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14화 (114/123)
  • 외전 2. 아홉 살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집에서 지낸 지 닷새가 흘렀을 즈음이었다. 어느새 둘의 동거는 제법 안정기에 다다르고 있었다.

    어제는 일리안이 감기에 걸렸다. 열이 펄펄 치솟아 정신을 잃자 도리어 놀란 것은 율리어스였다. 때문에 그는 밤중에 실리트 모녀의 집을 다짜고짜 찾아가 열이 내리는 법을 물어오기도 했다.

    잠에서 깨어난 율리어스가 침대에 앉았다. 그의 다리 위로 덮고 있던 담요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리자 방 한구석에 있는 마법 난로에서 정상적인 크기로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율리어스가 어젯밤 피웠던 불에 비하자면 몹시도 작은 크기였다.

    집 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일리안이 일을 나간 뒤인 것 같았다. 곤히 잠든 율리어스를 위해 그녀가 마법 난로를 끄지 않고 나간 것이리라.

    “…….”

    평소였다면 일리안이 실리트 모녀의 집에 가서 세레타와 놀고 있으라는 말을 남겼을 터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단 한 번도 일리안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사흘째에 이르러선 일리안도 포기했다.

    어째서 자신이 그 모녀의 집에 찾아가 귀찮기 짝이 없는 세레타와 놀아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일리안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겠지만, 보아하니 그녀는 자신을 위해 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이윽고 율리어스가 침대에서 일어섰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이불을 개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리안이 가르쳐 준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사용한 자리는 깨끗해야 한다고 그녀가 일장 연설을 하기는 했어도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단지 해두면 일리안이 기뻐하는 눈치기에 할 뿐이었다.

    처음 이 집에 와서 맞은 아침에는 멍하니 서 있었다. 10시간쯤 지나면 일리안이 집에 돌아왔고, 율리어스는 그동안 가만히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앉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서 일리안이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면 찾으러 가야지, 조금만 더 기다려야지. 그런 생각의 연속이었다.

    닷새가 흐른 지금은 다소 달라져 있었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이 돌아오면 하는 일들을 겨우 흉내 내서 해두기 시작했다. 청소가 그 첫 번째였다.

    “아.”

    이불을 개고서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하려던 율리어스는 무언가 생각난 듯 침대로 다시 향했다.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그 아래로 손을 넣었다.

    손바닥에 이끌려 나온 것은 지폐 몇 장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5골드였다. 실리트가 제대로 식사를 챙겨주지 않는 것을 안 일리안은 인근에서 밥을 사 먹으라며 꼭 침대 아래에 돈을 넣어두고 갔다.

    그것을 손에 쥔 율리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갔다. 몇 벌 되지 않는 일리안의 겉옷 주머니에 다시 돈을 구겨 넣었다.

    언제나 아침에 눈을 뜨면 바게트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일리안이 그것을 먹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 번은 율리어스가 뜬눈으로 밤을 새워 그녀가 식사를 하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율리어스는 제 몫의 바게트만 있는 이유가 일리안이 가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굳이 그녀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마친 율리어스가 다시 청소를 하기 위해 빗자루를 손에 쥐었을 때였다.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실리트, 아니면 세레타. 율리어스가 이 집에 오고서 만난 손님은 둘뿐이었다. 일리안은 제 집을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지 손님이 없었다.

    그러나 그 둘은 노크를 할 줄 모르는 이들이었다. 문을 발로 차거나 바깥에서 일리안의 이름을 꽥꽥 외쳐대기 바빴다.

    그러니 문을 두드린 이는 세레타나 실리트가 아니었다. 눈을 깜빡인 율리어스가 문 쪽으로 다가갔다.

    “…….”

    바깥의 사람은 문을 두드린 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던 율리어스가 문고리를 잡았다.

    되도록 빠르게 처리할 생각이었다. 일리안의 집 어느 곳도 망가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율리어스 님!”

    바깥엔 머리가 희끗희끗한 펜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서부터 새어 나오던 미약한 마나를 다시 꺼트렸다. 집사복을 입지 않은 펜서가 울먹이는 얼굴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아 계셨습니까?”

    “펜서.”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펜서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훔쳤다. 율리어스는 무미건조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곧 진정된 펜서가 율리어스의 손을 덥석 잡아왔다.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공작이 나를 찾던가.”

    “아니요, 아닙니다. ……공작 전하께서는 안심하시는 눈치셨습니다. 더 이상 찾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찾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다행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펜서 또한 그것을 알기에 다행이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대신 더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공작부인께서 따로 사람을 고용해 율리어스 님을 찾고 계십니다. 아직 이곳은 모르시는 것 같았지만…….”

    “나를 죽이라고 명했나.”

    “……예.”

    말을 마친 펜서는 결심이 선 표정으로 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곤 두 무릎을 꿇었던 다리 중 한쪽 무릎만 세운 채 고개를 바짝 숙여왔다.

    “율리어스 님, 부디 살아남으라는 제 말을 기억하십니까.”

    “…….”

    “원하신다면 이 늙은이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도망치시겠다면 그 뒤를 따를 테고, 돌아가시겠다면… 그것 또한 함께하겠습니다. 살아남으십시오. 사셔야 합니다.”

    펜서의 눈은 결연했다. 그가 공작성의 집사복을 벗어 던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더는 공작성의 충실한 집사로 남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율리어스가 원한다면, 그는 제 앞의 조그만 아이에게 몸을 바칠 것이었다. 그의 편에 선 이가 하나도 없다면 제가 그 편이 되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기엔, 율리어스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그런 펜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율리어스가 몸을 돌렸다.

    “싫어.”

    고개를 숙였던 펜서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율리어스의 선택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싫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매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말이 옳았다.

    율리어스는 늘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외람된 이야기지만, 어째서 싫은지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이곳이 좋다.”

    “……이곳이요?”

    아직 문 앞에 서 있던 펜서가 슬쩍 집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한눈에 들어오는 집은 율리어스의 방보다도 작았다. 구석구석에 핀 곰팡이나 낡은 가구들이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율리어스가 공작성에서 학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곳보다는 좋은 환경이었을 터다. 펜서는 이곳이 좋다고 말하는 율리어스가 순간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사시는 겁니까?”

    “그래.”

    “좋은… 분이지요?”

    일찍이 사회생활을 접했던 펜서는 타인에 불과한 어른이 모르는 아이를 맡아주는 게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혹여나 율리어스가 이상한 자와 엮였을까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율리어스로부터 조금 이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응, 좋아.”

    싫다는 말에 이어 좋다는 말까지 들은 펜서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재차 확인하듯 율리어스가 강조했다.

    “좋아, 많이.”

    * * *

    펜서가 돌아가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안이 집으로 돌아왔다. 벌컥 문을 열고서 발을 들인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누가 왔다 갔냐?”

    “펜서.”

    “펜서? 그게 누구야.”

    일리안은 딱히 제 집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집이 멀끔히 바뀌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구석에 피어 있던 곰팡이는 완전히 사라졌고, 집 안에 없던 식탁이나 필요한 가구 몇 개가 들여졌다.

    고급스러운 나무 무늬가 들어간 탁자를 노크하듯 쿵쿵 두드렸다. 나무 탁자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제법 가격이 나갈 것 같은데.”

    “팔아도 됩니다.”

    “팔긴 왜 팔아. 네 지인이 선물해 줬다는데. 함부로 팔면 안 된다, 그런 거.”

    “일리안은 가난하잖습니까.”

    율리어스의 툭 던진 말에 식탁를 어루만지던 일리안이 멈칫했다. 그러다 그녀가 율리어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콱.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가난하긴, 누가. 그래도 이 동네에선 아주 못 사는 축은 아닌데.”

    “……옷이 해진 사람은 가난한 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그랬냐? 취향일 수도 있지!”

    “펜서가요.”

    펜서. 오늘만 두 번째 들은 이름에 일리안이 눈썹을 구겼다. 그리곤 율리어스를 달랑 들어 제 허리 옆에 붙였다.

    “가자. 안 그래도 네 옷 사러 가야 하니까.”

    “……내 옷?”

    “가는 김에 내 옷도 사고. 옷이 많이 낡기는 했지.”

    일리안의 집은 번화가에서 멀지 않았다. 근처에 숙박업소나 술집이 많기는 했지만,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아 드문드문 일반 상점들도 보였다.

    일리안은 그중 가장 번듯한 옷가게에 들어갔다. 유아용 전문 옷가게였다.

    “어머? 너무 예쁜 아이네요! 어쩜 이렇게 천사 같을까.”

    “손 치워.”

    “……그, 얼굴은 천사 같은데 성격은 천사가 아니라서요. 하하. 함부로 만지시면 뭅니다.”

    율리어스의 뺨을 꼬집으려던 점원은 그의 날카로운 반응에 손을 거둬들였다. 가게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을 알아차린 일리안이 어서 옷 몇 개를 뒤적거렸다.

    “이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것도 참 잘 나왔죠. 이건 어떠세요? 요즘엔 이런 형식이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이에요.”

    그래도 점원은 웃는 낯으로 옷 몇 개를 추천해 왔다. 일리안 또한 제가 마음에 드는 것 두어 개를 집어 율리어스에게 들이밀었다.

    “유리. 이건? 넌 얼굴이 워낙 하얗다 보니까 뭐든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싫습니다.”

    “그럼 이거. 사내놈이 정장 하나는 있어야지.”

    “그걸 제가 언제 입습니까.”

    웬만하면 일리안의 부탁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율리어스가 웬일로 차갑게 반응했다. 그런 그의 말에 잠시 눈을 깜빡인 일리안은, 더는 그에게 의사를 묻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비싼 옷 몇 개를 골라 계산할 뿐이었다.

    “일리안. 나는 옷 필요 없습니다.”

    “옷이 왜 필요 없어? 너 닷새째 같은 옷 입고 있는 거 알긴 아냐. 왜인지 깨끗하긴 하지만.”

    “옷은 빨아서 입으면 됩니다. 일리안의 옷도 입을 수 있어요.”

    “너 나랑 키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는 아냐. 그러니까 열심히 좀 먹어라. 언제 다 클래.”

    율리어스는 순간 발끈했다. 자신은 음식을 먹지 않아도 키가 클 수 있었다. 제가 얼마나 자랄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빨리 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일리안이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은 참기 싫었다.

    “자, 밥 먹으러 가자.”

    재빨리 율리어스의 손을 낚아채 옷가게를 나선 일리안은 나머지 손으로 제 지갑을 슬쩍 확인했다. 아마도 율리어스 몰래 한다고 한 행동인 것 같기는 했지만, 그의 눈에는 슬쩍 보인 지갑 속 지폐 개수까지 보였다.

    “뭐 먹을래?”

    “저것.”

    율리어스가 가리킨 곳은 근방에서 가장 비싸다는 레스토랑이었다. 고작 심술이 나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지금이라도 돌아가 제 옷을 되팔기를 바라서 부러 가리킨 것이었다.

    그의 손짓에 잠시 망설이던 일리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지갑 속에 있는 지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이제껏 뭐 먹고 싶다고 한 번도 안 하더니. 저런 게 취향이었냐?”

    “…….”

    “앞으로 먹고 싶으면 먹고 싶다고 말해라. 저것도 못 사줄까 봐.”

    율리어스의 손을 붙잡은 일리안이 어서 가자는 듯 당겼다. 그가 힘을 주고 버티자 일리안이 율리어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안겨진 율리어스가 얼굴을 구겼다. 원한다면 힘을 주어 안 가고 버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안아 드는 건 반칙이 아니던가.

    안기는 것은 좋았지만 왜인지 불만스러웠다. 차라리 제가 안으면 더 좋을 텐데.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어깨를 꾹 눌렀다.

    어서 커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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