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12화 (112/123)

112. 아가리를 벌린 검은 강

상대가 율리어스임을 확인한 일리안은 순간적으로 안심했다. 그러나 기묘한 긴장감이 그곳을 팽팽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러니까, 율리어스……. 이건,”

일리안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앞서 율리어스가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한 걸음 물러선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손을 들고서 가라앉은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제 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이윽고 빠져나온 율리어스의 손에는, 익숙한 링이 쥐어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일리안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어디서 링을 잃어버렸는지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 탓이었다. 분명히, 지금쯤 비앙카의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할 반지가, 율리어스의 손에 있었다.

“빼지.”

차갑게 식은 손이 일리안의 손가락을 감쌌다.

“말라고,”

손가락에 링이 감겨들어 갔다. 반지가 제자리를 도로 찾아갔다.

“했잖습니까.”

그의 속눈썹이 드리웠다. 다시금 일리안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율리어스가 이내 그 손을 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안의 기분이 이상했다. 반지에는 아무런 기능도 없고, 단지 자신이 약속을 어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숨겨진 모습 중 하나를 발견한 것만 같았다.

눈썹을 찌푸린 일리안이 어서 입을 열었다.

“겔트 백작을, 상대하느라……. 그래, 뭐. 설명하는 것도 이상하네. 단지 손을 사용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뺐을 뿐이야.”

“겔트 백작을 상대했다는 게 무슨 소립니까.”

“패러든 공작 가문의 파티에 다녀왔는데, 시비가 걸렸거든.”

“시비?”

“발을 걸더라고. 그래서 좀… 넘어졌다.”

일리안은 자신이 있던 일을 남에게 모두 말하는 것이 머쓱해 제 볼을 긁었다. 누군가에게 일러바친다던가, 하소연을 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그녀가 넘어졌다는 이야기에 곧장 한쪽 무릎을 꿇었다. 후미진 골목길의 바닥에는 누군가가 버리고 간 쓰레기로 오물이 널브러져 있어도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다.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발목을 잡고 제 무릎 위로 올렸다. 일리안의 신발 밑창이 그의 고급스러운 옷을 짓뭉갰다.

“상대는 제대로 하셨습니까.”

“뭐, 겁 좀 먹게 했지.”

“겁이요.”

그의 목소리는 고조가 없었지만 미묘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고작해야 겁을 먹게 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율리어스의 손에는 흰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따뜻한 기운이 힐링 마법임을 안 일리안이 문득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율리어스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율리어스가 무섭다니. 별, 이상한 생각을.

그녀가 율리어스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손길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어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다음에는, 비앙카 벨레어가 아닌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파티도 안 좋아하는 자식이.”

“일리안이 있잖습니까.”

율리어스의 당연하다는 태도에 오히려 쑥스러워진 것은 그녀였다. 그러다 일리안은 문득 그가 비앙카 벨레어라는 이름을 언급한 것에 생각이 미쳤다. 내가,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나.

일리안이 무어라 질문을 하려 했을 때였다. 마법을 마친 율리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공작성에는, 왜?”

“힐링 마법은 제 전문이 아닙니다. 두었다간 내일부터 걷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방금 전 걸으면서, 몰랐습니까?”

율리어스가 그렇게 묻자 그제야 발목에서부터 아픔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는 골목길에서 정신없이 걸어가느라 발목이 아픈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다쳤다고?”

“예. 마침 이전에 불렀던 치료 마법사가 아직 머물고 있습니다. 잠시 들렀다 가세요.”

“……내일부터는 당장 가야 할 곳이 많은데. 그래, 그러면.”

일리안이 긍정의 뜻을 보이자 눈을 내리깔고 있던 율리어스가 성큼 다가섰다. 이윽고 그가 그녀의 다리와 등 뒤를 감싸 안아 올렸다.

가자고 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갈 줄은 몰랐던 일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미 율리어스는 그녀를 제 품에 안아 든 뒤였다.

“일리안, 눈을 감아요.”

“……왜?”

“멀미가 나잖습니까.”

본래였으면 말없이 마법을 사용해 공간을 이동했을 터였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그녀가 눈을 감을 때까지 이동할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일리안이 짧게 웃었다. 그제야 그가 어째서 매번 공간 이동을 할 때마다 제 눈 위로 손을 얹었는지 이해가 갔다.

웃음을 머금은 일리안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말대로 공간이 뒤틀리는 감각과 함께 조금의 멀미가 느껴졌다.

“일리안.”

율리어스가 귓가에 속삭이자 일리안이 눈을 떴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같았지만, 그곳은 이미 율리어스의 침실이었다.

침대에 다가선 율리어스가 일리안을 조심스레 그 위에 내려두었다. 일리안이 편하게 앉을 때까지 팔을 떼지 않던 율리어스가 나직이 말했다.

“마법사를 불러오겠습니다. 기다리세요.”

물러선 율리어스는 머뭇거리지 않고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 그를 붙잡은 것은 일리안이었다.

“율리어스.”

그는 일리안의 조그만 부름 하나로도 우뚝 멈춰 섰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목줄이었다. 짐승을 다룰 수 있는 목줄.

“내가… 그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거냐.”

묵묵부답이었다. 율리어스가 대답하지 않자 일리안 또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제가 당신이 있는 곳을 어떻게 모를까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언제든 알 수 있다고?”

일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감시였다. 아무리 자신이 율리어스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그것만은 넘어가 줄 수 없었다.

“설마요, 일리안.”

“그럼 대체…….”

“그랬으면 제가 당신이 죽을 때에도 멍청히 산 아래로 내려갔겠습니까.”

그녀의 죽음을 말하는 율리어스의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가시가 담겨 있었다. 일리안이 대답하지 못하자 율리어스가 말을 이어갔다.

“제가 당신의 위치를 언제나 알 수 있었다면, 토벌 작전에 뛰어들 때에도, 전쟁터를 구를 때에도, 후작에게 쫓겨 다닐 때에도 그렇게 죽어버리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신이 매번 의뢰에 나갈 때마다 개처럼 기다리지도 않았겠죠.”

율리어스는 그녀를 기다릴 때마다 제 수명이 줄어가는 것을 느꼈다. 일리안은 늘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으니, 이따금씩 소식이 끊긴 그녀를 기다릴 때면 제가 먼저 죽어버리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전쟁터에 나간다는 이야길 내뱉는 일리안을 보며 가끔은 그녀를 방 안에 가두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는 한낱 먼지만큼도 되지 않는 목숨이 제게 있어선 생명줄이었고, 유일한 숨이었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일리안이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불편한 공기가 방을 메웠다.

“마법사를 불러오겠습니다. 기다리세요.”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율리어스가 방을 빠져나갔다. 혼자가 된 일리안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일리안은 죽음이 아쉽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라울이 생기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그녀가 늘 곁에 사람을 두지 않으려 한 것도, 자신이 그들을 책임질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일리안도 매번 죽을 위기에 처할 때마다, 끝내는 죽을 때가 되었을 때에도 생각났던 이가 있었다. 그게 율리어스였다.

율리어스가 자신에게 있어서 제법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처음 라울을 맡게 된 뒤부터였다. 누군가를 완전히 책임져야 할 입장이 되고서야 그녀는 자신이 어째서 율리어스를 종종 떠올렸는지 깨달았었다.

가당찮게도 자신은 그를 책임지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어렸던 일리안은 오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이를 거부했다. 어린 율리어스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거라고 제게 변명했지만, 사실 처음으로 가져보는 ‘나의 사람’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일리안이 움켜쥐고 있던 시트를 놓고서 일어섰다. 발목에서부터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무시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나의 사람.

그는 일리안이 가진 첫 번째 사람이었다. 아홉 살,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율리어스가 일리안만을 바라보고 따라다니게 된 그때부터였다. 그것을 일리안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율리어스는 아직도 알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일리안은 단지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율리어, 윽!”

문을 열고 나간 일리안이 코앞에 서 있는 등에 머리를 박았다. 누군가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눈을 찌푸린 그녀가 고개를 들자 율리어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법사를 부르러 간다는 것은 단지 자리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일리안, 왜 나온…….”

“율리어스, 잠깐.”

일리안이 어서 그의 말을 막았다. 그와 할 이야기는 많았지만,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발꿈치를 들었던 그녀는 제 키가 생각보다 훨씬 작자 결국 얼굴을 구기고 율리어스의 멱살을 붙잡아 당겼다.

당겨오는 힘에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붙잡힌 율리어스의 얼굴에 일리안이 입을 맞추었다. 찰나의 입맞춤이 지나가자 일리안이 서로의 코끝을 마주한 채로 말했다.

숨결이 몹시도 가까웠다.

“율리어스. 아니, 유리.”

일리안이 잠시 침을 삼켰다. 입술 끝이 미묘하게 떨린 것도 같았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죽었어.”

율리어스의 차갑게 식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단언에도 그는 상처받지 않았다. 그녀가 한번 죽었다는 사실에 일일이 상처받기에는, 율리어스는 이미 너무도 단단해져 있었다.

이제 와서 일리안이 그에게 더는 못 하겠다는 말을 하더라도 수긍할 수 있었다. 그는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일리안을 바라왔고, 또다시 홀로 그녀를 기다리게 되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일 터였다.

에릭 밀튼의 말대로 그가 어딘가 미쳐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율리어스의 눈동자를 직시하던 일리안이 입술을 움직였다. 율리어스는 그 순간 제 귀가 먹어버리길 바랐다.

“그러니 앞으로, 일리안 하인리히의 사람은 네가 유일해.”

그 순간 율리어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감정 기복이 적은 그의 눈에 확연한 놀람이 깃들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 사람은, 너뿐이라는 말이다.”

숨조차 멈추었다. 율리어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은, 코앞에 있는 일리안이 씩 웃은 뒤였다.

“일리안.”

“그래.”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일리안이 맞습니까.”

“아마도.”

율리어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일리안의 귓가를 먹먹히 채웠다.

“죽지 마세요.”

그는 구걸했다.

“다시는 죽지 않겠다고 하세요.”

“어차피, 죽을 때마다 네가 거슬려서 편하게 못 죽는데.”

“제 곁을 떠나지도 마세요.”

“어디 안 간다니까.”

그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구걸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절박했고, 또한 가난했다. 세상의 모든 부를 가졌음에도 일리안의 앞에 서면 그는 늘 비렁뱅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순간 율리어스의 고개가 조금 더 숙여졌다. 놀란 일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와락 감았다.

“눈, 감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눈을 감은 일리안에게도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몇 초가 흐르고서야 율리어스의 귓가에 대답이 들려왔다.

일부러, 감았는데.

그녀는 이번에도 몸을 던졌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아가리를 벌린 검은 강 속이었다. 검은 강이 그녀의 온몸을 덮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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