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아니, 이봐요! 말이 틀리지 않습니까. 이쪽은 확인할 필요가 없다니까!”
“잠깐 문만 열어보겠다니까요. 거참 쩨쩨하게 구시네.”
“어? 이 자식들 봐라. 이거 놔! 안 놔?”
“여기서 나온 여자가 그랬다니까? 우리가 찾는 사람 이 방에 있다고.”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걸걸한 목소리를 감상하던 설우가 잔에 남은 술을 모두 털어 넣었다.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나가더니 이게 앙큼한 짓을 했네.?
우당탕, 몇 번의 소란이 지나고 결국 룸의 문이 활짝 열렸다.
죽을죄라도 지은 듯 고개를 숙인 직원을 한심하단 눈빛으로 질책한 그가 당당하게 들어오는 현태를 올려 보았다.
“정말, 성가시네.”
다미를 쫓아온 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머릿속에 새긴 설우가 담배 케이스를 찾았다. 체구와 차림새는 조직폭력배와 흡사한데, 대체 뭘까.
“이 여자 본 적 있으시죠? 정신병원을 탈출한 환잡니다. 환각과 망상이 심해 빨리 데려가지 않으면 위험해요. 어디 있는지 말씀해 주셔야…!”
투욱.?
“아, 뜨거워!”
“우악!”
장황한 설명을 들으며 연초를 반쯤 태운 설우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담배를 튕기자 뜨거운 불씨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현태의 볼을 스치듯 날아간 불씨는 뒤쪽에 서 있는 다른 덩치들의 옷을 태웠다.? 깜짝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한 현태를 보며 설우가 입가를 비틀었다.
그래, 환자복 비슷한 걸 입고 있었지.?
“그런 환자는 못 봤는데.”
이 바의 사장이라고 했던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에게 겁을 들어먹은 현태가 마른 침을 삼키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삐끗했다면 제 볼에 볼썽사나운 화상 흉터를 남길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저 문은 뭡니까?”
“조금 늦네.”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설우는 현태의 질문을 대놓고 무시하며 방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오만한 행동에 결국 발끈한 현태가 설우를 잡으려 손을 뻗을 때 빠르게 다가온 구둣발 하나가 그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렸다.?
“크헉!”
우스운 소리를 내며 쑤셔 박힌 현태가 바닥을 뒹굴었다.?
“뭐야, 이것들은?”
“치워.”?
타이밍 좋게 도착한 이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엎어진 채 저를 올려다보는 현태에게 비릿한 미소를 지어준 설우는 그대로 문 안으로 들어갔다. ?
그의 공간을 침범한 이들이 계단 위로 끌려 나가는데 걸린 시간은 그들이 다미를 찾으려 이 바를 차지하고 있던 시간보다도 훨씬 짧았다. 아주 우습게도.
“하, 제기랄.”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대충 구둣발로 비벼 끈 현태가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도망치는 환자를 잡는 일에 이골이 났다지만, 매번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이든 한 명에게 처참히 짓밟힌 현태와 부하들은 바의 입구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어슬렁거리는 중이었다.?
찢어진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그가 사촌 형이자 다미의 부친인 상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애들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뭐야, 아직도 못 찾은 거야?
“그게, 어디 있는지는 짐작이 가는데 데리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상철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얻어맞은 몸이 더욱 욱신거렸다.
“청담동 골목에 있는 바에 들어간 모양인데, 그 가게의 사장이란 놈이 내놓지를 않습니다. 이쪽에 실력자가 있어서 데리고 나온 애들로는 무리입니다.”
-이 무능한 새끼가. 겨우 술집 양아치한테 당하고 전화를 해? 거기 위치가 어딘데.
“CH백화점 뒤쪽 골목입니다. 바 이름은 영문자 J 고요.”
-보낼 테니까, 잠깐 제이? 거기 사장이라고 했다고?
“예.”
-하아….
상철의 깊은 한숨을 마지막으로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왜 말씀이 없으시냐 묻고 싶었지만, 거북한 욕지기를 듣게 될까 참은 현태는 휴대 전화를 붙들고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다시 들어갈 생각 말고 일단 출입문만 잘 감시해.
“하지만 어르신께서 알기 전에 최대한 빨리 잡아 두어야 하지 않습니까.”
현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이유를 뻔히 아는 사람에게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어르신께 말씀드릴 거야.
“예? 아니, 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다시 가게로 내려갈 생각 하지 마라. 거기 사장 성질 더러우니까. 네놈 하나 요단강 보내는 거, 일도 아닐 거다.
“누굽니까, 그 남자.”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얼추 예상은 했지만, 목소리를 잔뜩 깔고 겁을 주는 상철 때문에 순간 오금이 저렸다.
-있어, 다이아 물고 태어난 놈. 몇 시간이 걸리든 다미 나올 때까지 대기하다가 데려와.
“…예, 알겠습니다.”
끊어진 휴대 전화를 바지 뒷주머니로 욱여넣은 현태가 또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청담동 골목을 죄다 뒤집고,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흠씬 얻어맞고, 이제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제 처지가 새삼 서러운 그였다.
***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선 설우가 허전한 공간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제가 숨겨준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이 한 개라 나갈 수 없었을 텐데, 어딜 간 거지.
숨을 만한 곳을 훑으며 두리번거리던 설우가 욕실 문을 열어젖힐 무렵이었다.
끼익, 불쾌한 소음과 함께 나무 의자가 밀리며 식탁 아래 숨어있던 다미가 눈치를 살피며 기어 나왔다.
“다 갔어요?”
“응, 갔어.”
벽 너머로 익숙한 현태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이 남자가 현태를 막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폐쇄 병동 보안팀장인 그는 환자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사람들 틈에 섞여서요. 보시다시피 눈에 띄어서 숨을 곳이 별로 없거든요.”
“쿼터치곤 색이 진하군.”
이목을 끄는 금빛은 어릴 때보다 더 도드라진 것 같네.
긴 시간을 돌아 영롱한 눈동자를 마주하니 꺼내 만져보고 싶다는 위험한 충동에 휩싸였다.
“쿼터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친아빠의 엄마, 그러니까 친할머니가 서양인이라고 들었어요. 자세한 건 저도 잘 몰라요.”
너희 아빤 순수 한국인인데.
매끈하게 정리된 눈썹이 들썩였다.
너희 아빤 한국인이고, 너의 그 아름다운 색은 엄마를 닮은 거라고.
목 끝을 두드리는 진실을 묻어둔 설우는 다미가 밀어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눈이 좋다고 해두지.”
설우는 처음 그녀가 룸으로 들어섰을 때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뜯어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머릿속을 채우는 단어는 작다, 였다. 키도, 체구도, 얼굴도, 하다못해 손발까지 작았다. 여전히.
밝은 곳에 있으니 이런저런 상처들 또한 더 자세하게 보였다.
손목의 붉은 자국은 꽤 오랜 흔적이었다. 하루 이틀 묶여 있다고 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염치 불고하고 신세를 지고 있긴 하지만, 저도 창피한 건 알아서요.”
뻘쭘한 미소를 지은 다미가 다시 한번 손목을 뒤로 숨겼다.
“앉아. 원하는 만큼 쉬다 가도 괜찮으니.”
“잡히면 죽으려고 했는데.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으려고 했다고?”
“덕분에 안 죽었죠, 아직은.”
날카로운 설우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선하게 웃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다짐이었다.
“이름이 뭐야.”
“권다미요.”
“권다미, 권다미.”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생소한 이름을 들은 설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채웠다. 어서 첸과 이든을 만나야 할 것 같은데. 이 꼬맹이를 어찌해야 하나.
“나도 이름 알려줘요.”
“왜 내 이름을 몰라?”
“모르죠, 처음 봤는데. 유명하신 분이에요? 그렇다고 해도 전 잘 몰라요.”
“설우, 차설우.”
“와, 예쁘다.”
“그런 소린 처음… 아, 두 번째군.”
같은 사람에게 두 번째.
“정말요? 엄청 예쁜데.”
다미가 금안을 반짝이며 설우를 바라보았다.
기억하지 못해 저를 찾아올 수 없는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꽤 서운함이 느껴졌다.
씁쓸한 입맛을 다신 설우가 위스키를 찾아 움직였다.
“원래 여기 사시는 거예요?”
“아니.”
“아, 그럼 이 가게 사장님이에요?”
“뭐, 그런 셈이지.”
아주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맡고 외부인을 마주한 다미는 신이나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평소 같으면 성가시다고 신경질을 냈을 그는 꽤 성실하게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이런 데 차리려면 얼마나 들어요? 나도 이런 분위기 좋은 가게 사장님 하면서 살고 싶다.”
“얼마였는지 기억 안 나.”
“엄청 비싸겠죠?”
진심으로 이런 게 궁금한 걸까. ?영양가 없는 질문을 하는 의도를 찾아보려 그녀의 눈을 바라본 설우의 입꼬리가 작은 곡선을 그렸다.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와 닮아있는 동그란 눈이 진심으로 궁금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우스웠다.
“아마도.”
“그렇구나. 사장님은 되게 부잔가 보네요.”
“그런가.”
꼬르륵, 대화가 끊긴 타이밍에 거대한 뱃고동 소리가 룸을 울렸다.
민망함에 다급히 배를 감싸 쥔 다미가 설우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이마를 긁적이며 웃는 다미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던 설우가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어, 형.
“방에 음식 좀 가져와. 적당한 걸로.”
-알겠어.
“어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지만 다시 꼬르륵, 다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뱃속이 또 한 번 요동쳤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저녁을 일찍 먹어서요, 헤헤.”
저 꼴을 하고 대체 뭐가 좋은 거지. ?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저를 대하는 다미를 관찰하던 설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드러난 살결엔 구타의 흔적이 가득했다. 깡패 같은 이들에게 쫓기고, 발은 엉망진창.
최악의 상황에서 생판 모르는 남과 시간을 보내는 여자가 저렇게 헤실헤실 웃는 게 정상인 건가.
똑똑, 간결한 노크 소리와 함께 이든이 직접 카트를 끌고 들어왔다. 샐러드와 파스타, 먹기 좋게 자른 샌드위치가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와, 진짜 맛있겠다. 감사합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늘어나는 접시의 개수를 헤아리던 연이 벌떡 일어나 음식을 가져온 이든에게 허리를 숙였다.
“어? 어어어어, 선우연이잖아!”
“네?”
조금 전 벌어진 소란의 원인 제공자를 제대로 확인한 이든이 화들짝 놀라 헛것이라도 본 양 눈을 문질렀다.
어릴 적 사진을 수백 번도 더 본 탓에 익숙하기까지 한 얼굴은 분명 3년을 찾아 헤맨 그 아이였다. 나이를 먹어 외모가 변했다 한들 저 금발과 금안을 가진 다른 이가 존재할 리 없었다.
“나가.”
“아니, 이게 대체….”
“나중에 얘기하자고.”
이든이 입을 삐죽이며 룸을 나서고, 꺼내둔 위스키 병을 딴 설우가 잔을 채울 때까지 다미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먹어.”
침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앉아 제 행동만 쫓는 이유를 뒤늦게 알아챈 그가 짧게 허락을 말했다.
“먼저 드셔야죠.”
“난 됐으니까 그냥 먹어.”
“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뭐 저렇게 인사성이 밝은지. 기다렸다는 듯 포크를 챙겨 들고 꾸벅 고개를 숙인 다미가 파스타에 있는 커다란 새우를 찍어 입에 넣었다.
“어떡해. 너무 맛있어.”
조용히 술을 마시는 그의 눈치를 살핀 다미가 소리 나지 않게 접시를 앞으로 끌어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저녁을 일찍 먹은 게 아니라 안 먹은 거 같은데.”
거슬리는 긴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기며 허겁지겁 음식을 밀어 넣는 다미를 보는 설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세 살배기 꼬마가 숟가락질하듯 다섯 손가락을 전부 사용하여 포크를 감싸 쥔 손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감싸 쥔 포크로 파스타 면을 떠먹다시피 하고 있었다.
몇 가닥을 말아 기어이 숟가락 위에 얹는 이들에 익숙해져 있는 그에겐 다분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온갖 식사예절을 배우는 그의 세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연은 포크질을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았었다.
계속해서 저를 관찰하는 설우의 뜨거운 시선에도 다미의 포크는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파스타 접시를 비운 그녀는 남은 파스타 소스를 한껏 찍은 샌드위치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설우는 다시 술잔을 비웠다. 너무나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 탓인지, 분명 한껏 주름져 있어야 할 그의 미간이 깨끗이 펴져 있었다.
꼴사나워 보인다거나 없어 보인다는 독설이 수없이 튀어나왔어야 할 입도 잠잠했다.
“그렇게 맛있나.”
“네.”
빵빵했던 볼을 비운 다미가 배시시 웃었다.
빛나는 눈, 곧게 뻗은 콧대, 붉은 입술. 그것들을 모두 사용해 다양한 표정을 짓는 다미는 그가 그리워했던 즐거움을 주었다.
슬슬 취기가 오르는 건지. 몸을 감싼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달라붙자 설우가 에어컨을 틀었다. 강하게 불어오는 찬바람에 얇은 환자복을 입은 다미가 슬쩍 몸을 떨었다.
“추워?”
“조금요. 근데 괜찮아요.”
제집도 아닌데. 주인이 더워서 켠 에어컨을 꺼달라는 뻔뻔한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말없이 일어선 설우가 침대 위에 있던 담요를 들여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감사합니다.”
샌드위치 두 개를 금세 해치운 다미가 이번엔 샐러드 접시로 시선을 옮겼다. 먹음직스럽게 드레싱이 뿌려진 샐러드를 바라보는 다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하나 물어봐도 되나.”
“백 개도 괜찮아요.”
“병원에서 지낸 거야?”
“네.”
백 개를 물어도 괜찮다더니. 병원 이야기를 꺼내자 다미는 멍한 얼굴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왜?”
“부모님이 보내서요. 아, 감사합니다.”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던 샐러드를 오물거리는 다미의 앞으로 생수 한 병이 놓였다.
“먹어, 나중에 물을게.”
“아 그게 아니라, 제가 지금 잠이, 잠들면 저 좀 묶….”
반쯤 감긴 눈으로 설우를 바라본 다미가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뭐야, 이건.”
이런 황당한 경우를 봤나.
음식을 먹던 도중 잠이 들어 한쪽으로 기우는 그녀를 받아낸 설우의 표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