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스무 살
가이우스가 율리어스의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흐른 뒤였다. 그녀가 율리어스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안 가이우스는 펜서를 대신해 차를 전해주려 했다.
문 앞까지 갔던 가이우스는 집무실의 커다란 두 문이 미묘하게 열려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율리어스라면 그럴 리 없으니, 아마도 다른 누군가가 문을 열어둔 채 떠난 것이리라.
그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안쪽에서부터 미묘한 분위기가 흘러나온 탓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율리어스. 함께 사는 건 역시 무리겠다.”
트레이를 손에 쥐고 있던 가이우스가 그것을 꾸욱 움켜쥐었다. 그녀가 전해온 이유가 가이우스에겐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려온 까닭이다.
성인이 아니라서, 라울에게 더 집중을 하고 싶어서라니.
그녀가 헤이븐 윈터의 몸으로 살고 있지만 사실 일리안 하인리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서른을 넘겼을 게 분명한 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사실상 둘러댄 거절임을 모르지 않았다.
라울에게 더 집중을 하고 싶다는 말도 그러했다. 공작성에 들어와 지낸다고 해서 아이에게 더는 신경을 못 써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제 주군인 율리어스도 마찬가지로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만 봐왔지 않은가.
가이우스는 오히려 제가 더 서운해 입매를 늘렸다. 율리어스가 그것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지 않을 남자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도 있었다.
하지만, 율리어스의 대응은 생각보다도 의외였다.
“그래요.”
가이우스는 적어도 그가 한 번쯤은 더 생각해 보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가 일리안과 함께 지내는 것을 얼마나 소원했는지 알았으니까.
“알겠습니다, 일리안.”
“……괜찮냐?”
자신도 모르게 일리안이 괜찮냐고 묻는 것과 함께 소리 내어 물을 뻔했다. 가이우스는 자신이 현재 문 뒤에서 몰래 훔쳐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을 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을 붙잡은 것은 다름 아닌 율리어스의 말이었다.
“대신, 다른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
문득, 율리어스가 했던 말이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그사이 일리안과 율리어스는 아직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일을 갈 때에도, 샤워를 할 때도, 산책을 가더라도.”
“…….”
“빼지 마세요.”
“필요하니까.”
“거절하지 못할 구실이, 필요하니까.”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율리어스가 어째서 섣불리 그녀에게 반지를 건네지 않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말을 지켰다. 차근히, 하나씩 준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지겠다는 말을. 이것이 그가 말한 하나의 ‘준비’였던 것이다.
멍하니 서 있던 가이우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율리어스가 집무실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문을 열고 나온 율리어스는 가이우스를 발견하고서 잠시 멈춰 섰다.
율리어스의 어깨 너머로 집무실 안을 바라보자 이미 일리안은 사라진 뒤였다. 아무래도 율리어스가 마법으로 이동해 그녀를 데려다주고 온 모양이었다.
“용건이 있나.”
“아, 그게, 차를…….”
그제야 제 손에 쥐고 있던 트레이의 존재를 깨달은 가이우스가 그것을 내밀려다 이미 찻잔의 내용물이 모두 식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어색한 웃음으로 그것을 도로 끌어안았다.
“네게 엿듣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죄송합니다.”
가이우스는 보통 때라면 걸어서 집무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율리어스가 어째서 나왔는지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와 대화를 나눌 때부터 누군가 밖에서 엿듣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나무라기 위해 나온 것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가이우스는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그가 갑작스레 가이우스의 한쪽 어깨를 움켜쥐었다.
“가이우스.”
“예.”
“나는 네게 그녀의 보고를 명했지만,”
붙잡힌 어깨는 아프진 않았지만,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나와의 대화마저 보고하라 명한 적이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율리어스 님.”
그가 이 정도의 언질로 넘어간 것은 상대가 가이우스이기 때문일 것이다.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관련된 것에 한하여서는 몹시도 까칠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가이우스는 다행이라고 되뇌었다.
어깨를 잡았던 손이 떼어지자 가이우스가 그제야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와 키가 엇비슷했던 가이우스는 율리어스의 턱 부근을 보고 섰다.
“그래서, 들은 소감은.”
“예?”
“반지를 사용하라 일렀던 게 너였지 않나. 분명히 도움 될 때가 있다고.”
가이우스가 멍청한 얼굴로 아, 하고 외쳤다. 문이 열린 틈새가 너무 애매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 흐름상 그녀가 반지를 받아 든 것을 알고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조금 풀리자 가이우스도 긴장했던 어깨를 풀었다. 대신 다소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다행입니다. 그분께서 거절하지 않으셔서.”
“그런가.”
“예, 거절하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셨지 않습니까.”
눈을 끔뻑이며 말을 잇던 가이우스는 제 앞에 선 이의 변화에 작게 입을 벌렸다. 율리어스가, 아주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가이우스.”
“……예, 부르셨습니까?”
“다행이지. 그래, 몹시도 다행이군.”
자신이 쥐었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친 율리어스가 그를 지나쳐 갔다. 율리어스의 미소에 내도록 멍한 얼굴이었던 가이우스가 고개를 돌려 그가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미 복도에는 율리어스의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바라보며, 가이우스는 또다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이라는 가제에 율리어스는 그것을 거절하지 못할 구실을 만들었다. 이것이 첫 번째 준비였다.
그러나 아직 율리어스에게는 두 번째 가제가 남아 있었다. 받아 든 뒤 실수로, 혹은 일부러 링을 벗는다면. 그는 이미 두 번째 준비를 마쳤단 말인가.
율리어스의 목소리가 가이우스의 귓가를 맴돌았다.
이건, 약속입니다.
* * *
율리어스는 사실 최근 들어 무척이나 바빴다. 황자가 힘을 잃은 이후 잠잠해진 황제 대신 여러 귀족들이 그를 찾아온 탓이었다. 어느 정도의 눈치만 있어도 지금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율리어스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본래도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는 이였고, 때문에 귀족들은 그 대신 자신이 먼저 선물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낮게는 진귀한 보물이나 비단부터 시작해 높게는 토지나 누구든 탐낼 법한 사업의 제안들이 선물로 들어왔다. 율리어스는 사람을 만나주지 않는 대신 그것들을 훑고 있었다.
팔랑.
종이 1장이 넘어감과 동시에 율리어스가 습관처럼 잔을 들어 차를 넘겼다. 마시기 좋을 정도로 따뜻한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왔다.
그것에 입을 댄 순간이었다. 율리어스의 손에 안정적으로 잡혀 있던 찻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이 바닥의 카펫을 적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율리어스는 조용히 제 손을 펼쳐 들어 한번 접었다 폈다.
손에 힘이 풀린 것도, 찻잔에 무언가 다른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아 숨 쉬는 것보다도 편하게 제 마나를 운용해 온 그에게 무언가 다른 힘이 끼어든 탓이었다.
율리어스가 다른 것으로부터 자신의 마나를 방해받을 일이라곤, 단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법.
일리안이 링을 받아 든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율리어스는 그곳에 자신의 마법을 담아두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나 쓴다는 허튼 위치 추적 마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언제든 일리안의 위치를 알고 있길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바랄지도 몰랐지만 일리안이 끔찍이도 싫어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대신 그곳에 링을 빼는 순간부터 작동되는 마법을 걸어두었다.
일리안은 율리어스와 링을 빼지 않기로 약속했고,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반지를 착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다 만약 실수로, 혹은 일부러 반지를 뺀다면 그 즉시 잠들어 있던 마법이 율리어스에게 정보를 전해온다.
약속대로 반지를 빼지 않는다면 율리어스는 먼저 찾지 않는 이상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빈 찻잔을 책상에 내려둔 율리어스가 그 위에 비치된 종을 울렸다. 그러자 샌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카펫을 치우도록.”
“예? 카펫이요? 아, 이런. 냄새를 맡아보니 차로군요. 히익, 율리어스 님께서 차를 쏟으신 겁니까?”
샌드가 카펫을 치우다 말고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공작성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기는 했지만, 제 애인인 칠리즈로부터 율리어스의 집무실 청소가 상당히 편한 일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땀을 흘리거나 물건을 쏟는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인 탓이었다. 칠리즈말고도 제법 많은 이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던 샌드가 놀란 얼굴로 감추지 못하고 카펫을 치웠다.
“새, 새로 차를 가져다드릴까요?”
“되었다.”
우물쭈물거리던 그는 대답을 듣자 카펫을 품에 안고서 다급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어서 칠리즈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홀로 남은 율리어스는 다시 손에 펜을 쥐었다. 그녀가 다시 반지를 착용해 손을 쓸 만해졌기 때문이다. 일리안이 링을 벗고 있던 시간은 고작해야 몇 분도 지나지 않았다.
사실 그 마법이 율리어스에게도 좋은 영향만을 끼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나의 흐름에 예민한 편이었지만, 혹시 자신이 그녀의 링으로부터 오는 정보를 잡아내지 못할까 싶어 순간적인 전기가 흐르도록 걸어두었다.
때문에 처음 자신의 마법을 맞아본 율리어스가 찻잔을 쏟을 정도로 멈칫거린 것이었다. 자신이 일시적으로 손을 못 썼다는 것을 안 율리어스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제 선택에 만족했다.
멍청하게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았다.
“실례하겠습니다, 공작 전하! 새 카펫을 가지고 왔어요!”
“들어와라.”
“예!”
다시 집무실로 들어온 샌드는 어서 카펫을 깔기 시작했다. 조금 긴장된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들려오는 율리어스의 목소리가 없어 그나마 편했다.
어느 순간 카펫의 정리를 마친 샌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보겠다는 인사와 함께 샌드가 뒷걸음질 쳐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샌드가 나가는 것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은 율리어스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 일리안이 공작성에 들리지 않는 날에는 대개 업무와 가벼운 훈련이 하루의 전부였다.
율리어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창문은 이미 어두컴컴하게 물들어 있었다.
“율리어스 님,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바깥에서 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리어스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파직.
율리어스가 천천히 제 손을 들었다. 처음 찻잔을 떨어트릴 정도로 움찔거렸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제 손에서 스파크가 튈 정도였는데도 불구하고.
밖에서는 펜서가 그를 모셔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꿈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처음 번개가 튀었을 때에는 손을 한번 움켜쥐었다 펴자 그녀가 다시 링을 착용한 것이 느껴졌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손을 한번 움켜쥐었다. 다시 펴보았지만 역시나였다.
일리안이, 다시 링을 착용하지 않았다.
안에서의 적막함을 이상하게 느낀 펜서가 똑똑, 문을 두드려 왔다. 그러나 그것에도 대답이 없자 펜서는 결국 실례하겠다는 한마디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나 집무실 내부는, 이미 싸늘한 어둠으로 가라앉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