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16화 (116/123)
  • 외전 4. 아홉 살

    일리안이 서둘러 찢어진 옷을 추슬렀다. 땀이 조금 난 터라 겉옷을 벗어 손에 쥐고 있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입어야만 했다.

    겉옷을 입으며 일리안이 묘한 눈으로 율리어스를 살폈다. 자신이 맡아주고 있는 아이는 어딘지 기묘했다. 종종 아이보다는 어른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는 말도, 행동도 이상했지만 무엇보다도 가끔 아이의 힘이 어른에 맞먹는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랬다. 제 옷이 많이 낡긴 했지만 그래도 아홉 살 어린아이의 힘으로 찢어질 정도로 헐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리안은 구태여 그 말을 제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율리어스가 일반적인 이유로 제 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기 때문이었다.

    “인마, 돈 벌려면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

    “돈이요.”

    “그래, 돈. 오늘은 완전히 허탕 쳤네.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율리어스의 분위기가 아까부터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챈 일리안이 그를 안아 들었다. 차가운 벤치가 아닌 제 무릎 위에 털썩 앉히고서 아이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고 살아온 일리안은 누군가와 살을 부딪치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율리어스를 알게 된 뒤부터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일을 마친 뒤 누군가를 껴안는다는 게, 생각보다 힘이 되는 일이었다.

    “애들은 체온이 높다던데. 넌 왜 이렇게 차갑냐.”

    “애 취급은 관두세요.”

    “그래, 그래. 춥다. 감기 걸리겠어.”

    제 겉옷을 무리하게 당긴 일리안이 그것으로 율리어스를 감쌌다. 분명 자신이 어제 사준 옷 중에서 이런 겨울에도 입을 만한 겉옷이 있을 터인데, 아이는 그것도 입지 않고 나왔다. 일리안은 잔소리를 하는 대신 아이를 조금 더 껴안기로 결정했다.

    “일리안.”

    “왜.”

    “돈이 필요합니까.”

    “돈? ……있으면 좋겠지. 그러면 이런 일에 목숨 걸고 나오지는 않을 것 아냐.”

    율리어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일리안이 그대로 웅얼거리며 말했다. 사실 날이 추워 담배라도 1대 피우고 싶다만 율리어스가 있어 꾹꾹 참는 중이었다.

    “이런 일?”

    “그래, 이런 일. 망할 놈들의 헛소리를 듣는다거나, 구역질 나는 오크들의 면상을 본다거나…….”

    일리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이 되기로 한 것에 큰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그녀는 돈이 없었고, 타파를 만나 겨우 유년 시절을 넘기긴 했지만 언제까지 식당에서 빌붙어 살 수는 없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던 일리안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혹해 용병이 되었다. 타파는 그런 그녀를 두고 미친년이라며 욕했지만 아마 타파도 알았을 것이다. 일리안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돈이 많아지면 관둡니까.”

    “그래, 당연하지. 딱 10만 골드만 있어봐. 그러면 그냥 바로 용병 길드장 앞으로 용병패를 던져 버리고, 어? 술이나 좀 마시면서 여생을 사는 거지. 아, 그때는 담배 끊어야겠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일리안이 히죽 웃었다. 율리어스는 그녀의 무릎 위에 앉아 있던 터라 그를 끌어안고 있던 일리안은 율리어스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지 못했다.

    “마차 왔다. 가자, 유리.”

    무릎 위에 앉혀두었던 율리어스를 달랑 들어 바닥에 내려둔 일리안이 자리에 섰다. 마차가 그들 앞에 멈춰 서자 일리안이 마차에 오르기 전, 마부에게 물었다.

    “번화가 쪽으로 가는 거죠?”

    “예에. 맞습죠.”

    “유리, 뭐 먹을까. 먹고 싶은 건? 그저께 먹었던 그 식당이나 다시 갈까.”

    조용히 마차에 오른 율리어스는 그저 창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을 의아하게 여긴 일리안이 그 뒤로 몇 차례 더 질문을 던졌지만, 율리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결국 일리안과 율리어스는 식사조차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에도 새벽같이 나간 일리안 탓에 집 안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차갑게 식은 샌드위치뿐이었다. 그것에 한 번 눈길을 준 율리어스는 샌드위치를 내버려 둔 채 침대를 정리했다.

    다른 점이라면, 침대 아래에 있는 돈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율리어스는 황량한 집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일리안과 함께 옷을 구매했던 상점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단박에 율리어스를 알아본 예의 그 점원이 다가왔다.

    “어머? 엄마는? 오늘은 혼자 왔니?”

    “어머니 아닙니다.”

    “어, 어? 그럼… 이모?”

    얼굴을 구긴 율리어스가 제 품에 안겨 있던 옷가지를 점원에 품에 안겼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점원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뭐니?”

    “골드로 바꾸면 얼맙니까.”

    점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율리어스를 바라보았다.

    “우린 옷을 파는 곳이지, 사들이는 곳이 아닌데……. 흠흠, 구제 옷을 처리하려면 여기 말고 저쪽으로 가봐.”

    “천 골드만 받겠습니다.”

    “처, 천 골드? 얘는, 천 골드가 뉘 집 개 이름이니?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옷인데……. 하투르? 디자이너 하투르?”

    점원이 화들짝 놀라 율리어스의 옷을 더 뒤적거렸다. 몇 년간 옷가게를 해온 점원의 눈에 그것은 절대 가품일 수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킨 점원이 슬쩍 율리어스를 위아래로 훔쳐보았다.

    “천 골드, 안 주실 겁니까. 다른 가게로 갈까요.”

    “얘, 얘는! 뭐가 그렇게 급하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렴.”

    하투르의 옷이라면 아무리 구제로 되팔아도 5천 골드는 받았다. 점원은 가게 주인에게 말하지 않고 제가 꿀꺽할 생각으로 지갑을 열었다.

    골드를 받아 든 율리어스가 가게를 나와 그 옆에 있는 보석상으로 향했다. 옷에 붙어 있는 단추나 장식이 되었던 보석들은 따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보석상까지 다녀오자 율리어스의 손에는 어느새 만 골드가 쥐어져 있었다. 자루를 손에 든 율리어스는 다시 일리안의 집이 있는 골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기 앞서, 그는 먼저 실리트의 빵집에 들렀다.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실리트가 그를 노려보며 다가왔다.

    “네가 세레타에게 한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이제껏 우릴 그렇게 생각해 왔니?”

    실리트를 바라보지도 않고 곧장 빵 진열대로 향한 율리어스의 뒤로 그녀가 따라붙었다. 세레타가 실리트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됐다. 너 같은 어린아이에게 말해서 뭐하겠니. 일리안이랑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 애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지…….”

    “얼맙니까.”

    그가 집어 든 것은 아직 따뜻한 바게트였다. 그것을 품에 안고 계산대로 와 묻자 실리트가 빼뚜름한 얼굴로 말했다.

    “천 골드.”

    그다지 좋은 재료로 만드는 것도 아닌 바게트가 천 골드나 할 리가 없었다. 네게 팔 빵 따위는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자루에서 대강 돈을 꺼내 계산대 위로 툭 던졌다. 어림잡아도 천 골드는 넘어 보였다.

    어린아이가 천 골드를 지불할 줄은 몰랐던 실리트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자, 율리어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남의 집 문을 발로 찰 줄밖에 모르는 애새끼보다는 제가 나은 것 같습니다.”

    율리어스가 고개를 내리자 세레타가 울먹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미건조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자 세라타가 와앙, 하고 울었다.

    실리트가 세레타를 달래는 사이 빵집을 나온 율리어스가 제 품에 안겨 있던 바게트를 베어 물었다. 이가 나갈 정도로 딱딱한 빵은 아이가 먹기엔 좋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일리안의 집에 다다르자 그 앞에 새까만 마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율리어스가 천천히 걸어가자 집사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왔다.

    “잘 지내셨는지요, 율리어스 님.”

    그를 지나쳐 일리안의 집으로 들어간 율리어스의 뒤에 펜서가 바짝 따라붙었다. 자연스럽게 집의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선 율리어스가 마지막으로 집 안을 훑어보았다.

    “그래, 내 아버지께선 뭐라던가.”

    “……공작성에서 기다리시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기사단을 준비해 둔 채?”

    율리어스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집 바닥에 자신이 오늘 가져온 돈이 든 자루를 내려두었다. 품에 안은 바게트는 놓지 않았다.

    율리어스가 집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십여 분이 흐른 뒤였다. 그가 마차에 타자 밖에서 펜서가 문을 닫았다. 창가에 앉은 율리어스는 물끄러미 일리안과 함께 지냈던 집을 바라보았다.

    돌아오겠다.

    처음으로 가져본 욕심이었고, 욕망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 조금 더 힘이 필요했다. 차근히, 하나씩 준비해 완전히 삼켜 버려야 했다.

    이제는 놓을 수 없을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물러서야만 했다. 지금이 좋다고 해서 이렇게 머저리처럼 놓고 있다가는, 언젠가 그녀를 완전히 빼앗길 것 같았다. 그것이 사람이든, 죽음이든 간에.

    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으로 느껴본 온기를 잠시 놓아주어야 할 때였다.

    * * *

    “더럽게 아프네.”

    다리에 붕대를 감은 일리안이 발을 질질 끌며 골목길을 걸어갔다. 오늘 다친 다리에 신경을 쓰면 어제 오크에게 두들겨 맞아 잔뜩 부은 등이 당겼고, 등을 신경 쓰면 또 다리가 아팠다.

    처음 본격적으로 나가본 몬스터들은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 포악했고, 상대하기도 쉽지 않았다. 어째서 토벌단 중에서도 짐꾼과 몬스터를 상대하는 이들의 일급이 그렇게도 차이가 나는지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다리를 다친 뒤부터 내내 발을 저느라 멀쩡한 다리마저 아파오는 것을 느낀 일리안이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는 골목길 벽에 기대어 제 안주머니에 넣어둔 봉투를 꺼냈다.

    훅.

    봉투 안으로 바람을 불자 다른 날보다 훨씬 두터운 지폐 뭉치가 보였다.

    사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무리에서 떨어진 하프 울프 1마리를 우연히 발견해 잡은 탓이었다. 다리를 물리긴 했지만, 만약 그게 1마리가 아니라 무리 전체였다면 제 살가죽 하나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닭구이라도 1마리 사 갈까. 내일은 모처럼 일도 쉬니까, 율리어스와 나갔다 오면 좋을 텐데.

    얼굴이 밝아진 일리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가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 생각보다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혼자 있다 보면 때때로 자신이 왜 돈을 버는 건지, 왜 살아야 하는지 잊어버릴 때가 있었으니까.

    집 앞에 선 일리안은 멀쩡한 다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몸을 바로 잡았다. 다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은 해야 했다. 그러지 않았다간 율리어스가 또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지도 몰랐다.

    “유리! 오늘 좀 늦었…….”

    부러 밝은 얼굴로 들어오던 일리안이 현관 앞에 우뚝 멈춰 섰다. 한눈에 들어오는 조그만 집 어디에도 율리어스가 없기 때문이었다. 대신 자루 하나가 있었다.

    절뚝이며 그것에 다가간 일리안이 자루를 열어보았다. 처음 보는 큰돈이 그곳에 담겨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잘 정리된 집과 자신이 아침에 두고 나간 샌드위치 하나가 보였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율리어스가 떠났다는 것을.

    “돈 들고 달아나랬지, 누가 돈 두고 가랬냐.”

    더 이상 이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사람은 없다. 그 사실을 안 일리안이 털썩 의자에 앉았다. 어쩐지 마음이 허전했다.

    이래서 사람을 주변에 두지 않는 건데.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던 일리안은 빈자리가 무척이나 크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누군가를 제 곁에 둔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이 떠난 뒤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렸던 일리안은 그것이 싫어 아무도 제 곁에 두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일리안의 눈에 문득 차게 식은 샌드위치가 보였다. 매일 저녁마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이 식탁에 두고 나갔던 빵이 없어진 걸 보고서 내심 기뻐했었다.

    저녁을 먹지 않아 허기졌다. 일리안은 결국 손을 뻗어 샌드위치를 물었다.

    시간이 지나 딱딱해진 빵과 시들어 버린 야채는 몹시도 맛이 없었다. 결국 한 입쯤 더 먹다 도로 내려두었다.

    배가 고팠다. 그러나 샌드위치에 다시 손이 가지는 않았다. 어쩌면 배가 고픈 게 아닐지도 몰랐다.

    아홉 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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