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11화 (111/123)

111. 약속이었잖아요

주변의 모든 시선이 넘어진 일리안에게로 모여들었다. 개중 몇몇은 귓속말을 속닥이며 저들끼리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 일리안을 거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겔트 백작이 손을 내밀었다. 투실한 턱살을 출렁이던 그가 어서 잡으라는 듯 제 손을 흔들었다.

“아이쿠, 내 그만 실수를. 어서 손잡으세요, 윈터 영애.”

일리안이 제 앞에 내밀어진 뚱뚱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비앙카가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결국 그 손을 붙잡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발목에서 느껴져 오는 욱신거리는 감각에 순간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원래 모습으로 표정을 뒤바꾼 일리안이 겔트 백작의 손을 꾹 누르며 일어섰다.

“헤이븐! 괜찮아요?”

“이런, 비앙카 벨레어 영애. 오랜만에 뵙습니다. 친부께서는 잘 지내시는지요?”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비앙카에게 다가갔지만, 비앙카는 이미 일리안에게 시선을 고정한 지 오래였다. 비앙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일리안의 무릎이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댔다.

무시당한 겔트 백작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자신이 그녀의 친부보다 작위가 낮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인내심 어린 얼굴로 한 발 더 다가갔다.

“윈터 영애가 다소 정숙하지 못한 구석이 있더군요. 무릇 그 나이에는 그런 법입니다, 하하.”

겔트 백작은 자신이 큰 무례를 용서라도 하는 듯 말했다. 일리안은 그저 그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 말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진 것은 비앙카였다. 그녀가 무어라 따지려는 순간, 일리안이 비앙카를 막아섰다. 비앙카를 뒤로한 채 겔트 백작을 마주한 일리안은 고요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거, 제가 실례했군요.”

“연세가 어리니 그러실 수도 있는 법입니다. 흐음, 그럼 두 분께서도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길.”

일리안의 나지막한 눈길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겔트 백작은 어서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걸음을 움직였다.

일리안이 그런 겔트 백작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비앙카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냥 보내시는 건가요? 헤이븐,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저런 사람쯤은…….”

“예. 저런 사람쯤은, 제 선에서도 가능합니다.”

“네?”

비앙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일리안이 뒤로 돌아 얼굴을 마주했다. 씩 웃은 그녀가 옆에 놓인 와인 한 잔을 들어 비앙카에게 건넸다.

“조금만 기다리시죠. 지금은 파티 중이 아닙니까.”

비앙카의 손에 와인 잔을 쥐여준 일리안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어서 다시 파티를 즐기러 가라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함께 걸어갔다.

비앙카는 괜찮은 건가, 싶으면서도 일리안의 부추김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겔트 백작은 잊히는 것만 같았다.

* * *

파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슬슬 해가 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빠져나갔다.

비앙카가 존경해 마지않는 세리나 대공과 아그네스 경도 이미 파티를 나간 지 오래였다. 그들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비앙카 또한 가문으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였을 때였다.

“헤이븐?”

비앙카의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일리안이 밖을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그녀가 향하는 방향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정문으로 가는 길이 아닌 구석에 숨겨진 복도로 나가는 길이었다. 비앙카가 서둘러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헤이븐, 어디 가요?”

“아, 비앙카.”

제 뒤에 바짝 붙은 비앙카에 일리안이 고개를 돌려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어딜 가는지는 대답해 주지 않던 일리안은, 조용히 복도로 나가 뒷문 앞에 섰다. 도대체 일리안이 언제 그곳을 알아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리안은 말없이 뒷문을 이용해 마차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각 가문의 문양이 찍힌 마차들을 하나씩 둘러보던 일리안이 멈춰 선 곳은, 바로 겔트 가문의 마차였다.

“헤, 헤이븐! 대체……!”

“쉬이.”

놀란 얼굴의 비앙카를 일리안이 다독였다. 비앙카가 조용해지자 히죽 웃은 일리안이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비앙카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심장이 벌컥거린 비앙카는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일리안의 손을 맞잡았다. 마차에 올라탄 일리안이 의자에 앉지 않은 탓에 비앙카 또한 바닥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마차 밖 창문에서는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비앙카는 도대체 그녀가 무얼 하려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가만히 바깥의 소음에 집중한 지 얼마가 지났을까.

“흐흠, 문을 열도록.”

겔트 백작의 목소리였다. 비앙카는 숨소리가 들릴까 싶어 한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의 시종이 문을 여는 순간 모든 게 들킬 터였다. 비앙카가 두려운 눈으로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일리안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달려 있었다.

달칵.

시종이 문을 열었다. 바깥의 불빛이 새어 들어오자 비앙카가 떨리는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당장 시종에게 붙잡혀 밖으로 내쫓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서 비앙카의 눈에 보인 장면은, 일리안이 겔트 백작의 목줄기를 단숨에 붙잡아 마차 안으로 던진 것이었다. 그녀는 철저하게도 겔트 백작의 입안으로 무언가를 처넣어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문을 열었던 시종은 문을 열고서 고개를 숙인 채 바로 문 뒤로 물러섰는지 문을 붙잡은 손밖에 보이지 않았다. 문득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닫겠습니다, 백작 각하.”

“으, 윽……!”

백작의 몸을 깔고 앉은 일리안이 한 손으로 그의 목줄기 어딘가를 눌렀다. 그러자 백작은 끄윽거리는 소리만 겨우 낼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이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마차의 문이 닫혔다. 곧이어 말이 우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비앙카, 반지 좀 받아주겠습니까?”

“네, 네?”

“일을 할 때에는 거슬려서요.”

일리안이 왼손을 내밀었다. 약지에는 자그마한 링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일리안은 한 손으로 겔트 백작의 양 손목을 결박하고 있는 탓에 혼자 반지를 빼낼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다소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에서 반지를 빼내었다.

링이 빠지자 일리안은 순식간에 백작의 뒷목을 잡고 들었다.

그 뚱뚱하기 짝이 없는 백작의 뒷목을 잡고 들어 올린 것이었다. 돼지를 대하는 것처럼 붙잡은 일리안이 겔트 백작의 몸을 창문가에 들이밀었다.

마차는 어느새 속도가 붙어 제법 빠르게 달리고 있는 채였다.

창문 너머로 목을 내민 겔트 백작의 입에 끼워져 있던 손수건이 바깥으로 떨어졌다.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된 그가 무어라 소리쳐 마차를 멈추려 했을 때였다.

일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제가 다소 정숙하지 못하여, 놓칠 수도 있겠습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겔트 백작의 몸이 창문 밖으로 좀 더 나갔다. 거의 골반 부근이 창문턱에 걸려 있었다.

겔트 백작은 제 뺨을 치는 차가운 바람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며 침을 삼켰다. 이 속도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가는 적어도 어디 한 곳이 부러질 터다. 그게 목이라도 되었다가는, 즉사였다.

문득 바깥에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백작 각하!”

일리안은 표정조차 바꾸지 않고 겔트 백작의 몸을 더욱 밀었다. 그는 이제 허벅지에 걸린 창문턱에 거의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제 몸이 무거워 더욱 살 떨리게 느껴졌다.

“업, 없다. 없다고!”

“예? 예에. 알겠습니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를 다시 당겨주지 않았다. 겔트 백작은 겨우 허벅지를 창문가에 걸친 채 말을 나누어야만 했다.

“백작 각하.”

“그, 그래! 제, 제발 이건 노, 놓고 이야기 합세. 으응?”

“아, 그럴까요?”

긍정의 표정을 지은 일리안이 단단히 붙잡은 그의 손목에서 다소 힘을 풀었다. 그의 몸이 조금 앞으로 떨어지자 겔트 백작이 눈물을 흘리며 버럭 소리 질렀다.

“노, 놓지 마! 놓지 마라! 절대 놓지 마!”

“변덕이 심하십니다, 백작.”

“미안하네. 내가 자, 잘못했어. 응? 이러지 말게.”

“하하. 아직 백작께서 상황을 잘 모르시나 봅니다. 말이 짧잖아요.”

각하, 제가 당신을 못 죽이리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일리안이 겔트 백작의 머리 위로 제 목을 들이밀었다. 그는 머리 위에서 곧장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처럼, 그 목소리가 너무도 평연하고 고요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슬슬 팔이 아프군요. 당신의 그 무거운 몸무게를 지탱하기에는 제 팔이 몹시도 가녀려서.”

“잘,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눈을 질끈 감은 겔트 백작이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은 마부가 힐끗 뒤를 바라봤지만, 대충 본 탓에 그의 눈에는 겔트 백작이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몸을 내밀며 크게 소리치는 걸로만 보였다.

또 이상한 것에 빠진 게지.

괜히 말을 붙였다 혼이 나기 싫은 마부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겔트 백작에게는 지옥 같은 순간이었다.

마차가 멈춰 설 때까지, 일리안은 그를 놔주지 않았다. 가끔 힘이 풀렸다며 손을 놓는 바람에 마차 밖으로 휩쓸릴 뻔한 겔트 백작의 바지가 다소 젖어 있었다.

마차가 멈추자 일리안이 겔트 백작을 마차 바닥으로 내버렸다. 힘이 풀린 그가 바닥에 쓰러지자 일리안은 제 겉옷을 당겨 고쳐 입으며 그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허벅지, 한동안 고생 좀 하시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회초리로 맞아보니, 제법 아프지 뭡니까.”

적어도 수십 분 동안 창문가에 계속해서 짓눌리고 비벼진 허벅지 부근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고 비앙카의 손을 잡은 채 마차 밖으로 나갔다.

마차에서 내린 비앙카가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겔트 백작 가문에서 멀리 떨어진 뒤였다.

“자, 비앙카. 우리도 이만 여기서 헤어져야겠습니다. 제 집은 저쪽이라서요.”

“헤이븐, 대체, 이건…….”

“그러게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선에서 처리가 가능하다고.

말갛게 웃은 일리안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비앙카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터덜터덜, 마차조차 없이 가문으로 돌아가던 비앙카는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제가 마차에서부터 내내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비앙카가 주먹을 들어 올려 살며시 폈다. 손바닥 위에는 작은 링 하나가 놓여 있었다.

* * *

개운한 얼굴의 일리안이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갔다. 이곳은 비앙카의 가문과는 가까웠지만 윈터 저택과는 제법 거리가 되었다. 뭐, 산책이라도 하면 되지. 커다란 일 하나를 처리한 기분이라 무엇을 해도 즐거웠다.

얼마 가지 않아 일리안은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밤에는 다소 어둡긴 하지만, 멀리 있는 윈터 저택으로 가려면 이 길이 가장 빨랐다. 그녀가 한참을 걸어가 골목길 중간에 다다랐을 때였다.

멀리서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리안은 느릿하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커다랗고 긴,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다. 왜인지 감각이 좋지 않았다. 기묘한 두려움에 휩싸인 일리안이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아, 저기. 저곳만 꺾으면 바로 번화가였지.

홀로 중얼거린 일리안이 그곳으로 곧장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감각은 뒤에 쏟아진 채였다. 이상했다. 뒤에서는, 발걸음 소리가 조금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리안은 급하게 코너를 돌았다. 여기. 여기만 돌면……!

코너를 돈 일리안이 우뚝 멈춰 섰다. 그곳엔 커다란 벽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문득 생각났다. 그녀가 이 골목길에 왔던 것은 이전 생에서, 그것도 20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는 것을.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머리가 차게 식었다. 쿵, 쿵. 느릿하게 뛰어대는 심장을 느낀 일리안이 제 발뒤꿈치에 숨겨져 있는 단검을 꺼내기 위해 손을 뒤로 돌렸다.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제 뒤에는 분명히 누군가가 있었다.

일리안이 뒤로 돌았다. 그 순간, 퍽. 일리안은 제 뒤에 있는 상대에 의해 뒤로 밀쳐졌다. 등 뒤로 나무 벽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일리안.”

익숙한 향기가 났다. 일리안은 삐걱거리는 목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 어깨 위에 올려진 뒷머리는 짙은 검은색이었다.

“왜, 뺐습니까.”

그가 속삭였다.

약속이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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