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22화 (122/123)
  • 외전 10. 일리안의 시간

    “유리……!”

    일리안이 손을 들고 외치려는 순간 율리어스는 이미 안으로 들어갔다. 아카데미로 들어가는 길목이 너무 복잡한 데다 사람이 많아서 어쨌든 그에게 목소리는 닿지 않았겠지만.

    다른 쪽에 줄을 서서 티켓을 주려 했던 에릭도 일리안의 말을 들었는지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주변을 슬슬 둘러보던 에릭이 입을 열었다.

    “공작 전하? 난 안 보이는데.”

    “……율리어스가 이런 곳에 올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일까.”

    “뭐……. 잘못 본 거 아니냐?”

    일리안도 눈을 찌푸리고 율리어스가 들어간 쪽을 바라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가 보일 리는 없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에릭이 일리안의 어깨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사람이 워낙 많아 뒤에서 티켓 확인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건만 일리안이 자꾸 앞으로 가지 않고 멈춰 있는 탓이었다.

    “가자. 우리 차례다.”

    “……어.”

    결국 일리안과 에릭도 괴상한 인형탈을 뒤집어쓴 사람에게 곰돌이 티켓을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일리안은 끝까지 율리어스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해 고개를 움직였다.

    아카데미 안쪽은 파티 날이라는 게 사실이었는지 제법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든 걸로 보이는 조명과 그림들이 여기저기 전시된 게 볼만했다. 요즘은 가정 교육보다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는 게 유행이라더니, 예전보다 학생이 늘어난 것 같았다.

    탁.

    라울과 율리어스가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일리안의 어깨에 누군가 부딪쳤다. 고개를 들자 웬 남자였다. 남자가 제 하늘색 셔츠를 툭툭 털며 말했다.

    “조심 좀 합시다. 예?”

    “……아. 예, 죄송합니다.”

    파티 날에 사건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일리안이 죄송하다는 듯 눈짓하며 고개를 숙였다. 남자가 투덜거리면서도 별말 없이 지나가자 에릭이 일리안의 팔을 확 당겨 제 옆에 붙였다.

    서로의 팔이 닿자 일리안이 고개를 올려 에릭을 바라봤다. 에릭은 자신이 하고도 별생각이 없는 행동이었는지 다른 곳을 둘러보기 바쁜 채였다.

    “사람 많다. 붙어서 가자.”

    “……에릭, 너 좀 변한 것 같은데.”

    “내가?”

    그 말에 그제야 에릭이 고개를 숙여 일리안을 바라봤다.

    예전의 손길만 스쳐도 화들짝 놀라던 에릭은 없었다. 배에 타면 모르는 사람들과 한방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더니, 그 탓인지 스킨십에 거리낌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뭐야. 이제 와서 설레면 나 곤란해. 네가 나 버리고 갔잖아.”

    “설레? 어린놈한테 설레긴, 무슨…….”

    “……헤이븐. 누누이 말하지만 내가 너보다 나이 많다?”

    일리안은 픽 웃으며 에릭의 등을 툭, 툭 쳤다. 그래, 그래. 나보다 네가 더 어른이다. 그 태도에 물론 에릭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아카데미 파티는 야외에서 진행되다 보니 외부에서 들어온 걸로 보이는 좌판도 제법 많았다. 에릭이 그쪽을 바라보다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헤이븐! 저거 먹자.”

    그가 가리킨 건 꼬치에 닭고기를 꿰어 구워둔 것이었다. 걸어가면서도 라울이나 율리어스를 찾느라 정신이 없던 일리안이 그걸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

    “밖에서도 파는 건데 저걸 먹고 싶냐.”

    “배에서는 안 팔아. 빨리!”

    “알았다, 알았어.”

    꼬치를 내어둔 좌판까지는 멀지 않았다. 앞에 도착한 에릭이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꼬치를 하나씩 고르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그리고 이것까지.”

    “……혼자서 다섯 개를 다 먹겠다고?”

    “어차피 네가 살 거잖아. 얻어먹는 김에 잔뜩 먹어야지.”

    일리안은 순간 어이가 없어 에릭을 바라봤지만 그는 일리안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일리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걸 눈치챘는지 힐끗 보고는 어서 계산하라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헛웃음이 터졌지만 일리안은 결국 혀를 차며 제 뒷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멀리서 온 친구니 식사를 대접할 생각이기도 했다.

    그렇게, 일리안은 비어 있는 제 뒷주머니를 몇 번이고 매만졌다.

    “……없어.”

    “뭐가?”

    “지갑이 없다고!”

    “야, 헤이븐. 아무리 사주기 싫어도 그렇지, 그렇게까지 해야겠냐?”

    “진짜 없어!”

    에릭도 그쯤 되자 일리안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았는지 눈을 찌푸렸다. 일리안은 곰곰이 자신의 일정을 되짚어봤지만 지갑을 흘릴 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방금 전 사건이 생각났다.

    어깨를 부딪친 남자, 시비가 걸렸지만 별말 없이 갔던 그 남자!

    그를 떠올린 일리안이 눈을 찡그리며 제 이마를 붙잡았다. 이를 악문 그녀가 홀로 중얼거렸다.

    “당해도 그런 뻔한 수작질에 당하냐…….”

    “뭐?”

    “지갑 털렸어. 이거 못 산다.”

    일리안의 ‘못 산다’는 말에 좌판 주인의 얼굴이 구겨진 건 덤이었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알아차린 에릭이 재빨리 제가 앞으로 나서며 계산을 마쳤다.

    계산을 마치자 일리안의 손에는 꼬치 다섯 개가 쥐어져 있었다. 에릭이 그중 하나를 한 입씩 물어뜯으며 말했다.

    “슬슬 가자. 공연 시작하기 전에 자리 잡고 앉아야지.”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제 지갑을 들고 도망간 남자를 다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숨을 내쉰 일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릭을 따라갔다.

    공연장은 천막이 처진 앞쪽 외 이곳저곳에 원형 테이블이 의자 없이 놓여 있었다. 일리안과 에릭은 빈 테이블 중 하나를 잡고 그곳에 멈춰 섰다. 주변을 둘러보자 라울 또래의 아이를 뒀을 법한 부부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라울에게 티켓을 못 받은 걸로 모자라 지갑까지 털린 일리안이 재수 없는 제 하루를 탓하며 꼬치를 한 입 먹었을 때였다. 그녀의 눈에 문득 무언가 보였다.

    “……?”

    하늘색 셔츠를 입은 저 남자.

    일리안의 테이블에서 열 걸음 남짓 떨어진 곳에 그가 서 있었다. 일리안은 먹던 꼬치도 내려둔 채 제 옆에 있는 에릭에게 말했다.

    “에릭, 나 잠깐 다녀올게.”

    “어딜?”

    “저기, 소매치기 자식이……. 인마, 너 거기 서!”

    “야, 헤이븐, 잠깐만!”

    소매치기범에게 눈길을 고정하고 있던 일리안은 녀석이 점점 멀어지자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며 달려갔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허리에 겨우 미치는 조그만 아이 하나가 마침 그 앞을 뛰어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이는 테이블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통에 일리안의 입장에선 아이가 갑작스레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반사 신경이 좋은 일리안이 아이에게 자신이 부딪치지 않도록 몸을 틀었지만, 이미 발은 꼬인 뒤였다.

    “헤이븐!”

    최대한 아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몸을 기울이던 일리안은 저도 모르게 자신에게 다가온 에릭의 옷깃을 쥐어버렸다. 헤이븐을 따라가고 있던 에릭은 당연히 몸에 힘을 주지 않고 있던 터라 일리안이 끄는 대로 끌려갔다.

    우드득, 쾅, 쿵……!

    “아파, 망할…….”

    심지어 테이블을 감쌌던 천까지 겹쳐지며 둘은 엉킨 채 힘껏 바닥을 굴렀다. 테이블에 부딪힌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리안이 상체를 세웠다.

    “야, 에릭, 넌 괜찮…….”

    “……헤이븐.”

    일리안이 눈을 끔뻑거리며 에릭을 내려다봤다. 그보다 키가 작은 일리안이 에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이유야 간결했다.

    쓰러진 에릭의 배 위로 일리안이 두 다리를 벌린 채 주저앉아 있었다. 꼭 일리안이 에릭을 덮치는 모양새였다.

    그때였다. 일리안의 주변으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리안은 제가 워낙 크게 넘어진 탓에 시선이 몰렸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래서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직 주저앉아 있던 일리안의 몸 위로 그늘이 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늘의 주인공을 바라봤다.

    “……유리?”

    눈을 두어 번 감았다 떠봐도 그녀의 앞에 있는 건 율리어스가 맞았다.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빨라서 일리안이 멍하니 있을 때였다. 밑에 깔려 있던 에릭이 소리쳤다.

    “윽, 내 허리……! 헤이븐, 비켜!”

    “어? 어…….”

    그제야 일리안이 고개를 숙이고 제 밑에서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에릭을 발견했다. 괴로워하는 그를 풀어줄 겸 다리를 들어 옆으로 옮긴 뒤 일어서려 했을 때였다.

    “……아.”

    일리안의 몸이 달랑 들렸다. ‘달랑’이라는 표현이 적절했다. 그녀는 허리를 잡힌 채 그대로 공중에 떠오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에는 이미 누군가의 품 안이었다.

    율리어스가 아직 누워 있는 에릭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뭘 하고 계셨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일리안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제 품 안에 가두듯 안으며 서늘한 시선으로 에릭을 바라봤다.

    그 시선이 어딘지 위험하다고 느낀 일리안이 어서 손을 뻗어 그의 두 눈을 가렸다. 물론 손 틈새로 보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임시방편이었다.

    “어쩌다 보니 넘어졌다. ……유리, 넌 여기 왜 있어?”

    “넘어졌는데 당신이 저놈 위에 올라탔단 말입니까.”

    “그게, 내 앞에 애가 있어서 그걸 피하려다가……. 하아. 에릭 그만 노려봐라. 쟨 잘못 없어.”

    마침내 에릭도 제 무릎에 묻은 풀 따위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손에 눈이 가려졌으면서도 손 틈새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받은 에릭이 힐끗 고개를 돌리더니 율리어스를 확인했다. 그런데 예전이었으면 조용히 넘어가고 말았을 에릭이 이상했다.

    에릭의 입가 한쪽이 아주 조금, 삐죽 올라갔다 내려왔다. 꼭 장난을 결심한 아이 같은 모습을 일리안은 똑똑히 보았다.

    “편지에선 잘 지내신다고 들었는데, 직접은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 전하.”

    “……편지?”

    에릭의 말에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었다. 편지는 일리안이 아니라 리트릭이 쓴 편지였다. 워낙 말이 많은 녀석이니 자신이 속해 있는 리하르트 기사단 이야기를 뺐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엔 분명 율리어스의 이야기도 짧게나마 담겨 있었을 터였다.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오해를 정정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예, 편지요. 오랜만에 뵈었는데 이렇게……. 오해할 만한 모습을 보여 드리고 말았네요. 부디 너무 걱정은 마시죠. 순전히 사고입니다.”

    순전히요.

    일리안은 에릭에게 왜 그걸 강조하냐?, 라고 눈으로 몇 번이고 물었지만 에릭은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단지 그 악동 같은 웃음을 삐죽 보이며 결정타를 날릴 뿐이었다.

    “참… 사람이라는 게, 인연도 사고처럼 다가오네요.”

    “인연… 이라.”

    “아, 부디 오해는 마십시오.”

    에릭, 누가 봐도 오해하라고 한 말 같은데?

    일리안은 차후 에릭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쥐어박을지 고민했다. 녀석은 배 위의 생활을 너무 오래 했더니 예전처럼 묵묵하던 그때의 에릭이 아니었다. 리트릭에게 이상한 걸 배운 것 같기도 했다.

    율리어스는 그런 에릭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어쩐지 일리안을 안은 손에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간 것 같기도 했다.

    “에릭 밀튼. 오해라고 했나?”

    “예.”

    “네게 그 말을 돌려주지.”

    에릭은 순간 그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쩔 수 없이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일리안을 품에 안은 율리어스는 그대로 뒤로 돌아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사람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으슥한 곳이었다. 품에 안긴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에릭을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너, 다음에 보자.

    에릭은 떠나는 둘의 모습을 보며 짧게 웃었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리트릭 놈도 데려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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