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21화 (121/123)
  • 외전 9. 일리안의 시간

    “라울!”

    일리안의 짧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짧은 다리로 힘껏 달려가던 라울이 겨우 멈춰 선 채 뒤돌아봤다. 그리고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헤입븐, 왜요?”

    “……오늘 출근 전 뽀뽀를 안 했잖아.”

    “잘 다녀와요, 헤입븐. 나도 잘 갔다 올게요.”

    해맑게 웃은 라울이 뒤꿈치를 한껏 들어 올렸다. 일리안의 입가에 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

    라울은 다시금 저 멀리 서 있는 타피아를 향해 달려가며 일리안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은 매일 아침을 언제나 라울의 출근 뽀뽀로 시작했다. 퇴근 시간엔 일리안이 뽀뽀하는 게 원칙이었다.

    일리안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이제는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진 덕분에 라울은 수도의 유명한 아카데미 유치부를 다녔다. 아이를 보내고 나면 그녀는 편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헤입븐! 오늘도 마법을 배우면 알려줄게요!”

    들어보니 라울은 검술보다는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것 같았다. 요즘 라울은 마법에 관심이 높아진 탓인지 율리어스만 만나면 그에게 제 마법을 자랑하기 일쑤였다.

    타피아의 손을 잡은 라울은 아카데미를 향해 기분 좋게 걸어갔다. 라울이 떠나자 뒤에 시립해 있던 디노가 다가왔다.

    “헤이븐 님, 오늘은 거래처에 잠깐 가셨다가… 약속이 있으시죠?”

    “아, 오늘이 그 날인가?”

    시계를 확인한 일리안은 제 옷차림을 한 번 더 확인하고서 걸음을 움직였다. 거래처까지 거리가 제법 되는 통에 어서 움직여야 했다.

    저택을 빠져나가는 그녀를 디노가 배웅했다. 어렸을 때와 달리 디노는 이제 그녀의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디노 자체로도 할 일이 많아진 덕분이었다.

    일리안이 탄 마차가 지체 없이 움직였다. 마차가 멈춤과 동시에 일리안의 귓가를 꽉 채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야, 헤이븐!”

    “……리트릭, 제발 조용히 말할 수는 없을까.”

    리트릭의 체구가 커지긴 했지만 그래도 어렸을 적의 귀공자 같은 얼굴이 남아 있었다. 그런 주제에 목소리와 말투는 경박하기 짝이 없었다. 마차 앞에 선 리트릭이 헤이븐에게 손을 내밀며 그럴듯한 에스코트를 청했다.

    그 흰 손을 내려다보던 일리안은 손을 잡는 대신 리트릭의 머리를 꾹 누르며 마차의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윽! 야! 이거 공들여 만진 머리인데!”

    “……공은 왜 들여?”

    “그야……!”

    말을 하다 만 리트릭이 제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제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자신의 머리를 재빨리 정돈하며 말했다.

    “파란 화원이잖아!”

    “……너…….”

    어쩐지 휴일인 주제에 웬일로 기사단 제복을 입고 왔다 싶었다. 제법 멋들어진 검까지 찬 통에, 지나가는 영애들 중 리트릭에게 눈길을 주는 이가 많았다.

    일리안은 눈을 찌푸린 채 그에게 말했다.

    “여기 영애들 나이 많아봤자 17살이다.”

    “그걸 누가 모르나! ……혹시 알아? 오다가다 그 영애들 언니라도 마주칠지. 그리고, 나 생일 안 지나서 아직 21살이거든?! 넌 19살이고!”

    “하아, 그래.”

    파란 화원에 들어선 일리안이 배치된 꽃들을 하나씩 살폈다. 아마도 리트릭의 어머니와 계속해서 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다녔던 이 파란 화원의 조경을 담당하진 못했을 것이다.

    일리안의 사업은 계속해서 유명세를 타 이제는 제법 이름 있는 분재농원으로 인정받았다. 독자적인 유통 체계와 조경 사업까지 담당해 그녀를 찾는 귀족들이 많은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일리안은 아침에 라울을 보는 게 겨우일 정도로 바빠졌다.

    “여긴 이 나무 위치를 바꿔야겠네. 안 어울려.”

    “장미는 어때? 난 장미가 좋더라.”

    “……너희 어머니는 대체 뭘 믿고 오늘 너한테 맡기셨냐.”

    보라색과 흰색으로 꾸며둔 이 한가운데에 붉은색 장미를 끼워 넣자는 리트릭의 심미안이 도무지 이해 가지 않았다. 일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챙겨온 노트에 하나씩 메모해 갔다.

    그렇게 일리안과 리트릭이 파란 화원을 한 바퀴 다 돌았을 즈음이었다. 제 시계를 확인한 리트릭이 번뜩 말했다.

    “야, 헤이븐! 지금 가야 해, 안 그러면 빠듯해!”

    “……벌써? 조금 더 보고 싶은,”

    “지금 가야 한다니까!”

    소리친 리트릭이 번뜩 일리안의 손목을 잡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리트릭이 붙잡은 손 사이로 제 팔에 끼워둔 링이 보였다. 자칫하다간 리트릭의 손에 의해 링이 벗겨질 것 같았다.

    얼떨결에 리트릭에게 끌려가던 일리안이 그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리트릭, 이 손은 놓고.”

    “되게 비싸게 구네. 거기 금칠했냐?”

    “했어. 잡으려면 10만 골드 내라.”

    얼마나 걸었을까. 일리안과 리트릭은 어느새 도착한 길목에 잠시 멈춰 섰다. 그러자 저 멀리 한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리트릭이 반가운 얼굴로 소리쳤다.

    “에릭!”

    예전에도 까만 편이었지만 이제는 전보다도 더 까맣게 탄 에릭이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에릭도 일리안과 리트릭이 서 있는 쪽을 보더니 가볍게 손을 들었다.

    에릭을 만나는 건 거의 2년 만이었다. 기사를 관두겠다고 한 에릭은 어느 날 갑자기 범선을 타러 가겠다며 수도를 떠났다.

    그 뒤로 에릭은 둘에게 종종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수도로 오지는 못했다. 하고 있는 일에 뒤늦게 적응하느라 고생하는 것 같다고, 리트릭이 가끔씩 안부를 전해주는 게 전부였다.

    “크큭, 야, 에릭. 너 여기 밧줄 모양으로 탔다.”

    “……아. 어깨에 걸치고 있어서 그래.”

    리트릭의 놀림에도 에릭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제 어깨만 으쓱거렸다. 그러다 리트릭의 뒤에 선 헤이븐과 눈이 마주쳤다.

    에릭은 피부가 타버린 만큼이나 체격도 바뀌었는지 예전보다 좀 더 커졌다. 전에는 날렵한 기사와 같았다면, 지금은 정말 뱃사람처럼 보였다.

    “오랜만이다, 전 고용주님.”

    “……배 타러 가니까 내가 아주 좋은 고용주였다는 걸 깨달았지?”

    그 질문에 쌍꺼풀 없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에릭이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응. 너 정말 좋은 녀석이더라.”

    에릭의 낮은 목소리가 길목을 울렸다. 그와 동시에 리트릭이 둘의 목에 팔을 두르며 끼어들었다. 날이 더운 탓에 햇빛이 세 명을 가득 내리쬐었다.

    “리트릭, 땀 냄새 난다. 떨어져.”

    “야, 헤이븐! 땀 냄새는 너무한 거 아니냐?!”

    “……나긴 하네.”

    에릭이 조용히 덧붙이자 리트릭이 울상을 지으며 떨어졌다. 셋은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카페에 도착한 일리안이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리트릭과 에릭도 동그란 테이블에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일리안이 물었다.

    “수도에는 어쩌다 왔냐.”

    물론 에릭을 향한 질문이었다.

    각자의 일로 바쁜 셋이 만날 수 있던 건 정말 공교로웠다. 마침 리트릭이 휴가인 날 에릭이 수도에 올라올 일이 생겼다며 편지를 보냈고, 그 소식을 들은 일리안도 이날 일정을 모두 전날에 처리했다.

    에릭이 먼저 나온 차가운 물을 벌컥 들이켜며 말했다.

    “뭐……. 오랜만에 너희 보러 오기도 했고, 볼일도 있었고.”

    “볼일? 네가? 수도에? 여자 생겼냐?”

    “여자는 무슨.”

    리트릭의 경박스러운 질문에 에릭이 짧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번 배를 타고 나가면 적어도 10개월은 바다 위에서 머무르는데,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에릭이 하고 있는 일은 바다 위를 순찰하며 몬스터를 잡는 일이라 누군가를 곁에 두기가 쉽지 않았다. 요즘 들어 아버지인 게릭과 어머니가 자꾸만 여자 친구는 언제 생기냐고 묻는 통에 에릭은 여자 이야기만 들어도 머리가 아팠다.

    “사촌 동생이 오늘 자기 공연 보러 오라고 했어. 어머니, 아버지도 몇 주 전부터 그 말씀만 하시고…….”

    “사촌 동생? ……여동생?”

    “어. 올해로 6살.”

    은근한 목소리로 여동생이냐고 물었던 리트릭은 6살이라는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에릭과 달리 그는 최근 들어 제 짝을 찾는 일에 열의를 다하고 있었다.

    6살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진 건 일리안이었다. 마침 라울도 얼마 전 6살이 되었기에 그의 사촌 동생 이야기가 궁금했다.

    “6살인데 무슨 공연?”

    “아카데미 유치부에 다니거든. 오늘이 아카데미 파티 날이잖아. 유치부 애들은 다 무대 올라갈걸. ……마침 휴가이기도 해서 나도 간다고 했지.”

    “……아카데미, 파티? 드발릭 아카데미?”

    일리안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 ……수도에 거기 말고 아카데미가 또 있나?”

    “없지. 야, 헤이븐. 왜 이래?”

    에릭의 말을 자연스럽게 넘겨받은 리트릭이 그녀를 바라봤다. 어쩐지 일리안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늘이 파티 날인데… 왜 내가 몰랐지?”

    “……뭐, 너도 파티 가고 싶냐? 같이 갈래?”

    아카데미 파티는 저녁부터 있는 덕분에 이들과 헤어지고 갈 생각이었던 에릭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유명 귀족가의 파티도 아니고 평민과 귀족이 고루 섞여 다니는 아카데미 파티였을 뿐인데, 거길 가겠다고?

    “그게 아니라! 라울. 라울이 거기 다니고 있다고. 왜 나한테는 말을 안 했…….”

    “……라울? 그러고 보니 라울은 잘 지내나.”

    “잘 지내! 그런데 나한테 오늘 아카데미 파티 이야기를 안 했다고!”

    “그거 이상하네. 들어보니까 다들 부모님 모셔 온다던데.”

    마침 음료가 나왔다. 일리안은 갑갑해진 속을 식히기 위해 음료를 들고 단번에 벌컥 마셔댔다.

    “왜… 말 안 했지. 나한테……. 설마, 타피아랑 디노는 알고 있나?”

    “글쎄. 어쨌든 중요한 건,”

    넌 초대 안 했다는 거지.

    에릭은 무감각한 얼굴로 그녀의 명치를 찔렀다. 순식간에 치명타를 맞은 일리안이 멍한 얼굴로 에릭을 바라봤다.

    “거기… 초대 안 받으면 못 가냐?”

    “응. 초대장 있어야 해.”

    라울은 이미 아카데미로 떠난 뒤라 초대장을 받을 수 없었다. 일리안은 초조하게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라도 아카데미 파티에 가야 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에릭이 결국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테이블 위로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귀여운 곰돌이 모양의 티켓이었다.

    “……가자. 한 장 너 줄 테니까.”

    “야! 이거 두 장이잖아! 나는, 나는!”

    리트릭이 테이블을 쿵쿵 치며 제 티켓도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자 의연한 얼굴로 있던 에릭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렸을 때 눈치도 없이 무술 대회 꼈던 거, 드디어 복수하네.”

    “야 이 자식아! 눈치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였거든?!”

    그 뒤로도 툴툴대던 리트릭은 그래도 두 장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는지 낮게 한숨을 쉬며 손을 저었다.

    “둘이 가라, 가. 난 데이트나 하련다.”

    “……리트릭, 여자는 있고?”

    “우리도 데이트긴 하지, 안 그러냐. 헤이븐?”

    일리안의 질문까지는 참아냈던 리트릭이 에릭의 농담이 섞인 말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벌컥 화를 냈다. 리트릭은 둘의 등을 동시에 떠밀며 그들을 카페에서 쫓아냈다.

    “썩 꺼져!”

    애초부터 늦게 만난 탓인지 카페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에릭은 일리안을 힐끗 바라보더니 제가 먼저 아카데미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일리안도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그녀는 아직도 라울이 자신에게 티켓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에릭은 아카데미에 가는 내내 그런 일리안을 반쯤 놀렸다.

    아카데미 입구는 해가 지면 조용해졌던 평소와 달리 유달리 시끌벅적했다. 정문에서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은 인형 하나가 티켓을 확인하고 있는 게 보였다.

    티켓을 쥔 에릭이 먼저 그쪽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일리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유리?”

    저 멀리 티켓을 확인하는 행렬 중에 율리어스가 보였다. 그가 무감각한 얼굴로 괴상한 인형탈을 뒤집어쓴 사람에게 귀여운 티켓을 내미는 모습이 몹시도 이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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