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19화 (119/123)

외전 7. 스무 살

율리어스는 자신이 일리안에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모든 이성을 잃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설 때에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달콤한 행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이가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는 것과도 같았다. 율리어스는 자신이 제 힘을 가지고서 이성을 잃었을 때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율리어스는 한 번 더 빈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약속이라 말하며 링을 건넸지만 그것이 오래도록 지켜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하루조차도 가지 못할 줄은 몰랐다.

자신의 음험한 마음을 알고서 밀어낼 생각으로 벗은 건가. 혹은, 어떠한 사고에 휘말려 벗겨진 건가.

전자가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더 생각하기 싫은 것은, 물론 후자였다.

펜서의 부름을 내버려 둔 채 일리안에게 걸어둔 마법이 전해온 장소로 이동했다. 패러든 공작 가문의 파티였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몇 개의 빈 마차만 보일 뿐, 일리안은 보이지 않았다. 어지러워지는 머리에 잠시 눈을 감자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일리안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마차임을 안 율리어스가 다시 눈을 떴다. 아무리 율리어스라 하더라도 이동하고 있는 마차 안의 좌표를 알아내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대신 그는 아직 끝나지 않은 파티장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초대장이 없는 율리어스를 경비병들이 막아서려 했지만 일반인 같지 않은 그의 기품에 함부로 막 대할 수 없었다. 보고를 받은 패러든 공작이 잰걸음으로 율리어스에게 다가왔다.

“리, 리하르트 공? 이곳엔 어쩐 일이오?”

“저어……. 패러든 공작 전하. 이분은 초대장이 없으십니다만…….”

“허어, 초대장은 무슨! 되었다. 네놈들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막상 초대장을 들고 왔던 일리안은 패러든 공작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파티에 온 이들 중에서도 높은 신분의 귀족들과만 이야기한 탓이었다.

대부분의 주요 인사들은 이미 파티장을 떠났고, 그에 따라 파티도 끝나갈 무렵이었던 탓에 내부에 있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 중 율리어스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헤이븐.”

“예?”

“헤이븐 윈터가 왔었나.”

패러든이 작게 입을 벌렸다. 율리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도 생각지 못한 내용이었다. 같은 공작이었지만 교류가 없던 둘은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이미 파티장 내부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홀로 멈춰 섰던 패러든이 어서 그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아무리 제국 내에서 유일한 3개의 공작 가문을 이끄는 이들이라지만, 패러든과 율리어스의 위치는 현저히 달랐다. 인사조차 받지 못한 패러든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제 표정을 가다듬었다.

“헤이븐… 윈터라 하심은……. 이거, 미안하오. 이 파티의 주인은 나지만 이름 없는 어중이떠중이들도 원체 많았지 뭐요. 으음, 그래도 장부를 찾아보면…….”

“어중이떠중이?”

“그렇소. 패러든 가문의 이름만 보고 쫓아온 사람이 많다 보니.”

“헤이븐 윈터가 어중이떠중이라는 건가.”

“으, 음?”

술술 입을 열던 패러든이 그제야 흘러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서 고개를 들었다. 장난일 줄 알았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율리어스는 이미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고 패러든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헤이븐 윈터를 낮잡아 불렀느냐고 물었다.”

율리어스는 처음 파티장에 들어설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내 한결같은 표정이었지만 이미 정치판에서만 60년을 살아온 패러든은 알았다. 그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어느 일간지가 냈던 초라한 남작 영애 헤이븐 윈터와 리하르트 공작의 열애설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패러든이 황급히 두 손을 들어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요! 내가 실언을…….”

얼마 전, 나름 내실을 다지던 황자가 갑작스레 권력을 모두 잃고 칩거하는 일이 있었다. 힘의 균형을 맞춰가던 황가와 리하르트 공작가의 힘이 한 축으로 기울어진 것이 그때부터였다. 그 리하르트 가문에 실수를 하게 생긴 패러든은 다급해졌다.

“헤이븐 윈터? 그, 오늘 넘어진 여자 말인가?”

“어머, 그렇게 말하니까 기억이 나네. 겔트 백작과 다투었던 그 사람 말이지?”

그때 패러든 공작의 귓가로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패러든이 기회를 잡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아, 오늘 겔트 백작에게 걸려 고생한 불쌍한 이 말이오. 나도 기억이 났소. 내 도와주려 했다만 상황이 워낙 빨리 해결된 탓에……”

“도와주진 않았다는 말이로군.”

“그! 그 겔트 백작이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자가 참 질 낮아 보이더군. 내 윈터 가문으로 따로 사과를 해야겠소. 명색이 파티에 초대를 했는데 그런 고초를 겪어서야, 원.”

율리어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냥을 하는 범처럼, 가만히 서서 패러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에 기가 죽은 패러든이 되는 대로 말을 갖다 붙였다.

그러나 패러든이 말을 멈춰도 율리어스의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패러든은 시선을 받는 그 시간이 지옥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 물어뜯겨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곧 율리어스의 시선이 떨어졌다. 범의 눈길을 겨우 피해간 토끼처럼, 패러든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오전, 겔트 백작을 리하르트 공작성으로 보내라.”

“에, 예?”

한시름 놓고 있던 패러든 공작이 그의 말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이미 파티장을 벗어나 빠른 걸음으로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패러든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에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늙은 패러든은 그의 걸음을 온전히 따라갈 수 없었고, 뒤늦게 밖으로 나갔을 때에는…….

“가, 가셨군.”

다행이다, 다행이야…….

홀로 남은 패러든이 제 가슴팍을 토닥였다. 당장 제 보좌에게 겔트 백작을 찾아오라 명해야겠다고 생각하며.

* * *

파티장에서는 마법을 이용하는 게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와야 했던 율리어스는 조금의 스펠도 외우지 않고 곧장 이동했다. 일리안이 마차에 내려서도 이동 중이라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이동을 한 직후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일리안의 얼굴이기를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아니었다. 율리어스의 앞에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는 비앙카가 서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레 제 앞에 사람이 생기자 놀란 비앙카가 흠칫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누구세요?”

날이 어두워 비앙카의 눈에는 율리어스의 얼굴이 모두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제 앞에 선 이가 몹시도 커다란 키를 가진 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앙카를 내려다보던 율리어스는 이내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비앙카의 손에 쥐어진 무언가가 그의 눈길을 빼앗지 않았다면.

율리어스가 비앙카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러자 겨우 달빛에 율리어스의 얼굴이 턱에서부터 드러났다. 그 생김새가 몹시도 비현실적이라, 비앙카는 그가 다가온다는 사실도 잊고 얼굴을 바라보았다. 리하르트 공작을 이리도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이 덥석 잡혔다. 커다란 손에 제 손을 감싸인 비앙카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주먹 쥔 비앙카의 손을 펴는 율리어스의 손길은 우악스러웠고, 조금도 다정하지 않았다. 아마도 비앙카가 손을 펴지 않기 위해 꽉 주먹을 쥐었더라면 손가락이 부러졌을지도 몰랐다.

그 손길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비앙카가 지금이라도 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일리안이 놓고 간 물건이니만큼 돌려주어야 했다.

“앗, 그건…….”

“이건.”

링은 내내 일리안의 약지에 끼워져 있던 터라 크기가 그것에 맞추어져 있었다. 제 새끼손가락만 한 링을 힘주어 쥔 율리어스가 비앙카를 내려다보았다.

“네 것이 아니야.”

링을 빼앗은 율리어스는 더 이상 용건이 없는 듯 곧장 뒤돌았다. 그의 걸음은 기품이 있었지만 어딘가 다급해 보였다. 비앙카는 결국 그를 붙잡지 못했다.

* * *

일리안의 손에 다시 링을 끼워준 율리어스는, 그녀가 겔트 백작의 시비에 발목을 다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를 공작성으로 데려왔다. 어쩌면 겔트 백작이 시비를 걸었건, 발목을 다쳤건 그것은 상관없이 공작성으로 데려왔을지도 몰랐다.

달칵.

방문을 닫고 나온 율리어스가 잠시 그곳에 멈춰 섰다. 일리안에겐 마법사를 데려오겠다며 나온 것이었지만 그 때문이 아니었다.

율리어스는 보았다. 자신의 위치를 언제든 알 수 있느냐고 물으며 일그러지는 일리안의 얼굴을.

비록 일리안은 링에 대한 비밀을 모두 알아맞히진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챈 것임이 틀림없었다. 율리어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마법을 걸어두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면, 싫어할까.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일리안은 분명히 기분 나빠할 터였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답해 주기 싫어 방을 빠져나왔다.

율리어스의 사랑은 아름답지 못했다.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수도, 남들이 하는 것처럼 서로를 배려하고 위하며 사랑할 수도 없었다. 일리안의 곁에 있어야만 인간이 될 수 있는 율리어스는,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없을 때면 괴물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리안은 때때로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몹시도 부족했다. 그는 태생부터 좋은 학생이 될 수가 없었다.

문 앞에 선 율리어스가 제 손을 내려다보다 문득 손가락 하나를 까닥였다.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자신의 손이며 몸의 일부인데도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이질감이 들 때가.

제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요.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을 질문을 속삭였다. 율리어스는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그것을 보다 깊게 파묻어야 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모순의 흙을 퍼와 덮어야 했다.

율리어스는 그것이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역설적으로 일리안이 먼저 알아주길 바랐다. 그녀라면, 그녀가 내리는 벌이라면 모두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언젠가 일리안이 자신에게 죽지 말라는 벌을 내렸던 것처럼.

이내 율리어스는 움직이려 했다. 일리안을 피해 도망쳐 나왔지만 결국 또 이렇게 잠시라도 떨어지면 그녀가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었다. 어서 아무 마법사나 불러와 일리안의 얼굴을 봐야 했다.

그때였다.

쿵.

“율리어, 윽!”

제 등 뒤로 느껴지는 숨결에 율리어스가 다급히 뒤로 돌았다. 그러자 코를 움켜쥐고 있는 일리안이 보였다. 오히려 제가 더 놀란 율리어스가 손을 뻗어 일리안의 코로 가져갔다.

제법 세게 부딪친 터라 율리어스의 등도 만만찮게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는 느껴지지도 않는 제 아픔 따위보다는 일리안이 더 소중했다. 눈가를 찌푸린 율리어스가 그녀의 코에도 마법을 사용하려 했을 때였다.

그의 멱살을 우악스레 붙잡은 일리안이 입을 맞추어왔다.

자신이 무얼 하려던 것인지도 잊어버린 율리어스는, 그 짧디짧은 입맞춤이 주는 충격에 말을 잃었다. 벌. 자신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건 혹시 누군가의 마법인가. 모두 허상에 불과했나.

율리어스가 그런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죽었어. 그러니 앞으로, 일리안 하인리히의 사람은 네가 유일해.”

일리안 하인리히가 죽었다는 말을 하는 순간, 율리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녀가 자신의 죽음을 선고하며 이만 이 관계의 끝을 알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진 말에 율리어스의 눈동자가 확대됐다. 그는 아마도 제 눈이 파충류의 그것처럼 길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터였다.

자신은 미쳤다. 분명히 미친 게 맞았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입에 제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얼마든지 감내할 테니, 벌을 내리라고.

일부러, 감았는데.

그 말이 들려온 순간 율리어스의 이성이 끊어졌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탐하고 있는지조차 잊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고 급하게 일리안의 입안을 범했다. 치열, 혀끝, 입천장. 율리어스는 그것을 모두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듯 매만졌다.

그 속도를 미처 따라오지 못한 일리안은 순간 다리의 힘이 풀렸다. 율리어스는 그런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다음에는 정말 제멋대로 하겠다는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이번에는 정말 일리안을 봐주지 않았다. 그녀의 침 몇 조각조차 아깝다는 듯 모두 삼켜냈다.

입맞춤이 길어지자 일리안의 몸이 녹아내렸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자신이 붙잡은 일리안의 허리를 힘주어 고쳐 잡으며 입을 떼지 않았다. 어느 순간 시간이 흘렀을 때에는, 그녀는 이미 율리어스의 품 안에 가두어진 채였다.

“율, 흡.”

조금 입술이 떨어지자 겨우 말을 이으려 했던 일리안은 순식간에 율리어스에게 다시 집어삼켜졌다. 그는 이미 그녀가 말을 하는 순간 이 모든 게 끝날 것임을 알았기에 더더욱 치밀하게 입술을 빨았다.

“유리!”

그를 조금 밀어낸 일리안이 겨우 그 한 마디만을 외치자 율리어스가 목 안으로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곧 일리안의 입안을 탐하던 혀가 떨어졌다. 그래도 아쉬웠는지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입술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물고 씹으며 지분거렸다.

“그만, 율리어스.”

“알겠어요, 조금만 더.”

응석을 부리는 것만 같은 말투로, 물론 입술을 물고 뜯는 행동은 그렇지 못했지만 일리안은 결국 낮게 웃으며 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녀가 자신을 귀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안 율리어스는 계획적으로 제 머리를 일리안의 목덜미에 비볐다.

율리어스는 간절했다. 언제 그녀가 자신의 추악함을 알고서 떠날지 몰랐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이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일리안을 사랑했다.

율리어스의 사랑은 아름답지 못했다. 단지 지독히도, 일리안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스무 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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