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아홉 살
“이불이 없는데. 어쩌냐?”
회색 머리의 여자가 율리어스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도 얼마 못 가 자신이 질문을 던진 이가 고작해야 제 허리에 겨우 오는 아홉 살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애꿎은 제 앞머리만 헝클였다.
일리안의 집에 쳐들어왔던 공작성의 기사들이 떠나간 지 채 1시간이 흐르지 않았을 때였다. 이렇게 늦은 밤에 여분의 이불을 구할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좁은 집 안에 침대는 하나였고, 이불과 베개 또한 하나뿐이었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제 집에서 편안하게 잘 생각이던 일리안은 율리어스와 침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던 그녀가 갑작스레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갔다. 율리어스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였다.
“…….”
그런 일리안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율리어스는 그녀가 자신을 두고 떠났다고 생각했다.
나가는 뒷모습이 그 언젠가 막 태어난 자신을 성에 버려둔 채 떠났던 어머니의 모습과 똑같은 탓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율리어스는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어린 율리어스는 또래에 비해 왜소한 편이었다. 고개를 숙인 율리어스가 앞으로 어떻게 음식을 구할지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펜서가 겨우 챙겨주었지만 앞으로는 혼자가 될 터였다.
그냥, 이대로 돌아가 공작성을 가질까.
그는 고민했다. 율리어스가 제 어머니와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순순히 그들에게 살해당하려 했던 것은, 그들이 제 부모인 탓이었다. 그 배려가 율리어스에게 남은 일말의 인간적인 면모였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율리어스에게도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겨 버린 까닭이었다.
이윽고 율리어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자신을 버렸다면 제가 찾아내면 되었다. 그가 일리안을 가지기 위해 움직이려 했을 때였다.
“뭐야, 아직 안 잤냐.”
벌컥 문을 연 일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율리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희미한 담배 냄새가 났다.
“그만 자야지. 내일부터는……. 너 설마, 돌아갈 곳도 없냐?”
율리어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머리가 아파진 일리안이 눈을 찡그렸다.
“그래……. 그런데 말이다, 나는 내일부터 당장 일을 하거든. 그러니까 어서 자자.”
신을 벗은 일리안이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 옆에 선 율리어스는 누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대충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던 일리안이 한쪽 눈을 떴다. 아이가 그곳에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오히려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냐?”
“서 있는데.”
“그러니까, 왜 서 있냐고. ……아니 그것보다 서 있습니다, 라고 해야지.”
“서 있습니다.”
그녀의 핀잔에 율리어스가 어색하게 그것을 따라 읊조렸다. 그 모습에 짧게 웃은 일리안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긴 팔이 율리어스의 허리를 감쌌다.
어느새 당겨진 율리어스는 번쩍 들려 침대 위로 옮겨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일리안의 품에 안긴 뒤였다.
“어린놈이 왜 이렇게 가볍냐. ……설마, 굶겼어?”
품에 안기자 몸이 경직된 율리어스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일리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일리안이 이내 쯧, 혀를 차며 됐다고 중얼거렸다.
멀거니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율리어스의 눈 위로 굳은살이 박인 손이 얹어졌다. 시야가 어두워진 율리어스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라.”
눈 위로 얹어진 손길은 따뜻했다. 자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 또한 차갑지 않았다. 율리어스는 그날, 처음으로 제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 * *
“일어났냐.”
율리어스가 눈을 떴을 때에는, 이제 막 밖에서 들어온 듯한 일리안이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바구니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났다.
바구니를 식탁에 내려두려 했던 일리안이 눈을 찌푸렸다. 이제 막 이사를 들어온 탓에 집 내부에는 식사할 때 사용할 만한 식탁이나 의자가 없었다. 물론 그것을 살 계획도 없기는 했다.
당연히 자신 혼자 살게 될 거라 생각했고, 대부분 밖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으니 식탁은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제 집에 웬 어린아이가 1명 살게 되었다.
일리안은 결국 손에 쥔 바구니를 율리어스의 품에 안겨주었다. 따뜻한 바구니를 품에 안은 율리어스가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먹어.”
“…….”
“그거, 실리트 아주머니가 헛소리하는 걸 아침부터 들어주고 얻어온 거다? 불만 갖지 말고 먹어. 저녁에는 근사한 외식 시켜줄 테니까.”
괜히 멋쩍어진 일리안이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그런 일리안을 잠자코 바라보던 율리어스가 이내 바구니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갓 구워낸 듯한 바게트가 들어 있었다. 고작 하나였다.
율리어스가 빵을 덥석 집었다. 뜨거웠다. 분명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순간 놀라 빵을 놓쳤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율리어스에게는 뜨겁다는 감각이 머릿속으로 느껴졌을 뿐, 결코 그 빵을 놓치지는 않았다.
입으로 가져가 한 움큼 베어 물었다. 빵에서는 특별한 맛이 나지 않았지만 갓 구워내 고소했다. 율리어스가 그것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하필 눈이 내리고 난리냐. 눈밭에서 구르게 생겼잖아.”
창밖을 보던 일리안이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 빵을 먹던 율리어스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넓은 창 너머로 두터운 흰 눈이 가득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 일리안의 어깨도 눈이 가득 쌓였던 것일 터다.
그러다 문득 차갑게 식은 그녀의 몸과는 달리 어째서 바게트가 뜨거웠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리안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율리어스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율리어스가 빵을 다 먹을 때까지 바닥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던 일리안은 바게트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석에 놓인 옷장에서 두꺼운 겉옷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일리안이 겉옷에 팔을 끼워 넣으며 말했다.
“점심은 실리트 아주머니한테 말해뒀으니까 가서 먹어라. 나가서 바로 왼쪽으로 코너를 돌면 있는 천사 그림이 그려진 빵집이야. 세레타, 그러니까 그 집 딸이 다이어트한다고 꼭 정오에 점심을 먹거든. 10분 전쯤에 설렁설렁 걸어가.”
“…….”
“맞다. 세레타, 그게 성격이 더러워. 너한테 투정 부리거든 돈 냈다고 말해라. 좀 전에 실리트 아주머니한테 5골드 쥐여줬으니까.”
겉옷을 다 챙겨 입고도 일리안은 율리어스에게 단단히 주의시켰다. 겨우 밖을 나가려나 싶더니, 문 앞까지 갔던 그녀가 어느새 다시 돌아왔다.
일리안은 결국 율리어스의 손에도 골드를 쥐여주었다.
“굶고 다니지 마라. 어?”
눈을 가릴 정도로 긴 율리어스의 머리가 잔뜩 헝클여졌다. 일리안이 거칠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은 탓이었다.
손에 돈을 쥐여주고서야 안심이 된 일리안이 밖으로 나갔다. 적막한 집 안에서 혼자가 된 율리어스는 조용히 제 손을 폈다.
마르고 긴 손가락 사이로 동전 몇 개가 굴러떨어졌다. 그러고도 손바닥 위에는 지폐 몇 장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제 겉옷 주머니에서 있는 대로 돈을 집어준 탓이었다. 대충 5골드가 겨우 될 것 같았다.
집 안에 멀거니 서 있던 율리어스는 물끄러미 일리안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굶고 다니지 마라.”
그녀가 한 말을 자꾸만 곱씹었다. 어째서 자신에게 밥을 먹으라고 그다지도 강조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식사.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던 것을, 왜 그렇게도 중요한 것처럼 이야기했을까.
공작성에서는 이틀에 한 번 펜서가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시종들이 따로 제 식사를 챙겨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공작부인의 눈치를 보기 바빴던 그들은 음식을 주지 않았다. 율리어스가 공작성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펜서가 주는 스프 한 그릇이 끝이었다.
적어도 1달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것은 율리어스가 태어나자마자 알게 된 사실이기도 했다. 어쩌면 1달보다도 더 오래 굶어도 될지 몰랐다.
“……배고프다.”
율리어스가 손을 움켜쥐었다. 이상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허기짐이 순식간에 와닿았다. 배가 고팠다. 배가 고파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 * *
“인마, 너…….”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온 일리안은 녹색의 낡은 겉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나갈 때는 멀쩡했던 겉옷 군데군데가 찢어진 채였다.
이번에는 눈을 털어내는 것도 잊어버린 일리안이 한순간에 율리어스에게 달려왔다. 그가 그녀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한 손에 돈을 움켜쥔 채 방 한가운데에 멀거니 서 있는 탓이었다.
“설마, 나 돌아올 때까지 여기 서 있었냐?”
“……응.”
“응, 아니고 예, 맞습니다.”
“예.”
일리안이 얼굴을 확 구겼다. 그리고 그녀는 율리어스를 제 품에 껴안아 들어 올렸다.
품에 안긴 율리어스는 어젯밤 침대에 누울 때와 마찬가지로 몸이 경직되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일리안은 성큼성큼 걸어 집 밖으로 나갔다.
“집에 있는 돈 들고 달아났나 했더니, 쥐여준 돈도 못 쓰는 멍청이였냐. 배도 안 고팠나?”
“배고팠는데. ……배고팠습니다.”
“그럼 식사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이 녀석아.”
율리어스를 품에 안은 일리안이 성난 걸음으로 코너를 돌았다. 그곳엔 그녀가 아침에 말한 대로 천사 그림이 그려진 나무 간판이 있었다. 일리안이 그곳의 나무문을 퍽 차고 들어갔다.
“이보세요, 실리트 아주머니!”
“어머. 일리안 아니니? 웬일이야?”
“제가 아침에 분명히 그랬지 않습니까. 제 집에 애가 있으니 식사 좀 챙겨주라고요. 예?”
실리트 아주머니라 불린 여성이 눈을 크게 떴다. 미처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실리트가 어색하게 호호 웃으며 일리안의 팔을 찰싹 쳤다.
“어머, 어머. 내 정신 좀 봐. 깜빡했지 뭐니? 그리고 얘도 참, 내가 분명히 정오에 우리 집으로 애를 보내라 했잖아. 왔으면 같이 먹었을 텐데. 으응? 얘가 그 애구나? 어머, 예쁘게도 생겼네. 일리안, 네 애니?”
실리트는 과장된 얼굴로 손뼉을 부딪쳤다. 능숙하게 주제를 돌린 실리트가 손을 뻗어 율리어스의 뺨을 꼬집으려 들었다.
그 손길을 철썩 쳐낸 것은 율리어스였다. 무뚝뚝한 얼굴의 율리어스가 실리트의 손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쳐내자 빵집 안에 침묵이 흘렀다.
“엄마, 누구예요?”
“으, 으음, 예쁜 만큼 까칠한 아이구나? 세레타, 네 친구란다.”
“친구? 와! 진짜 예쁘다. 공주님이에요?”
일리안에게 쪼르르 달려온 세레타가 율리어스를 보기 위해 그녀의 허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제 주변에서 처음 보는 천사 같은 생김새의 율리어스에게 세레타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세레타가 일리안에게 붙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율리어스는, 품에 안긴 채 발을 뻗어 세레타를 걷어차 버렸다.
발에 차인 세레타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이미 실리트 아주머니에게 눈을 돌린 지 오래였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울먹거리는 세레타를 가만히 바라보던 율리어스가 입을 움직였다. 꺼져. 소리는 나지 않았다.
“됐고, 애 밥도 못 줬으니 골드나 돌려주시죠. 정확히 5골듭니다.”
“으응? 내가 돈을 받았나? 아하, 그랬지. 그런데 그건 내가 오늘 계란 사는데 써버렸는걸? 일리안, 저 아이가 밥을 먹으러 왔어봐. 그러면 5골드 치를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안 왔잖니. 그게 내 탓은 아니지!”
“분명히 제가 말했잖습니까. 아이가 오지 않거든 직접 가서 주라고요. 길을 잃었을 수도 있으니. 유리, 집에 식사가 왔냐?”
눈을 깜빡인 율리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안이 실리트에게 손바닥을 척 내밀었다. 얼굴을 구긴 실리트가 짜증 난다는 기색으로 계산대로 돌아가 돈을 가져왔다.
돈을 받아 든 일리안이 종소리를 짤랑이며 어서 문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아직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일리안은 율리어스가 눈을 맞지 않도록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를 바닥에 내려두고 겉옷을 벗었다.
율리어스의 어깨에 사이즈가 맞지 않는 겉옷이 둘러졌다. 일리안은 제 겉옷으로 감싼 율리어스를 다시 들어 올렸다.
“자, 오늘 저녁엔 근사한 외식하러 간다 했지. 가자!”
한겨울에 겉옷도 입지 않은 일리안이 아이를 껴안은 채 빠르게 달려갔다. 그녀의 한쪽 손에는 실리트 아주머니가 쥐여준 5골드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율리어스도 마찬가지였다. 일리안으로부터 아침에 받았던 5골드를 내려다보던 율리어스는 이내 주먹 쥔 손을 일리안의 목에 둘렀다. 이제껏 경직된 채 안겨 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제야 배가 불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고작 5골드로도 사람은 배가 부를 수 있었다. 율리어스는 제 손에 쥔 골드를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