던 잡지에서나 볼 법한 광경에 턱이 아래로 뚝, 떨어져 나갔다.

“턱 빠지겠어.”

덩달아 걸음을 멈춘 설우가 벌어진 그녀의 턱을 위로 밀어주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넌 밟아도 되는 친구니?”

타박, 타박. 지나치게 큰 실내화를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가던 연은 회색과 검은색이 조화롭게 섞인 러그를 두고 망설이다 실내화를 가지런히 벗어 두었다.

보송보송, 보들보들. 세상 부드러운 러그 위를 맨발로 돌아다니는 얼굴엔 미소가 만연했다. 꿈만 같았다. 이런 세상이 정말 존재할 줄이야.

“벗을 필요 없어. 상처랑 털이랑 부딪히는 거 안 좋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내화에 발을 집어넣자 숙취 해소제를 챙겨온 설우가 뚜껑을 열어 건네주었다.

“마셔. 술 마시고 입원한 거 알면 노인네 난리 나.”

“네? 이, 입원이요?”

숙취 해소제를 반쯤 비운 연이 콜록거리며 설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가장 두려운 단어였다.

“이런, 놀랐어? 걱정하지 마, 네가 있던 곳과 다른 병원이야.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아픈지 검사하러 가는 거야.”

“안 가면 안 될까요? 갑자기 병원은 좀….”

가까이 다가간 설우가 그녀의 금발을 여러 번 쓰다듬어 주었다. 우물쭈물, 소매를 잡아 뜯는 연이 안쓰러웠다.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다.

도망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병원이 꺼려지는 게 당연하겠지.

“좋아, 병원에 가는 건 조금 미루자.”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제가 계속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요?”

“응, 어서 적응해. 넌 이제 여기서 살 거야.”

“네?”

“여기가 네 집이라고.”

연의 입이 또 한 번 벌어졌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가득했다. 특히 연은, 제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 기억은 병원이었다. 이름도, 나이도, 부모의 얼굴조차 모조리 지워졌다.

15살, 처음 눈을 뜬 순간 눈물을 훔치며 옆에 있던 중년 여자를 엄마라고 믿는 건 당연했다. 서류상으로도 그녀는 분명 엄마였다.

교통사고가 났고, 아빠와 오빠는 죽었다고 했다. 사고 후 보름이 지났기에 장례 절차는 모두 끝나있었다. 슬프지 않았다. 아빠와 오빠를 기억할 수 없었으니까.

“제가 여기서 산다고요?”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입을 타고 흐르는 말은 그때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었다.

***

달그락, 유리그릇과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넓은 다이닝룸을 울렸다.

너무 이른 시간인 탓에 편의점에 들러 산 인스턴트 죽을 연은 맛있게 떠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커피를 마시던 설우가 숟가락을 꺼내 쥐었다.

“이렇게 잡아. 마구잡이로 떠먹으니까 흐르는 게 반이잖아.”

“네에.”

잘못된 습관을 눈감아줄 생각은 없었다. 갇혀있는 삶은 이제 끝났으니 사람들이 깔보지 않을 정도로 가르칠 작정이었다.

“젓가락질 해 봐.”

“네?”

“앞에 김치.”

설우가 맛있게 익은 김치로 눈짓하자 숟가락을 내려놓은 연이 민망한 듯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다. 처음 숟가락을 잡았던 것과 똑같이 젓가락을 쥐자 설우의 한쪽 눈썹이 삐뚤게 올라섰다.

“그렇게 잡아서 뭘 집을 수나 있겠어?”

잔뜩 날 선 말투에 어깨를 움찔거린 연이 김치를 뒤적거렸다.

두 개의 젓가락을 손바닥으로 꽉 감싸 쥐고 있으니 김치를 들어 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교차되어 벌어진 틈에 끼워보겠다고 젓가락을 움직이니 헤집어진 접시 밖으로 빨간 양념들이 튀어나갔다.

배운 적이 없는데 어쩌지, 그냥 못하겠다고 할걸.

젓가락을 써본 기억이 희미했다. 똑바로 할 수 없음을 인지한 후로는 음식을 먹을 땐 숟가락과 포크만을 사용했다.

툭, 결국 설우의 머그잔 앞으로 배춧잎을 날리고 나서야 연은 젓가락을 내려 두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치울게요.”

“됐어, 일단 먹어.”

창피해 붉어진 얼굴로 일어났던 연이 다시 스르르 내려앉았다.

“네.”

“매운 건 좀 먹나?”

“김치 정도는 먹어요.”

전엔 못 먹었는데. 어릴 때라 그런가.

“숟가락 똑바로.”

오랜 시간 이어진 습관을 고치는 건 쉽지 않았다.

연은 설우의 타박 아닌 타박에 주눅이 들었지만, 사실 설우는 제 행동이나 말투가 꽤 사납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잘 먹었습니다.”

“아직 가구가 없으니까 내 방에서 좀 자. 너무 일찍 일어났어.”

“네, 그전에 저기 좀 구경해도 될까요?”

연이 가리키는 곳은 정원과 이어진 거실 테라스였다. 원목 티 테이블이 놓인 테라스엔 아무것도 심지 않은 화단과 선물 받는 족족 대충 세워둔 화분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구경하고 있어.”

“네!”

연이 팔랑거리며 테라스로 나가자 설우는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피곤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예쁘다.”

바닥에 주저앉은 연은 다양한 색감을 가진 패더그라스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갈대와 흡사한 것들이 파스텔 톤의 색을 입고 있었다.

“넌 이름이 뭐니.”

패더그라스를 톡톡 건드리며 중얼거린 연이 으쌰, 하는 기합과 함께 일어나 울타리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올라오니 넓은 정원이 더욱 돋보였다.

울타리가 높은 건지, 연이 작은 건지. 까치발을 들어 울타리에 팔을 건 뒷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설우가 가장 작은 사이즈의 옷을 들고 나왔다.

“나와서 옷 갈아입어.”

나른하게 눈을 깜빡이며 꼬질꼬질한 환자복을 만지작거린 연이 천천히 설우에게 다가갔다. 한 번, 두 번. 감았다가 부릅뜨는 눈짓이 낯설지가 않았다.

“야, 너 설마…!”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장면이 느린 화면으로 눈앞을 스쳤다. 기겁한 설우가 빠르게 달려가 넘어지기 직전의 연을 받아내었다.

“크흑!”

넘어지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대리석 바닥에 등을 부딪히니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 더럽게 아프네.

간신히 머리는 들었지만, 눈앞이 아찔한 순간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설우가 고개를 젖혔다.

짧은 만남과 오랜 이별이었는데. 연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내던진 제가 우스웠다.

계속해서 보이는 이상행동의 정체가 무엇일까. 높은 천장을 향하는 시선에 혼란이 담겼다.

마음이 복잡했다.

일찍 찾지 못한 미안함, 가족과 함께 삶까지 통째로 잃어버린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 과거와는 다른 간질거림. 섞여 드는 감정을 모두 정의할 순 없었다.

가슴팍에 안겨 넘어진 연이 여러 번 뒤척이자 설우의 입에서 더운 숨이 흩어졌다.

쌔근쌔근 일정한 콧바람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어쩌다 이런 자세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곤란했다.

“미쳤구나.”

빨간 입술은 목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고 벌어진 두 다리 사이엔 불청객 하나가 끼어들어 지분거렸다.

“잠깐…!”

도드라진 무릎이 이미 열이 잔뜩 오른 둔덕을 스치자 설우가 이를 악물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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