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23화 (외전 완결) (123/123)

외전 11. 일리안의 시간

“율리어스. 이만 내려줘.”

무대 뒤편에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워낙 어둡고 좁은 곳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 으슥한 곳에서 율리어스의 품에 안긴 채 있던 일리안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율리어스가 말없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놓아주긴커녕 일리안의 허벅지를 받친 손에 더욱 힘을 준 채.

“싫습니다.”

“……너 진짜 오해했냐.”

율리어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을 긍정이라고 느낀 일리안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나 오늘 지갑 도둑맞았다.”

“…….”

“그런데 멀리서 지갑 도둑놈이 보이기에 달려 나갔고, 그러다 애랑 부딪쳐 넘어질 뻔해서 에릭을 잡고 바로 선다는 게 그만 같이 구른 거지.”

“그래서 에릭 밀튼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는 겁니까.”

‘뒹굴었다’는 말 아래에 깔린 그 미묘한 어투에 일리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얼굴만큼은 얼음장처럼 무감각한 녀석이 현재 심사가 매우 비틀어져 있다는 것쯤은, 일리안이 아닌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인마, 유…….”

일리안이 낮게 한숨을 쉬고 한 번 더 그를 달래려 했을 때였다. 일리안의 뒤에는 공연장으로 보이는 벽이 존재했는데, 율리어스가 그곳에 일리안을 바짝 몰아붙였다.

일리안은 제 등에 벽이 닿으며 몸이 흔들리자 저도 모르게 놀라 율리어스의 목을 두 팔로 감쌌다. 온전히 그에게 안긴 채였기에 떨어질까 두려운 탓이다.

“윽! 유리!”

“유리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뭐? 갑자기 왜…….”

“지금부터 말을 듣지 않을 예정이라.”

유리라고 부르면 당장 그만둬야 할 것 같잖습니까.

낮게 덧붙인 율리어스가 제 검은 눈을 내리떴다. 그 검은 눈빛이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지만 일리안은 차마 그것을 볼 새가 없었다.

율리어스에게서 떨어질까 싶어 그의 허리에 다리를 벌려 둘러야 했다. 거기다 그의 목에 두른 팔까지 보자면, 멀리서 보았다간 까만 그림자와 함께 음험한 짓이라도 하고 있는 커플 같았다.

벽과 율리어스 사이에 낀 일리안은 어쩔 수 없이 숨소리가 그와 가까워졌다. 둘 사이로 풀벌레의 울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율리어스, 화났냐?”

“예.”

일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율리어스는 눈 한 번 감지 않은 채 말했다.

“화, 많이 났습니다.”

율리어스는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제 품에 가둬진 일리안의 입술을 한입에 삼켰을 뿐이다. 그가 일리안의 아랫입술을 물고 아플 정도로 빨아 당겼다 자근거리며 씹기를 반복했다.

고통과 함께 기묘한 쾌감이 찾아왔다. 일리안은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율리어스의 목 부근 옷깃을 꽉 잡아 쥐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가 주는 쾌감과 고통을 모두 받아들이기에 벅찰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내일 입술 어쩌냐.

문득 드는 걱정에 일리안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그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일리안이 다른 생각을 한 순간 율리어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가에 제 입술을 묻은 율리어스가 나직이 속삭였다.

“다른 생각이 듭니까.”

“뭐? 다른 생각이 아니라 네…….”

“왜 자꾸 제게 틈을 보이세요, 일리안.”

율리어스가 속삭일 때마다 볼 쪽이 간지러웠다. 그도 그것을 아는지 일부러 그렇게 구는 것 같기도 했다.

실력이 많이 녹스셨습니다. 일리안의 귓가로 율리어스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 말에 일리안은 반박하지 못했다. 오히려 율리어스의 옷깃을 쥔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가며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 입을 맞추고 있던 율리어스가 그대로 볼을 타고 내려가더니 목덜미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거의 쇄골 근처까지 내려간 율리어스는 그대로 그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그 고통에 일리안은 벌린 입 사이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윽.”

“이상해요, 일리안.”

“뭐, 뭐……?”

“당신이 울거나 고통스러울 때면 분명 무척이나 힘들었는데…….”

왜 제가 주는 고통에 아파하는 당신을 보는 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율리어스는 쇄골에서 조금씩 위치를 바꿔가며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입술이 옮겨가는 그 사이사이, 율리어스는 그녀를 괴롭히기로 작정했는지 자꾸만 말을 걸었다.

“가르쳐 주세요. 일리안, 일리안…….”

“학, 생이 말을 듣지 않는데… 교육은, 무슨!”

그때였다. 일리안이 기대고 있던 벽은 나무로 만들어진 기둥에 천만 두른 조잡한 형태인 탓에 그 안쪽 소리가 무척이나 잘 들렸다. 때문에 누군가 그곳을 걸어가자 발소리가 곧장 들려왔다.

소리가 잘 들리는 것은 이쪽뿐만이 아니라 상대도 그럴 터였다. 일리안은 어금니를 씹어가며 제 입을 닫았다. 그러자 저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흐어엉, 무대에 올라가기 무서워요.”

“으응? 로빈. 괜찮아, 어머니가 널 응원하고 계시잖니!”

“흐윽, 흐끅.”

그 뒤로도 선생님으로 보이는 목소리가 아이를 달래는 게 들려왔다. 율리어스와 일리안이 하고 있는 짓과는 무척이나 다른, 순수한 대화였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긴장한 일리안은 그만 율리어스를 멈추려 들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이미 일리안의 목덜미에 머리를 박은 채 행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의 어깨까지 잡아가며 그를 멈추려 들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를 악문 일리안이 입술만 움직여 속삭이듯 말했다.

“……율리어스, 그만. 멈춰야…….”

“멈추고 싶으면 유리라고 부르세요.”

뭐……?

일리안은 순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너무도 조용히 말한 탓도 있었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목덜미를 놓아주지 않은 탓도 있었다. 한 박자 늦게 이해한 일리안이 뒤늦게나마 그 이름을 부르려 했을 때였다.

일리안이 입을 벌린 순간 율리어스가 기다렸다는 듯 제 입으로 그것을 막았다. 그에 일리안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치자 그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어졌다.

할 수 있으면.

분명 율리어스는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꼭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뒤로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 잠식되어 갔다.

* * *

“……어, 에릭.”

일리안과 율리어스가 다시 예의 그 테이블로 돌아온 건 시간이 제법 흐른 뒤였다. 당연히 돌아갔을 줄만 알았던 에릭이 홀로 테이블을 지키고 서 있었다.

에릭을 발견한 일리안이 혹시나 싶어 율리어스를 힐끗 바라봤지만, 그는 이미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분위기가 아까 전보다는 괜찮은 것 같자 그녀도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녀를 한심하게 보고 있던 에릭이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어?”

“……됐다.”

에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율리어스를 한 번 바라봤다가, 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일리안에게 넌지시 말했다.

“옷깃은 세우는 게 어떠냐. ……곧 라울도 나올 텐데.”

“무, 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일리안이 허둥지둥 목덜미를 가렸다. 에릭의 말대로 옷깃을 세워도 이상하지 않을 옷이라 겨우 그걸로 가려야 했다.

무대 위는 한창 공연이 진행 중인지 여러 아이들이 나오고 있었다. 일리안은 그것을 바라보며 율리어스에게 그제야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율리어스, 넌 여기 어떻게 왔냐.”

“아이가 초대했습니다.”

“널? ……나는 초대 안 하고, 너를?”

율리어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무대 위에서 라울의 반 아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라울은 두 번째 줄에 있는 탓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키가 큰 편이라 이마가 겨우 보였다.

일리안이 라울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있을 때였다. 진행자의 목소리가 장내를 커다랗게 울렸다.

“아이들을 보러 오신 부모님들, 모두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무대 위에 있던 아이들이 하나같이 제 부모님을 찾으며 손을 흔들기 바빴다. 일리안은 진행자의 말과 부모님을 찾는 아이들을 보고서야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파티에 초대되는 건, 아이의 부모님이었던 거다.

아마도 라울은 고민했을 터였다. 초대장을 건네준 선생님께서는 부모님에게 주라 했을 텐데 디노도, 타피아도, 헤이븐 윈터도, 적어도 라울의 부모가 아니었으니까.

그 사실에 일리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말았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율리어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부모님을 위한 티켓이라더군요.”

“…….”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네 어머니인 일리안 하인리히는 내 사람이라고.”

“그러니, 그 티켓을 줘.”

율리어스의 한마디에 일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저 멀리 무대 위에 서 있던 라울이 율동 순서에 맞춰 첫 번째 줄로 옮겨 온 게 보였다. 뒤에 서 있던 라울은 조금 시무룩해 보였는데, 앞줄로 옮겨 오며 일리안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춤을 추던 라울이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은 모두 앞에 나올 때마다 제 부모님에게 손을 흔들기 바빴다.

일리안은 저도 모르게 눈가가 달아오르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라울이 저토록 평안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어쩐지 눈물이 나왔다.

공연이 끝나자 에릭이 먼저 제가 먹은 꼬치들을 챙기며 말했다.

“간다. 라울도 봤으니까.”

“……벌써?”

“내 동생은 나온 지 오래야. 오랜만에 라울 보려고 기다린 거지.”

에릭은 율리어스와 일리안을 힐끗 보고는 혀를 차며 떠나갔다. 그렇게 떠난 에릭은 아마도 몇 년은 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에릭이 아주 떠나 버리는 건 아니니까.

라울의 공연이 마지막이었는지 파티는 슬슬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리안도 슬슬 라울을 찾아 함께 저택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말없이 서 있던 율리어스는 그대로 일리안의 옆에 섰다. 둘의 주위에 있던 부모들은 모두 아이를 데리러 가는지 무대 뒤쪽으로 향했고, 일리안과 율리어스도 그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워낙 사람이 많고 복잡한 덕분에 라울은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사람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자 저 멀리 라울이 보였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태세로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일리안이 먼저 소리쳤다.

“라울!”

라울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고 일리안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선생님의 손을 놓고 일리안과 율리어스를 향해 달려왔다.

“헤입븐, 어떻게 왔어요? 티켓 안 줬는데…….”

“율리어스만 초대했다기에 억울해서 따라왔지.”

“그게요, 선생님이 부모님한테 드리는 거라고 해서…….”

라울이 일리안의 눈치를 보며 제 손을 꼼지락거렸다. 일리안은 웃으며 그런 라울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래도 괜찮아. 율리어스한테 줬으니까.”

“응, 율니가 부모님한테 주는 건 자기한테 주라고 했어요.”

“율니가 아니라 공작 전하.”

“공작 저나.”

일리안과 라울, 그리고 율리어스는 천천히 저택을 향해갔다. 그러자 품에 안겨 있던 라울이 문득 일리안에게 물었다.

“헤입븐, 율니랑 결혼해요?”

“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닌데.”

“근데 율니가 티켓을 왜 줘요? 헤입븐, 율니랑 결혼하면 내 부모님 해줘요? 일니안처럼?”

라울은 아직 결혼이 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때문에 율리어스랑 결혼하면 다 괜찮은 줄 아는 것 같았다. 일리안이 그걸 뭐라 설명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둘을 가만히 바라보던 율리어스가 툭, 지나가듯 말했다.

“결혼할까요.”

“……뭐?”

“결혼해요, 헤입븐! 율니!”

미치겠네……. 이미 라울은 둘이 결혼한다고 생각했는지 혼자서 신나 있었다. 일리안이 제 이마를 짚자 율리어스가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당신이 하고 싶을 때 하자고 하세요.”

“……프로포즈냐?”

“제가 하자고 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나는 언제든 하고 싶으니까.

그 말에 일리안은 귓가가 달아올랐다. 그녀가 차마 율리어스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자 라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헤입븐, 얼굴이 빨개요!”

기나긴 밤이었다.

일리안의 시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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