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15화 (115/123)
  • 외전 3. 아홉 살

    식사를 한 다음 날부터 일리안은 조금 더 이른 새벽에 나갔다. 언제나 그녀의 품에 안겨서 잠들었던 율리어스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던 것은, 아침 식사가 이제는 바게트에서 샌드위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늘 바게트를 사 왔던 실리트의 빵집은 해가 뜬 뒤에나 문을 열었다. 그러나 빵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샌드위치 가게는 해가 뜨기 전부터 장사를 시작했기에, 일리안이 그의 아침을 사 오려면 선택지가 그것뿐이었다.

    율리어스가 식탁으로 손을 뻗었다. 손에 닿은 샌드위치가 차가웠다.

    애초부터 따뜻하지 않은 음식인 탓도 있었지만, 일리안이 나간 지 꽤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자 퍼석한 빵과 늘어진 양배추 따위가 입안을 적셨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는 것은.

    결국 두 입 정도 더 먹던 율리어스는 그것을 도로 내려두었다. 대신 일리안과 함께 사용한 침대를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이불을 들춰내자 침대에서 아직 온기가 느껴졌다.

    공작성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좁은 침대는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품을 파고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발이 밖으로 조금 삐져나가는 이 침대가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오늘도 침대 바닥에는 5골드가 놓여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은, 지폐 5장이 아니라 동전 몇 개로 겨우 만들어진 골드라는 것이었다.

    율리어스가 제 손에 쥐어진 돈을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일리안! 야! 유리!”

    쾅, 쾅쾅.

    바깥에서 문이 부서질 정도로 발로 차대는 소리가 여실히 들려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법 이 집을 아끼고 있던 율리어스는 얼굴을 구긴 채 밖으로 나갔다.

    실리트의 딸, 세레타였다. 양 갈래 머리를 한 세레타는 잔뜩 심술궂은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너 진짜 일리안 아들이야?”

    “…….”

    “아니, 하나도 안 닮았잖아. 일리안은 안 예쁜데……. 우리 엄마가 그랬어. 네 아버지가 일리안한테 버리고 갔을 거라고. 너 버려진 자식이야?”

    세레타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악의가 가득했다. 세레타는 얼굴이 예쁜 옆집 아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첫날 발에 걷어차인 뒤로 그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도 이곳까지 온 이유는 율리어스를 처음 본 날부터 그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성격이 더러워서 보기 싫었지만 얼굴은 자꾸만 보고 싶었다. 세레타는 입을 삐죽이며 애꿎은 바닥만 발로 찼다.

    “야, 대답해 봐.”

    세레타는 아직 율리어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처음 마주했던 날 들었던 ‘꺼져’는 그가 입 모양으로만 전해온 탓이었다. 내심 목소리가 궁금한 세레타가 그를 재촉했다.

    “대답?”

    세레타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천사 같은 얼굴의 율리어스가 그렇게나 낮은 목소리를 낼 줄은 몰랐다. 그는 변성기가 오기 전부터 목소리가 어린아이 같지 않았다.

    “머저리.”

    “……뭐?”

    “네깟 놈에게 해줄 대답은 없으니 꺼지라는 뜻이다.”

    순간 그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세레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제 볼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다시 집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세레타는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문틈으로 제 손을 끼워 넣었다.

    율리어스는 그녀가 손을 끼워 넣는 모습을 모두 보았지만, 문을 닫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 사이에 세레타의 손이 꼈다. 그녀가 큰 소리로 울어재끼지 않았다면 율리어스는 아무렇지 않게 문고리를 더 잡아당겼을지도 몰랐다.

    “으어어어엉! 으아아아앙! 아파아아아!”

    세레타는 헐떡이면서도 일리안의 집 문을 발로 콱콱 차댔다. 그것을 지켜보던 율리어스가 얼굴을 완전히 구기고서 다시 문을 열었다. 대신 한 마디는 빼먹지 않았다.

    “닥쳐.”

    “흐끅.”

    단번에 세레타를 진정시킨 율리어스는 문밖으로 나와 그녀가 발로 찼던 부분을 섬세히 살폈다. 부서진 곳이 있으면 당장 실리트의 빵집으로 찾아가 돈을 청구할 생각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세레타가 울먹이며 말했다.

    “너, 진짜 싫어!”

    “누구는 좋아서 대화를 해주고 있는지 모르겠군. 손이 아니라 입을 잘라야 했는데.”

    “이 거지새끼야! 우리 엄마가 그랬어! 일리안은 돈도 없어서 우리 집에 돈을 빌리러 왔다고! 여자가 몬스터 잡으러 가는 곳에 가면 죽으러 가는 거랬어. 그럼 너는 또 버려질걸?!”

    율리어스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조용히 문을 잠갔다. 당연히 그가 자신을 무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리라 생각했던 세레타는 벙어리가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문단속을 한 번 더 확인한 율리어스가 세레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는 네 어미는 돈이 많아서 그렇게도 많은 남자들과 결혼했나. 하루 중 손님은 아무도 없는 그 빵집을 어떻게 운영한다고 생각하지? 글쎄. 곧 지금 만나고 있는 대장장이와도 연이 끊기면 빵집을 팔고 거리를 전전할 수도 있겠어. 그 건물 주인이 대장장이의 본처니까.”

    “……뭐, 뭐어?”

    “그러다가도 돈이 없어지면, 그때는? 이제는 자신이 결혼할 수도 없는 나이지. 그럼, 결국엔 처먹을 줄밖에 모르는 너라도 보내야 그 어미가 살아남지 않겠나? 넌 한낱 지나간 사내 중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딸인데.”

    그의 말이 너무도 빠르고, 또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많아 세레타는 완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와 얼굴이 너무도 차갑고 건조했다. 그 기색만으로도 세레타를 울리기에는 충분했다.

    율리어스는 더 이상 세레타를 상대하지 않고 지나쳐갔다. 아이가 우는 소리가 골목길을 울려댔다.

    하지만, 더 이상 그것은 율리어스의 신경을 긁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을 채운 것은 오로지 일리안이 몬스터 토벌에 나간다는 이야기뿐이었다.

    * * *

    “아이, 체스터 형님. 왜 그러십니까?”

    “그러게 여자가 이곳에 왜 있냔 말이야. 검이 아니라 식칼이나 쥐라고.”

    남자는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제 무리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일리안의 웃는 낯에도 슬며시 금이 가기는 했지만, 끝끝내 참았다.

    일리안이 이곳 토벌단에 배치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수도에 올라온 이유도 토벌단에 참여하기 위해서긴 했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토벌 작전 중심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타파가 그녀를 걱정하고 있기도 했고 일리안은 용병이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신출내기인 탓이었다. 이곳 생리나 상황에는 제법 익숙해지긴 했어도 그녀를 놀리고 있는 사내들에 비하자면 연차가 너무도 낮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토벌단의 짐꾼으로 신청했던 것인데……. 입이 하나가 늘자 확실히 돈이 부족해졌다. 어제는 겨우 유리의 옷을 샀지만 아직도 사야 할 것이 잔뜩 있었다. 적어도 아이가 공부할 수 있도록 책 1권쯤은 사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신청한 곳이 오크 토벌팀이었고, 일리안은 오늘 처음 이곳에 와 사내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젊은 여성인 일리안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응? 활 내려놓고 애교나 부려보지 그래.”

    남자가 앉으라는 듯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놈들의 태도는 그녀를 낮잡아보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일리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망할.”

    “……뭐?”

    일리안의 손이 움직였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화살을 움켜쥔 채 뻗어온 남자의 손등을 찔렀다. 순간적으로 놀란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남자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제 검지와 중지 사이 흙바닥에 꽂힌 화살이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일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뭐?”

    그녀는 이미 화살을 놓고서 담배 하나를 입에 문 채였다. 불을 붙이느라 일리안의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꺼져, 새끼들아.”

    담배에 불을 붙인 일리안이 픽 웃었다. 그리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들어 사내들을 향해 탁, 탁 쳐댔다. 담뱃재가 그들에게 튀자 그들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결국 혼자가 된 일리안은 다시 활을 등에 메고서 숲속으로 걸어갔다. 사내들이 아직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가만히 당해주고 있다간 앞으로 남은 토벌 기간 내내 성희롱이나 당할 터였다. 보여줄 게 필요했다. 자신을 토벌 단원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마침 일리안의 눈에 오크 1마리가 보였다.

    “야, 야! 너 안 돌아와?! 미친, 그걸 너 혼자 어떻게 잡겠다고……!”

    일리안이 활을 꺼내 들었다. 힐끗 눈을 돌리자 등 뒤에서 사내들이 다급히 검을 잡고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러나 일리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화살을 시위에 겨누었다.

    오크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목을 노렸던 화살이 흔들리며 오크의 어깨를 찔렀다.

    “캐애액!”

    화살을 맞은 오크가 성나 달려오기 시작했다. 충분히 따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천천히 뒤로 달리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그 속도가 이상했다. 그제야 일리안은 그것이 오크들 중 상위에 속하는 전사라는 것을 알았다.

    급속도로 다가온 오크 전사가 두터운 나무 방망이를 휘둘렀다. 직격으로 맞았다간 즉사였다. 일리안이 재빨리 허리를 숙여 그것을 피했다. 그러나 처음 상대해 본 오크에 결국 그녀는 등을 맞고 멀리 날아갔다.

    퍼억…….

    힘없이 날아간 일리안이 바닥을 굴렀다. 신이 난 오크 전사가 다가와 그녀의 머리 위로 무기를 높이 쳐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정신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일리안이 오크 전사가 방망이를 내려찍을 때, 옆으로 굴렀다. 그리곤 제 등에 메어 있던 화살 하나를 꺼내 직접 오크의 눈을 쑤셨다.

    “끄애애액! 캐애액!”

    제 눈을 잡고 날뛰는 오크에게로 무수한 검들이 쏟아졌다. 일전에 일리안과 다투었던 사내들의 것이었다.

    오크가 쓰러지자 그들 중 1명이 멋쩍은 얼굴로 제 머리를 긁으며 다가왔다. 일리안에게 검 대신 식칼이나 쥐라고 했던 이였다.

    “거……. 흠.”

    사내들이 머뭇거리자 일리안은 제가 먼저 말을 걸려고 했다. 괜한 시비를 걸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대화로 풀어볼 요량이었다. 어찌 됐든, 자신은 이곳에 배정되었고 살아남으려면 그들과 합을 맞추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은 아직 주저앉아 있는 일리안에게 자그마한 그림자가 드리운 탓이었다.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한 일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유리?”

    “다쳤습니까?”

    “유리, 네가, 왜 여기…….”

    사내들 사이로 애가 있었어? 하는 수군거림 따위가 들려왔다. 하지만 일리안과 율리어스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인마,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너 혼자 온 거냐?”

    “다쳤냐고 물었잖아요.”

    “망할, 이봐요! 단장한테 말 좀 전합시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먼저 돌아간다고!”

    “오, 오늘 치 일당은? 도중에 돌아가면 못 받잖나. 이렇게 오크도 잡았는데…….”

    “됐습니다! 그쪽들끼리 나눠먹던가!”

    율리어스를 안아 든 일리안이 서둘러 숲을 빠져나갔다. 아직 사내들과 멀리까지 나오진 않은 터라 조금만 가면 토벌단이 만들어둔 임시 베이스였다.

    임시 베이스를 지나 일리안은 먼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를 기다렸다. 적어도 3시간에 한 번은 수도로 들어가는 마차가 있으니 몇 시간만 기다리면 탈 수 있을 터였다.

    정류장에 오기까지 율리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돌아갈 생각을 하느라 미처 그의 기분을 파악하지 못했던 일리안이 의자에 앉고서야 겨우 분위기를 살폈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일리안이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던 이유는 토벌단이 하루에 한 번 태워주는 대형 짐차가 새벽에만 있는 탓이었다. 그걸 타고도 1시간은 와야 할 정도로 먼 곳인데, 대체 율리어스가 어떻게 혼자 여기까지 왔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제 질문에 대답해 주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네 질문?”

    그제야 그가 이제껏 다쳤냐는 질문을 반복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일리안이 볼을 긁었다.

    “안 다쳤는데.”

    “안 다쳤습니까.”

    “그렇다니까.”

    율리어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일리안의 목 부근 옷깃을 구겨 잡았다.

    이윽고 그녀의 옷이 조금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옷감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드러난 일리안의 등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율리어스가 중얼거렸다.

    “안 다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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