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 스무 살
율리어스가 그 반지를 보게 된 것은 순전히도 우연이었다.
“아, 칠리즈 양. 마침 잘 되었습니다. 샌드 군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습니까?”
“샌드요? 잠시만요, 방금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었는데 오후에는 바깥에 일이 있다고 했거든요.”
칠리즈는 공작성에서 일하는 시녀 중 1명이었다. 이곳에서 일한 경력이 제법 긴 그녀는 이번에 들어온 새 시종 샌드와 공식적인 열애 중이었다.
그 소식을 미리 들어 알고 있던 가이우스는 마침 심부름을 위해 들어온 칠리즈에게 샌드의 위치를 물었다. 샌드가 율리어스의 집무실 청소를 담당하기 때문이었다.
“으음……. 다행히 아직 공작성 안에 있네요! 정원에 있는 것 같은데, 불러드릴까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제가 실수로 서류 하나를 휴지통에 넣은 것 같습니다. 아직 소각장에 가지는 않았을 테니, 샌드 군이 행방을 알고 있을 겁니다.”
“아아, 저는 샌드가 무슨 실수라도 한 줄 알았지 뭐예요. 곧 가이우스 님의 집무실로 보낼게요!”
마침 율리어스의 집무실을 청소하러 들어왔던 칠리즈는 밝은 얼굴로 제가 쥔 빗자루를 움켜잡았다. 사실 율리어스와 단둘이 집무실에 있는 것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는데, 가이우스가 보고를 하러 들어온 덕분에 분위기가 풀어진 것이었다.
칠리즈가 어서 집무실을 나가려 했을 때였다. 종이를 내려다보던 율리어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알았나.”
“네?”
“상대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느냐고 물었다.”
공작성에서의 경력이 오래된 그녀였지만 그래도 율리어스를 대하는 것은 편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소 얼어붙자 가이우스가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그 사이로 나섰다.
“요즘 연인들 사이에서는 위치를 알려주는 반지가 유행이라더군요.”
“유행?”
“예. 아무래도 서로가 어디 있는지 알면 조금 더 안심이 되지 않습니까. 물론 마법이 담겨서 가격이 제법 나가긴 합니다만…….”
가이우스는 그가 반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새로운 사업 방향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유행한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치매에 걸린 가족을 두었거나 어린아이들이 있는 가정에서도 쓸 만하지요. 제법 괜찮지 않습니까?”
“어린아이라.”
“아무래도 위험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율리어스가 칠리즈의 손에서 시선을 떼지 않자, 그녀가 먼저 슬며시 책상으로 다가왔다. 칠리즈는 반지를 빼내어 책상 위로 올려두었다.
“한번… 보시겠어요?”
반지는 가격이 나간다는 말답게 제법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가 자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 칠리즈가 조금 편해진 얼굴로 율리어스에게 반지를 끼어보라고 부추겼다.
율리어스가 반지를 끼자 샌드의 위치가 느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샌드의 위치가 아니라 그가 끼고 있는 반지의 위치가 느껴진 것이었다.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이것만 있으면 제가 샌드를 보고 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어요. 물론 그가 끼고 있어야 하긴 하지만…….”
“그럼 칠리즈 양이 반지를 벗은 지금은 샌드 군이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음, 정확히 말하자면 샌드는 제 반지의 위치를 아는 거니까요.”
율리어스가 그것을 돌려주자 칠리즈가 다시 반지를 착용했다. 그리곤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공작 전하께서도 한번 사용해 보세요. 정말 괜찮거든요.”
“위치가 알려지는데, 샌드 군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까?”
“그럼요. 샌드도 절 좋아하니까요.”
칠리즈는 밝게 웃으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둘만 남자 가이우스가 먼저 궁금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혹시, 율리어스 님께서도 생각 있으십니까?”
“무엇을.”
“늘 헤이븐 님이 어디 있으신지 궁금해하셨지 않습니까. 걱정이 되어서라고 한다면, 분명 헤이븐 님께서도 흔쾌히 허락을…….”
“필요 없다.”
칠리즈의 반지에 언제 관심을 가졌냐는 듯 율리어스는 다시 펜을 들었다. 율리어스의 단언에도 가이우스는 어딘지 아쉬운 기색으로 말했다.
“분명히 도움이 될 때가 있을 겁니다.”
가이우스가 일리안 하인리히에 대한 보고를 그만둔 지 벌써 반년이 넘어갔다. 제법 오랜 시간 동안 그 일을 해왔던 가이우스로서는 어딘지 허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율리어스는 일리안 하인리히 때와는 달리 헤이븐 윈터의 소식마저 일일이 물어오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언제나 죽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굴었던 일리안 하인리히 때와는 달리, 지금 그녀의 곁에는 무언가 책임져야 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도움이라.”
“예, 이제는 몬스터나 전쟁터에 나가시지 않더라도 갑작스레 납치나 사고에…….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군요.”
조곤조곤 필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던 가이우스가 문득 말을 멈췄다. 납치나 사고를 말하는 순간 율리어스의 손에 쥐어져 있던 종이가 우드득 구겨졌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인 가이우스가 먼저 물러섰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샌드 군에게서 서류를 찾으면 다시 오겠습니다.”
“가이우스.”
율리어스가 가이우스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느낀 가이우스 또한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반지를.”
한 마디에 가이우스가 미소 지었다. 제 주군이 연애 중이라는 것이, 이제야 확실히 와닿은 탓이었다.
* * *
액세서리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대장장이에게 부탁해 반지를 만들어온 가이우스는, 그것을 받아 들고 잠시 내려다보았다.
사실 샌드와 칠리즈에게 들어 요즘 유행하는 마법 반지 제작자를 제법 알아둔 터였다. 마법이 인챈트되어야 하기 때문에 마법사에게 의뢰를 하는 게 편할 거란 조언도 들었다.
그러나 가이우스가 받아 든 반지는 그런 게 아니었다.
“팔이든, 손가락이든. 어디든 쓸 수 있는 링을 만들어오도록.”
율리어스로부터 받은 명령이었다. 그는 덧붙여 위치를 알리는 마법 따위는 인챈트하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반지 외에도 여러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 링은 꽤 실용적이긴 했지만, 처음의 목적과는 다르지 않은가.
의문을 접어둔 가이우스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대답 대신 율리어스의 마나가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직 서류를 읽고 있는 율리어스가 보였다.
“율리어스 님, 이전에 말씀하신 링이 도착했습니다.”
“두도록.”
“예.”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가이우스가 책상 위에 내려두었다. 본래대로라면 용무를 마친 뒤 바로 나가는 게 옳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가이우스가 나가지 않고 집무실 한구석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율리어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내심 찔린 가이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율리어스 님. 위치를 알리는 마법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아, 혹 율리어스 님께서 직접 인챈트하시는 겁니까?”
“분명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그러면 어째서… 만들어오라고 하셨습니까?”
율리어스가 제 책상 위에 있는 링을 집어 든 것은 그때였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링 하나가 올라가자 은은히 빛났다. 거금을 들여 만든 만큼 그곳에는 제국 내에서도 구하기 힘든 보석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걱정이 되어서라면 동의할 거라고 했나.”
“예? 예, 물론입니다. 헤이븐 님도 그 정도는 분명히 용납하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예?”
제 손에 든 반지를 힘을 주어 움켜쥐었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
“혹은 받아 든 뒤 실수로, 또는 일부러 링을 벗는다면.”
율리어스는 그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가이우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링을 착용해 달라는 그의 부탁을 그녀가 거절한다면, 더 이상 제안할 수 없을 것이다.
링을 받아 든 뒤 반지를 착용하지 않는다면,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위치를 안다는 안심하에 마음을 놓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 사고에 처해 반지를 뺐는지, 일부러 반지를 뺐는지 율리어스는 까마득히 모른 채로.
가이우스가 침을 삼켰다. 율리어스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제 손에 올라간 반지를 한 바퀴 돌렸다.
“아홉 살이었나. 그때 결심을 한 게 있었지.”
“……처음 그분을 만나셨을 때 말입니까?”
“함부로 손에 넣지 않겠다. 차근히, 하나씩 준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가지겠다. 그 무엇도 내게서 빼앗아갈 수 없도록.”
머저리처럼 한번 가진 것을 잃지는 않겠다.
제 부모를 죽이기 위해 마차에 탔었다. 원한다면 그때부터 일리안의 곁에 남아 어쩌면 지금까지도 함께했을 터였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그녀의 행방에 매달리고 목마를 필요도 없이 일리안을 제 손에 넣었을 것이다. 외관이 어린 것을 핑계 삼아.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부모의 손에 죽으려 했던 자신이 살고 싶어지게 만든 것이 그녀였다. 그런 일리안의 곁을 떠나며 다시 만나, 다시 가지게 된다면 두 번 다시 놓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율리어스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미 한번 일리안을 잃은 적이 있었던 그는 두 번 다시 그녀의 죽음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일리안 하인리히와 헤이븐 윈터는 같은 사람이었지만 달랐다.
이제 와 헤이븐 윈터를 잃는다면.
그는 제 자신을 확신할 수 없었다.
* * *
가이우스는 율리어스가 반지를 제작한 뒤로 자그마한 함에 넣어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언제 헤이븐 윈터에게 건네줄까 궁금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것이 전해지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율리어스가 그저 제 만족을 위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이우스는 그것이 안타까워 제가 먼저 그녀에게 언질을 줄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러면, 생각해 보세요.”
“그래. 그런데 나도 집에 사람이 제법 있어서……. 그 녀석들이 동의해야 할 거다.”
율리어스를 찾아온 일리안과 함께 둘이 황궁으로 향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운 율리어스 탓에 급하게 전해야 할 보고가 있던 가이우스는 공작성의 앞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마차에서 내린 율리어스와 그녀는 이제는 제법 그럴듯한 연인으로 보였다. 율리어스의 손에 꾹 쥐어진 그녀의 손이라던가, 예전과 달리 꼭 붙어 서 있는 모습들이 그러했다.
그런 그들을 뿌듯한 눈으로 지켜보던 가이우스는 율리어스에게 어서 다가갔다. 곧 헤어질 기미가 보인 탓이었다.
“……율리어스. 그런데 만약 공작성에 들어가 함께 살게 되면, 방은 같이 쓰는 건가?”
“글쎄요. 불면은 낫겠지만.”
“낫겠지만?”
“제 자신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율리어스가 눈을 깜빡이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일리안의 얼굴이 빨갛게 불타올랐다. 조금 떨어져 있던 가이우스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어서 가야겠다며 도로 마차에 올라탔다.
얼마 안 가 윈터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가 출발했다.
혼자가 된 율리어스는 마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이우스는 율리어스가 공작성에 들어가기 위해 뒤돌았을 때야 그에게 다가섰다.
“일은 잘 마무리하셨습니까?”
“그래.”
그녀가 있건, 없건 율리어스의 얼굴은 언제나 서늘했지만 그 분위기가 달랐다. 그녀가 가버린 지금은 몹시도 냉정한 가이우스의 주군 그 자체였다.
그 미묘한 변화를 지켜보던 가이우스가 문득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분께서 공작성에 들어오시는 겁니까?”
“확정된 것은 아니지.”
가이우스의 얼굴은 이미 일리안이 들어온다고 말하기라도 한 듯 기대감이 어렸다. 사실, 가이우스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결혼하기를 바랐다. 하루 중 율리어스가 유일하게 살아 있는 얼굴로 있는 것이 그녀의 곁에 있을 때뿐이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그 이야기가 나온 겁니까?”
“불면을 낫게 하고 싶으면 들어오라 제안했다.”
“율리어스 님께는 어딘지 약한 구석이 있으신 분이니, 곧 들어오시겠군요.”
가이우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들을 제법 오래 봐온 가이우스는 사실 일리안의 성미를 알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율리어스에게 약한 면모를 보이곤 했었다. 처음 율리어스의 경호를 부탁했을 때에도, 율리어스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을 때에도.
그러나 율리어스로부터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아니.”
“예?”
“그녀는 들어오지 않아.”
“어, 어째섭니까……?”
율리어스는 그 말에 부답했다.
“그럼, 어째서 그런 제안을 하신 겁니까.”
가이우스의 머리로는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차피 거절될 것이라면, 구태여 제안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마음만 상할 뿐일 텐데…….
“필요하니까.”
“……예?”
율리어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슬슬 어두워지는 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이 보였다.
“거절하지 못할 구실이,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