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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잠든 사이에-2화 (2/96)

2화.

자정에 가까운 시간. 유흥업소가 넘쳐나는 청담동의 어느 골목은 늘 그랬듯 밝고 화려했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들고, 술에 취해 흥이 오르고, 간간이 작은 다툼을 벌이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가득 찬 곳.

우글우글 모인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달리는 한 여자가 골목을 채우고 선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하얀 환자복을 입은 여자는 지저분한 골목을 맨발로 달렸다.

움직임을 따라 펄럭이는 기다란 금색 머리카락 위에 색색의 조명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

“뭐야, 영화 찍는 건가?”

“이 시간에? 카메라도 없는데.”

“눈동자 봤어? 엄청 예쁘다. 외국인인가 봐.”

“우리나라 사람 같던데?” ?

빠르게 지나가는 그녀를 본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은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여자의 뒷모습이 희미해질 무렵 검은색 슈트를 차려입은 장정들이 그녀가 지나간 길을 따랐다. ?

다미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아스팔트 조각이 발바닥을 할퀴어도 멈출 수 없었다.

골목 깊숙이 들어온 그녀가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보다는 시끄럽고 복잡한 곳에서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오랫동안 숨어있던 본능이 소리쳤다. ?

지나온 길목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가드들이 꽤 가까이 따라붙은 듯싶었다.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하자 달리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도망쳐 나온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쉽게 끌려갈 수는 없었다. ?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임과 동시에 하늘이 주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니 제발 뛰다가 잠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

도망쳐 나오기 전 상철과 현태의 대화를 되뇐 다미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것으로 모자라 이젠 칠십 먹은 노인네에게 저를 팔겠다니. ?

끝까지 버티자는 굳은 다짐을 하며 고개를 돌리던 다미가 이제 막 계산을 마치고 나와 어수선하게 몰려있는 무리의 틈으로 섞여들었다. ?

대부분 술에 얼큰하게 취해 있었고, 그들이 나온 VIP 바의 문지기들은 취한 손님들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

마른 침을 삼킨 그녀는 재빨리 바의 입구로 뛰어들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면 금세 제게 이목이 끌릴 것을 알고 있었다. ?

“방금 누구 들어가지 않았어?”

“뭐? 누구.”

손님과 대리 기사를 매칭시키던 문지기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로 무언가 펄럭인 거 같은데. ?

긴가민가한 얼굴로 입구를 바라보니 텅 빈 계단 아래로 출입문이 흔들리고 있었다. ?

“이 봐, 대리 기사는 아직이야?”

가게로 들어가 확인을 하려는 찰나, 계속해서 주정을 부리던 손님 하나가 문지기의 발목을 잡았다. ?

뭐. 착각한 거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가 도착한 대리 기사와 손님을 무사히 주차장 밖으로 내보낼 때쯤 나타난 건, 저보다 풍채가 좋은 여러 명의 남자였다. ?

“혹시 이 여자 본 적 있습니까?”

현태가 쥐고 있던 다미의 사진을 문지기 둘의 눈앞으로 내밀었다. ?

“못 봤는데요, 너 봤어?”

“아니, 처음 보는데.”

“정말 못 봤습니까? 이 근방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근처 다른 주점들은 모두 뒤졌고요. 가게 안으로 들어가 한 번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

더러운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깍듯한 말투에 바의 문지기들이 고민이 담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도망을 치다니.

계획이 틀어지자 미친놈처럼 날뛰고 있는 상철 때문에 직접 밖으로 나온 보안팀장 현태는 이런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밀어 붙여봐야 저만 손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 맞다!”?

“왜?”

손님을 차에 태우기 전,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던 남자가 아차 싶어 소리를 질렀다.

“좀 전에 누가 들어간 거 같다고 했잖아. 출입문도 흔들렸었는데 정신없어서 확인을 못 했거든.”

“야, 근데 오늘 가게에 사장님 오셨잖아.”

“아오, 젠장! 또 된통 깨지겠네.”

“내가 찾는 여자가 이쪽으로 들어간 게 맞는 모양입니다. 조용히 둘러볼 테니 들여보내 주시죠. 소란스러워지면 피차 곤란할 거 같으니까.”

“좋습니다. 하지만 1층 마지막 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세요.” ?

그들이 말했던 사장이란 존재가 있는 곳임을 눈치챈 현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을 밟았다. ?

다미를 찾지 못하면 당연히 그 방까지 뒤져볼 작정이었지만, 일단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먼저였다. ?

***

“예단, 예물은 어른들끼리 결정하시겠대요. 다른 건 웨딩플래너한테 맡겨도 드레스랑 신혼여행지는 같이 고르는 게 어때요? 설우 씨 예복도요.”?

“시간 없어.” ?

“당신 바쁜 사람인 건 잘 알겠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남의 결혼식처럼 굴 거예요? 겨우 석 달 남았다고요.”

“뭐든 상관없으니 그쪽이 원하는 대로 해.”

하, 또 그쪽이란다. 이거, 저거가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가. ?

체념 섞인 한숨을 내뱉은 주희가 제 앞에 놓인 스트레이트 잔을 단번에 비웠다.

내가 이래서 술이 늘지. ?

“나한테 내주는 시간이 그렇게 아까워요? 내가 뭐 매일 이러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한두 달에 한 번인데!”

“한주희 씨. 비즈니스를 할 땐 말이야, 계약하기 전에 한 번, 요구사항을 조율하기 위해 한 번, 계약서에 사인하기 위해 한 번. 대충 세 번 정도 상대를 만나. 계약 기간이 3년이라면 3년 동안 세 번. 그런데 우리는? 계약서에 사인도 하기 전에 지나치게 자주 만나는 중이지. 아주 성가시다고.”

설우의 길게 뻗은 손가락이 말을 따라 움직였다.

엄지, 검지, 중지를 차례로 접어 보이는 거로 모자라 우리라는 단어에서 저와 주희를 번갈아 가리켰다. ?

말귀를 못 알아듣는 유치원생을 가르치듯 천천히 움직이는 제스쳐를 저도 모르게 눈으로 따르던 주희가 아차 싶어 고개를 흔들었다. ?

따분함을 전혀 숨기지 않는 약혼자가 원망스러웠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제가 원해 조른 결혼이고, 제가 원해 매달리는 남자였다. ?

“우리 사이가 전부 비즈니스는 아니잖아요. 겨우 비즈니스로 끝낼 거면 나랑 왜 잤어요?”

“그쪽이 자고 싶어 하길래. 오는 여자는 굳이 안 막잖아, 내가. 이쪽 세계에 소문 파다할 텐데? 다만, 당신한테 내 시간을 또다시 쓸 만큼 큰 메리트가 없었다는 거지.”

내가 자기 위에서 얼마나 허리를 흔들어댔는데. 뭐? 시간을 쓸 만큼 큰 메리트가 없어?

모욕적인 말을 들은 주희가 애꿎은 샐러드를 휘적거렸다. 울컥 화가 밀려왔지만, 끝까지 부정할 수 없었다. ?

설우는 몸을 섞는 동안 신음은 고사하고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았었다. 한 번의 잠자리 이후 그를 갖기 위해 더욱 안달하는 쪽은 저였다. ?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는데. 이제 와 오만하고 무심한 그의 성격을 이기지 못해 떨어져 나간다면 후회는 제 몫일 것이 뻔했다. ?

차설우는 언제나 남달랐다.

조각 같은 페이스는 부수적인 부분이었다. 먹이사슬의 끝에서 모두를 내려다보는, 고급스럽게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거친 들짐승의 페로몬을 풍기는 그에게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난 여자들의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

주희는 승자였다. 차기 대권 주자인 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차설우를 가지기 직전까지 왔다. 사교 파티에 갔다 하면 모두 저와 설우의 결혼에 대해 연일 떠들어댔다. ?

차설우의 예비 신부. 이 칭호 하나가 그녀의 자존감을 끝도 없이 높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이렇게 무뚝뚝한 남자를 마주 보고 앉아 혼자 떠들어대는 게 전부였다. ?

설우가 눈썹을 긁적거렸다. 따분하다 못해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제 앞에 앉은 여자를 만나는 시간은 꼰대들의 모임에 자리하는 것만큼이나 따분하다. 그만큼 재미가 없다. ?

오늘도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하여 시간을 내어줬더니 저런 시답지 않은 말들이나 늘어놓고 있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 앞에서 이야기를 끝내야 했는데. ?

아, 이 결혼을 정말 해야 하는 건가. ?

“영 내키지 않는데.”

“네?”

그가 중얼거린 말의 뜻을 되묻는 주희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온더록스 잔의 가장자리를 타고 손가락을 돌리는 흔한 행위에서 묘한 색기가 흘렀다. ?

설우가 주희를 바라보았다. 첸과 이든이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져 오니 이제 그만 가보라는 말을 꺼내기 직전이었다. ?

누구도 노크 없이 들어올 수 없는 설우의 공간에 드르륵, 큰소리를 내며 외부인이 들어섰다. ?

어두운 조명 아래 흩어지는 금발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멋대로 그의 공간에 들어온 여자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 ?

쿵, 하는 거센소리가 룸 안을 울림과 동시에 설우의 심장도 쿵, 소리를 내며 아래로 가라앉았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당황한 설우가 빠르게 표정을 지우며 불청객을 훑어 내렸다. ?

새하얀 피부엔 드문드문 멍 자국이, 팔목과 발목엔 묶여 있던 자국이, 어울리지 않는 맨발엔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

흡사 도망 노예와 같은 차림에 순간 이 나라에 여전히 노예 시장이 남아 있었나, 하는 멍청한 의문이 들었다. ?

제 팔목에 닿은 시선을 느낀 다미가 재빨리 팔을 등 뒤로 숨겼다.

누군가에게 보이기엔 창피한 상처였다. ?

“뭐예요, 당신?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저, 그게….”

주희가 멋대로 들어온 다미를 쏘아보았다. 설우의 무감한 눈동자가 낯선 여자에게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붉은 입술이 잘게 떨렸다. ?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느닷없이 들이닥친 여자는 단번에 시선을 빼앗을 만한 여러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

타고난 가는 선, 고소한 우유가 절로 떠오를 만큼 하얀 피부, 작은 얼굴에 자리 잡은 완벽한 이목구비,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화려한 색까지. ?

같은 여자에게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불청객을 설우의 시야에서 치워야 한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머릿속을 채웠다. ?

“앞에 가드들은 뭐 하는 거야? 당장 나가요!”

“죄송합니다. 잠시만 숨겨 주시면 안 될까요? 밖에 남자들이 나갈 때까지만요.”

어떻게 알고 저를 따라 들어왔는지. 우르르 몰려드는 구두 발소리를 들은 다미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잡히기 싫다. 만일 이들이 저를 숨겨주지 않는다면 혀를 물고 죽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드는 참이었다. ?

“숨겨주면?”

“설우 씨!”

정처 없이 떠돌던 다미의 눈동자가 설우에게 닿았다. 여유롭게 소파에 기대 잔을 들어 올리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푸른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금안. 그토록 찾아 헤매던 네가 제 발로 내게 걸어 들어올 줄이야.

“제, 제가 가진 게 없어서요. 그래도 부탁드릴게요. 제발….”

“이쪽으로.”

설우가 소파 뒤쪽에 있는 문을 향해 턱짓했다. 그가 사용하는 개인 룸이었고, 문을 통해 나가면 술에 취했을 때 간혹 머무르는 공간이 있었다. ?

꽤 다급한 얼굴이었다. 울음을 참으려는 것인지 삐죽거리는 입술이 퍽 귀엽게 느껴져 일자로 닫혀 있던 설우의 입꼬리가 휘었다. ?

“감사합니다.”

90도 이상 허리를 숙여 인사한 다미가 재빨리 문을 열고 사라졌다. ?

그 뒷모습을 노려보던 주희가 신경질적으로 스트레이트 잔을 비웠다.

제가 아는 차설우는 득이 되지 않을 호의는 베풀지 않는 사람이었다. ?

“왜 숨겨주는 건데요?”

“어디 잡혀 있던 거 같아서?”

“아닐 수도 있죠. 그리고 당신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 아니잖아.”

“무슨 대답을 원해. 관심이 생겨 숨겨줬다는 대답을 원한다면 그걸로 하지. 그리고 이야기 끝났으면 그만 가.” ?

“신혼집은 당신 지금 사는 집으로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천천히 제 짐 들여놓을 테니 그렇게 알고 계세요.”

흥미가 담겼던 설우의 얼굴이 금세 건조하게 가라앉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그를 노려보다 결국 소파에서 일어난 주희가 요란스럽게 문을 닫았다. ?

“당신들이 찾는 여자, 저기 1층 마지막 방에 있어요.”?

씩씩거리며 룸을 나선 주희는 테이블 자리와 룸, 화장실까지 구석구석 뒤지고 있는 남자 중 하나를 붙잡아 설우의 룸을 대충 가리키고 바를 나섰다. ?

저 남자들이 전부 몰려들면 성가신 것은 질색하는 차설우가 여자를 내어 주겠지. ?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마셔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좀 전에 마주친 깡패 같은 남자들이 빨리 여자를 찾아 데려가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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