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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4화 (4/96)
  • 4화.

    각자의 의문을 가지고 모여 앉은 세 남자는 찝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명.”

    “설명은 형이 해야지!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야? 쟤가 왜 여기 있어?”

    종일 구두를 신고 울퉁불퉁한 언덕길을 걸어 다닌 탓에 짜증이 가득 올라온 이든이 값비싼 명품구두를 멀찍이 벗어 던졌다.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수제구두 좋아하시네. 발 아픈 건 똑같구먼.

    “이거나 먹어.”

    잔뜩 튀어나온 이든의 입속에 사과 한 쪽을 물려준 첸이 새로 세팅된 빈 잔을 채웠다.

    이 형은 왜 자꾸 뭘 먹으래.

    이든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순순히 사과를 받아먹었다.

    “룸으로 갑자기 뛰어 들어왔어. 말 같지도 않은 꼴을 해서. 3일은 굶은 애처럼 음식을 퍼먹다 그대로 잠들더군. 어떻게 생각해? 이 좋은 머리로도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데.”

    느릿하게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설우가 조금 전 상황을 곱씹었다.

    자신이 권다미라 주장하는 여자는 분명 연이었다.

    선우준과 선우연. 사랑으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라 구김 없고 빛나던 아이들이었다. 외롭고 어두웠던 제게 잊을 수 없는 3년을 선물한 보석 같은 아이들.

    터울이 크지 않던 준은 둘도 없는 친구가, 어렸던 연은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되어주었다.

    그들과 함께한 3년은, 지옥 같은 경영수업이 시작되기 전 할아버지 차성태 명예회장이 주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였고 마음 놓고 환하게 웃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역시 머리에 문제가 있었던 거 아닐까.”

    “뭐?”

    오후에 만났던 슈퍼 주인의 말을 떠올린 첸이 굳은 얼굴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 가까이 됐다더라고. 염색을 했었나 봐, 금발이 아니라 흑발이었다고 했어. 여기저기 상처가 많았다는 걸 보니 학대도 있었던 거 같고. 워낙 교류가 없어서 동네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부모가 누군지는 모른대.”

    “한국 어디에서건 금발에 금안은 눈에 띄니까. 억지로 렌즈를 끼우진 못해도 염색은 시킬 수 있었겠지.”

    아삭한 사과를 넘긴 이든이 첸을 거들었다.

    “밤이고 낮이고 넋을 놓고 돌아다니는 걸 여러 번 봤대. 멀쩡히 걷다가 쓰러진 연이를 발견하고 구급차에 태워 보낸 적이 있어서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얼굴을 기억하나 보더라고.”

    “어찌 됐든 만나서 다행이네. 그 동네에 살았던 걸 확인한 거 빼곤 얻은 게 없었는데.”

    “기를 쓰고 찾아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더니만, 결국 제 발로 나타날 줄이야. 이게 바로 운명, 뭐 이런 건가?”

    이럴 때 보면 신이 존재하는 거 같기도.

    첸이 허탈한 미소를 짓고 술잔을 비웠다. 연을 찾기 시작한 지 반년이 지나고부터는 오기가 생겼다.

    찾을수록 꽁꽁 숨는 연과 숨바꼭질하는 기분이 들어 꼭 제 손으로 찾고 싶었건만.

    “잘 됐지 뭐! 끝내 못 찾으면 어쩌나 했는데. 축하해, 형.”

    “날 전혀 기억 못 해. 이름도 권다미라더군.”

    “사고로 머리를 다쳤잖아. 후유증 같은 건가?”

    선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마지막 기록은 병원 기록이었다.

    교통사고로 인한 뇌 손상이 의심되나 보호자의 강력한 요구로 퇴원 조치. 제대로 된 검사도 받지 못한 달랑 한 줄짜리 기록.

    생활 반응은 물론 출국 기록도 없이 사라진 그녀가 낯선 모습으로 제게 돌아왔다.

    “앞으로 알아봐야지. 검진 예약해, 최대한 빠른 일정으로. 날짜 맞춰서 내 일정도 빼고. 이제 선우연 아니고 권다미로 돌려. 서류상 부모로 되어 있는 것들 찾고, 연이 있던 병원도 찾아.”

    취기가 오른다고 생각했는데. 연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머릿속이 맑게 개었다.

    “뭐지, 일이 더 많아진 거 같은 기분은.”

    “많아진 거 맞아.”

    술잔을 부딪치며 투덜거리는 첸과 이든을 보고 피식 웃은 설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그만 마시려고?”

    “잘 자고 있나 봐야지.”

    탁, 소리와 함께 설우의 모습이 사라지자 의아한 얼굴의 이든이 첸을 바라보았다.

    “친동생도 아닌데 뭘 저렇게까지 챙겨?”

    “친동생이 아니니까 저렇게 챙기지.”

    “아, 그런가.”

    바본가. 이든에게 들릴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린 첸이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오랜만이야, 연아.”

    침대 위에 걸터앉은 설우가 곤히 잠든 연을 내려 보았다.

    하얀 얼굴과 최상의 합을 이루는 금발이 베개 위로 곱게 흐트러져 있었다.

    이불이 너무 두꺼운 탓인지. 쌔근쌔근, 작게 숨을 내쉬고 있는 연의 볼에 붉은 기가 돌았다.

    꽤 오래 찾아 헤맨 너인데. 막상 눈앞에 자고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릴 적 모습이 남아 있는 듯하면서 묘하게 달랐다. 길어진 속눈썹과 높아진 콧대. 빨간 입술. 젖살이 빠져 매끈해진 턱선까지. 어디 하나 미운 구석이 없는 얼굴이다.

    한동안 연을 뜯어보던 설우가 곤란한 듯 눈썹을 긁적였다.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연은 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작은 꼬마가 아니었다.

    아, 역시 좀 더운가.

    후끈하게 열이 오른 목덜미를 주무른 설우가 불편한 와이셔츠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연을 흘깃거리며 받쳐 입은 반소매 티까지 벗은 그가 다시 침대 위에 앉았다.

    씻으려고 일어나 옷을 벗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게 아니라, 제가 지금 잠이, 잠들면 저 좀 묶….’

    “설마, 묶어달란 말은 아니었겠지.”

    뒤척이는 연을 따라 설우의 시선도 옮겨 다녔다. 아스팔트를 뛰어다닌 탓에 새카맣게 물든 작은 발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성격의 그가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더러웠지만, 그것보단 볼품없이 굳어진 피딱지들이 더 불쾌하게 다가왔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걸까. 구겨진 얼굴로 한참 연을 지켜보던 설우가 픽, 웃으며 일어났다.

    16살, 어렸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제 모습이 우스웠다. 이젠 그런 순수 따윈 남지 않았는데.

    씻고 나올 때 물수건을 만들어 와야겠다는 생각을 거듭하며 설우가 욕실로 들어섰다.

    그가 사라지고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미동도 없이 단잠을 자던 연이 눈을 떠 움직인 건.

    스르륵, 침대에서 일어나 걷는 연의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그녀가 걸어간 곳은 값비싼 위스키가 진열된 장식장 앞이었다.

    “신기해, 맛있어 보여.”

    설우가 술을 마실 때 머릿속에서 떠올렸던 말을 중얼거린 연이 장식장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손에 잡힌 위스키 병뚜껑을 연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벌컥, 벌컥, 40도에 가까운 호박색 액체가 모조리 사라졌다.

    병을 비우기 무섭게 몸에 힘이 빠진 연이 비틀거렸고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조각난 위스키 병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연아!”

    시끄러운 소리에 급히 가운을 입은 설우가 깜짝 놀라 다가왔고, 이든과 첸도 눈을 끔뻑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거 지금 뭐 한 거야? 술 마신 거야?”

    깨진 조각 사이에서 독한 위스키의 상표를 발견한 설우가 연의 입가에 손가락을 대어 보았다. 숨은 쉬고 있었다.

    분명 반이 넘게 남아 있던 술이었는데, 술병이 깨진 바닥엔 술이 조금도 쏟아져 있지 않았다.

    이 술을 한 번에 다 마셨다고? 왜? 설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든, 구급상자 좀 찾아 봐.”

    답지 않게 굳은 설우를 대신해 첸이 유리 조각 위에 쓰러진 연을 다시 침대로 옮겼다. 환자복 팔뚝 부근에 피가 베여 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었나? 이 애 혹시 알콜중독으로 입원한 거 아니야? 우악!”

    구급상자를 찾아온 이든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자 첸의 손이 가차 없이 뒤통수로 날아왔다.

    “약하고 밴드 줘.”

    소매를 차분히 접어 올린 설우가 알콜솜을 뜯어 문지르고 약을 펴 발라 밴드를 붙여 주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거 같은데. 대체 어디가 문제인 거야?”

    “몽유병 같은 건가.”

    “뭐?”

    “묶어달란 말을 하려고 했었던 거 같아.”

    “몽유병이 실제로 이렇구나. 와, 근데 이 애 정말 예쁘다. 이러니 설우 형 애를 태우지.”

    “동생 같은 애야, 그만 나가.”

    제대로 말리지 못해 멋대로 뻗은 머리를 정리한 설우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펠리체로 가는 게 낫지 않겠어?”

    “깨면 데려가야지. 정 실장 시켜서 괜찮은 인테리어 디자이너 미팅 잡으라고 해.”

    “알았어, 쉬어.”

    “형아, 우린 한 잔 더 하자!”

    체격이 큰 이든이 어깨에 손을 올리자 탁, 소리가 나게 손등을 쳐낸 첸이 문을 열었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

    “웁… 우읍!”

    목을 타고 무언가 넘어오려는 낌새를 느낀 연이 눈을 번쩍 떠 침대에서 내려왔다.

    깨질 듯한 머리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야보다 간신히 밀어 내린 토사물을 게워내는 것이 먼저였다.

    있는 힘껏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연신 눈을 깜빡이며 화장실을 찾아냈다. 스탠드 조명이 여러 군데 켜져 있는 덕에 빠르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우욱, 우읍! 미쳤나 봐, 대체 얼마나 먹은…. 우윽! 콜록, 콜록!”

    독한 알콜 냄새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샐러드를 우물거린 것이 마지막 기억인 것을 보니 예고 없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꿈의 잔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호기심에 술을 마셨던 것 같은데, 현실에서도 쏟아 부은 것이 분명했다.

    남의 가게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주제에, 이런 꼴을 보이다니. 당장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혹시 현태가 가게 앞에서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끊임없이 구역질하면서도 잡생각이 끊이지를 않았다.

    “더 해.”

    “우욱…!”

    쓱, 소리 없이 다가온 설우가 연의 금발을 한 손으로 모아 잡았다. 가볍게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위장을 짜내듯 남아있던 술과 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괜찮아?”

    “아뇨, 죽을 거 같아요. 입 좀 헹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비틀거리는 연을 세면대까지 부축해 준 설우가 팔짱을 끼고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거기 앞에 분홍색 칫솔 새 거야, 써.”

    “네, 감사합니다. 으으…, 가슴 속이 불타는 거 같아.”

    혼자 중얼거리며 양치질을 시작한 연을 두고 나온 설우가 방의 불을 켜고 옷을 챙겨 입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지만 펠리체로 갈 생각이었다. 바의 룸 안에 딸린 이 방엔 없는 것이 많았다.

    “새벽엔 좀 춥겠지.”

    연에게 입힐 카디건까지 골라 놓은 설우가 옷장 문을 닫았다.

    “저기, 수건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이를 닦은 김에 세수하고 발까지 씻은 연이 물을 뚝뚝 흘리며 화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잘 닦아, 바로 나가야 하니까.”

    역시 쫓겨나게 되는구나, 어디로 갈까. 경찰서로 가 도움을 청하면… 아니, 소용없을 거야.

    “혹시 신발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뻔뻔해 보이겠지만, 맨발로 돌아다니는 건 정말 안 될 거 같아서요.”

    “이거나 입어. 곧바로 차에 탈 거니까 여기 실내화로 충분할 거야.”

    “차요? 제가 차를 타요? 보안팀장이 결국 저를 찾은 건가요?”

    “아니, 내 차. 우리 집으로 갈 거야. 여긴 불편한 게 많아.”

    “저, 정말요? 절 데리고 가신다고요?”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 설우는 수건을 쥐고 굳어진 연에게 직접 카디건을 입혀 주었다.

    심란한 새벽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떤 설명을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그였다.

    “그래. 나도 물어볼 게 많으니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가자. 위액 올라오기 전에 죽이라도 먹어야 해.”

    “나 혹시 죽은 거예요? 아니면 이거 꿈인가? 사실 아직도 병원에 갇혀 있는 걸까요?”

    “뭐?”

    “그렇잖아요. 내 인생에 그쪽 같은 행운이 있을 리가 없다고요.”

    어깨를 미는 힘에 떠밀려 신발장에 선 연이 제 볼을 꼬집었다.

    쓴웃음을 짓는 그녀를 내려 보니 삼십 센티 가까이 차이 나는 키가 처음으로 실감이 났다.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닐 거란 생각은 왜 안 하는 거지? 이 어두운 새벽에 널 어디 팔아 버릴 수도 있잖아.”

    “이제 와서 무서운 척 해봐야 소용없어요. 바보 천치도 사장님이 나쁜 사람 아닌 거 정돈 알 수 있을걸요?”

    이렇게 한결같이 호의적인 사람은 처음이었다. 늘 화내고, 때리고, 소리치는 사람들과 지내온 연은 그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달칵, 탕.

    룸으로 나온 설우가 코를 찌르는 위스키 향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들이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첸은 없었지만 이든은 소파에 뒤집어진 채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아까 맛있는 거 가져다주신 분이네요. 왜 이러고 계신 거예요?”

    “신경 쓰지 마, 제정신 아닌 놈이니까.”

    이 작은 걸 행여나 잃어버리지 않을까. 기다란 카디건 소매를 쥔 설우가 가게 안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연을 데려가기 위해 10시간 가까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현태는 꿈에도 모를 설우의 전용 주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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