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10화 (110/123)

110. 링

오랜만에 윈터 저택 정원의 테이블에 앉은 일리안이 제 손을 주욱 내밀었다. 눈썹이 조금 구겨진 것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에는 반짝이는 링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텅 빈 벨벳 상자가 놓인 채였다.

설마, 이상한 장치라도 되어 있겠어.

손가락에 착용했을 때에는 섬세한 무늬가 들어간 반지가 되는 링이었다. 햇빛에 그것이 잠시 반짝거렸다. 꼭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해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리안은 제 손에 낀 반지를 잠시 빼냈다. 조금 더 자세히 훑어보기 위함이었다.

율리어스를 의심하는 것은 아닌데……. 그런데 어쩐지 자꾸만 그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일을 갈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산책을 할 때도 빼지 말아달라는 약속이.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곳에 위치 추적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건가.

그가 링의 겉면뿐만 아니라 안쪽까지 확인하려던 순간이었다. 정원 너머 윈터 저택의 대문으로 누군가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리안은 허둥지둥 링을 다시 손에 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이븐!”

“……비앙카?”

와인빛 드레스를 입은 비앙카가 반가운 얼굴로 정원에 들어섰다. 일이 바빠 최근에는 연락조차 하지 못했으니, 실로 오랜만에 보는 이였다.

“어쩐 일입니까?”

“뭐, 지나가는 길에요. 헤이븐이 워낙 바빠서 제가 먼저 찾지 않으면 얼굴도 보기 어렵잖아요?”

“……그게.”

“됐어요, 됐어. 목마른 사람이 먼저 찾아 나서야죠.”

오랜만에 찾아온 봄 날씨에 비앙카는 양산 하나를 손에 쥐고 있는 채였다. 일리안이 어서 그녀를 그늘진 테이블로 데려가려 했을 때였다.

“어머. 헤이븐, 미안하지만 오늘 여기 앉아서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어서요. 같이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는데. 괜찮아요?”

비앙카의 제안에 일리안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결국 일리안은 타피아로부터 겉옷을 받아 들었다. 그 언젠가 자신을 위해 여행마저 함께 가준 비앙카였으니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었다.

겉옷을 입은 일리안이 손을 뻗어 비앙카의 양산을 건네받았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비앙카의 머리 위로 양산을 씌워주며 에스코트를 하자 비앙카가 고개를 돌려 웃었다.

“설레네요.”

“……예?”

“아니요, 사실 영식들도 양산을 같이 쓰는 건 여성스럽다고 잘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양산까지 들어주시니까, 어쩐지…….”

팔이 자유로워진 비앙카가 뒤로 손을 뻗어 제 손을 맞잡았다. 사실, 일리안은 단지 불편해 보이는 드레스와 무거운 머리치장을 한 비앙카가 안쓰러워 양산이라도 들어주려 했을 따름이었다.

마차에 다다르자 일리안이 문을 열었다. 비앙카가 익숙한 몸짓으로 먼저 마차에 탑승하고, 일리안이 그 뒤를 따랐다.

“날씨가 제법 덥네요.”

“봄이 온 것 같긴 합니다. 정원사들이 곧 바빠지겠네요.”

“그럼 헤이븐도 곧 바빠지겠어요. 윈터 분재농원이 그렇게 잘 된다던데.”

비앙카가 그녀의 사업을 추켜세우자 일리안이 음, 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자신이 한 것이라곤 이제껏 숨겨져 있던 디버튼 분재원을 윈터 분재원으로 만들어 홍보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제가 잘한 게 아닙니다. 정원사들이 다들 실력이 뛰어나서 그런 거죠.”

“어머. 너무 겸손하면 재수 없다는 소리 들어요, 헤이븐.”

“그럼 조금만 인정할까요?”

일리안의 농담에 비앙카가 크게 웃었다. 그 뒤로도 둘 사이에는 이제껏 전해 듣지 못한 서로의 안부가 잠시 오갔다.

“지금 어디 가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사실, 제가 헤이븐을 반쯤 납치한 거잖아요.”

“비앙카에게 납치되는 건 제법 영광인데요.”

“그래요? 그럼 목적지도 모쪼록 마음에 들면 좋겠네요. 우리, 지금 연회장에 가고 있어요. 그것도 패러든 공작 가문의 기부 파티!”

비앙카가 자신감 있는 얼굴로 2장의 초대장을 꺼내 들었다. 2장 모두 장미 모양의 봉랍이 붙어 있었다. 일리안도 익히 아는 가문의 문장이었다.

그녀가 그렇게나 자신감 있는 얼굴을 한 이유는, 패러든 공작 가문의 기부 파티에 초대받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리하르트를 제외하고 단 2개밖에 없는 공작 가문 중 하나인 패러든 가문은 헤라프 제국에서 제법 입지가 컸다.

발신인은 있지만 수신인은 적혀 있지 않은 2장의 초대장을 바라보며, 일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접니까?”

그 질문에 비앙카가 마차 중앙에 놓인 물병을 들고 벌컥 들이켰다. 어딘지 성난 것 같은 손길답게 그녀는 물병을 텅, 소리가 나도록 내려두었다.

“아버지가 뭐라는 줄 아세요? ‘이번 패러든 가문 파티는 꼭 결혼 상대와 가도록 해라. 너도 이제 결혼할 나이지 않느냐.’라고 하지 뭐예요. 제 직업도 멋대로 정하더니 결혼도 멋대로 정하고 싶으신 거죠. 이번에도 잠자코 따랐다가는, 아주 제가 애를 언제 밸지도 결정하시겠더라고요.”

“그러면… 참석을 안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텐데요.”

일리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비앙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모두 이루길 바라지만, 아버지로부터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헤이븐, 이걸 보세요. 패러든 가문의 기부 파티라니까요. 여기 누가 오는지 아세요? 처음으로 여공작이 되셨던 세리나 대공, 그리고 전쟁 영웅으로 이름을 날린 아그네스 경도 오시죠. 뭐, 그 두 분 때문에 별 잡다한 귀족들까지 어떻게든 오려고 발악이지만요.”

세리나 대공과 아그네스 경은 비앙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두 여성이었다. 둘 모두 외국을 떠돌아다니기 바빠 국내에서는 거의 보지 못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헤이븐이 절 좀 도와주세요. 파트너가 없으면 참석이 안 된다니. 패러든 가문이 전통이 있다고 해서 이런 낡은 관습까지 따라 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부탁할게요.”

“저로 괜찮겠습니까? 사실, 급하게 따라 나오느라 옷도 챙기지 못했는데요.”

“괜히 어느 가문 영식을 데리고 갔다가 오해만 사는 것보다는 낫죠. 그리고 헤이븐, 잘 모르는 것 같은데 헤이븐이 잠옷을 입어도 웬만한 영식들보다 패션 센스가 나아요. 그리고, 응? 본판이 다르잖아.”

일리안이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어두운 남색 정장에는 붉은 계열의 체크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일리안 본인보다 그녀의 패션에 민감한 타피아가 직접 맞춰온 옷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분재농원에 관련해 고위 인사를 만나야 했던 터라 차려입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 일리안이 비앙카의 표를 받아 들었다.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멈춰 섰다.

비앙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런 그녀의 양어깨를 다정하게 감싼 일리안이 도로 비앙카를 앉혔다.

“그럼, 오늘 에스코트는 다른 여성분들이 부러워하실 정도로만 하겠습니다.”

“자꾸 그러면 저 진짜 설레요?”

일리안이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중성적인 얼굴의 그녀가 문을 열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손을 내밀자 어딘지 미묘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긴 출입구를 지나는 동안 일리안과 비앙카는 모두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그들에게는 왜인지 눈을 뗄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 * *

연회장에 들어선 비앙카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왔다는 말답게 곧바로 많은 이들을 만나고 다녀야만 했다. 가끔 비앙카가 일리안이 알고 지내면 좋을 법한 이들을 만날 때에는 그녀를 부르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혼자가 된 일리안이 주머니에 한 손을 꽂고 제 반대편 손을 들어보았다. 비앙카를 따라 사람을 만날 때에는 잊었지만 혼자가 되니 자꾸만 손에 낀 링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특별한 반지인가 봅니다.”

조금 낮은, 그리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일리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갈색 머리를 한 남성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요즘은 연인들끼리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반지가 유행이라더군요.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이라 마법사들이 고생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저처럼요.”

눈웃음을 짓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마법사, 거너입니다.”

“……헤이븐 윈터 남작입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손을 내미니 일리안도 그의 손을 마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손을 한 번 흔든 일리안이 어서 제 손을 빼내었다.

“그런데, 특별한 반지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섬세한 세공과 보석이 들어간 반지는 흔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흩뿌려진 보석이 꿈의 광물이라는 미스릴이더군요. 만드신 분이 공을 들이신 것 같습니다. 연인은, 아닌 것 같지만요.”

남자가 은근한 시선으로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연인이 아니라고 추측하는 자신의 말을 그녀가 동의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왜 연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왼손 약지가 아니니까요. 무릇 반지란, 구속의 상징이 아니겠습니까? 뭐, 이런 말을 하는 저도 그 마법 반지로 먹고살기는 합니다만…….”

일리안이 흥미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흥미로운 게 아니었다. 그가 요즘 유행한다는 ‘위치를 알려주는 마법 반지’를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반지를 만드는 마법사라고 하셨으면, 제 반지에 들어간 마법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혹시 모르고 착용하셨던 겁니까? 이런. 마법 물품은 우습게 보아선 안 됩니다. 상대가 음험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던 남자가 일리안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순순히 남자가 반지를 볼 수 있도록 제 손을 내밀었다. 율리어스가 어째서 그다지도 링에 집착했는지 알고 싶은 탓이었다.

남자가 반지를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에 비례해 남자의 미간도 좁아져 갔다.

“무슨… 특별한 기능이라도 있습니까.”

“네, 그러니까, 이건…….”

일리안도 그의 입술에 집중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이 들어간 것인가 싶은 탓이었다.

“아무 기능도 없습니다.”

“예?”

“아, 작은 마법이 걸려 있기는 하군요. 착용자의 손에 따라 크기가 달라져요. 하하, 대체 어떤 사람이 이 반지를 줬단 말입니까? 요즘 선물이라기엔 참 뒤떨어지는군요.”

아무 기능도 없다는 말에 일리안이 그에게서 손을 거둬 와 반지를 살폈다. 실내조명에 반사될 때마다 영롱하게 빛나는 링은 아름다웠지만, 그게 끝인 모양이었다.

“혹, 어느 사내가 줬습니까? 정말 센스가 없어도 너무 없어요. 윈터 영애, 제가 직접 반지를 만들어주겠습니다.”

그가 조그만 카드를 내밀었다. 그곳엔 거너라는 남자의 이름과 함께 마법사, 그리고 마법 반지 전문 제작소의 주소가 적혀져 있었다. 반지를 만드는 마법사라는 게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눈만 내려 카드에 적힌 글씨를 읽은 일리안이 제 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카드를 받을 의사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일리안이 무심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

일리안이 직접 반지를 빼냈다. 검지에 착용되어 있던 것이 왼손 약지로 들어가자 마법에 의해 크기가 변했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그녀가 내밀었다.

“반지는 이거 하나면 되었습니다.”

일할 때 불편해서요.

남자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사내로부터 저렇게 구는 여자를 누가 좋아하느냐는 투덜거림이 들렸다.

남자의 중얼거림을 들은 일리안이 약지에 낀 제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말이 맞았다. 자신도 평생 제가 혼자일 줄만 알았다.

반지가 구속의 상징이라고 했던가. 일리안이 낮게 웃으며 제 반지를 매만졌다. 구속. 그거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헤이븐 윈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린 일리안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는 뒤늦게 뒤로 돌았다.

“겔트… 백작?”

투실투실한 몸뚱어리. 욕심이 가득 담긴 것 같은 턱살. 몇 년 전까지 공작성에서 그녀를 가르치던, 그 겔트 백작이 맞았다.

일리안의 교육은 다소 흐지부지하게 끝났었다. 그 당시 율리어스가 그녀를 거부하기도 했을뿐더러, 겔트 백작에게 지친 일리안이 점차 수업에 나가지 않았던 탓이었다.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모든 수업을 끝마친 뒤이기도 했었다.

“여기서 만나다니, 반갑구나. 흠, 그런데 고작해야 남작일 뿐인 네가 패러든 가문엔 어찌 들어왔느냐?”

상대를 낮잡아 보는 겔트 백작의 말에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를 상대하는 것이 귀찮았다. 그저 빠르게 넘기고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우연히 연이 닿았습니다. 뭐, 남작이라고 해서 못 들어오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기야 하지. 하지만 넌 가난하지 않니. 패러든 가문도 많이 무너진 모양이구나. 쯧쯧.”

그녀는 2번 참았다. 누군가 자신을 깔아뭉개는 말을 하는 것쯤이야 몇 번이고 마주했던 인간 군상이었다. 여기서 화를 내보았자 피해를 입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기엔 윈터 가문의 위신도 걸려 있는 문제였다. 일리안은 눈을 끔뻑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패러든 가문의 기부 파티가 그리 대단하다기에 왔는데, 흠.”

일리안이 겔트 백작의 두터운 몸집을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물이, 여엉.”

겔트 백작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꼭 열 받은 주전자 같다고 생각한 일리안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이 정도 했으면 복수도 했으니 더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겔트 백작의 앞으로 손수건 하나가 떨어졌다.

“이런, 손수건이 떨어지다니.”

겔트 백작이 손수건을 줍는 척 허리를 숙이더니 지나가는 그녀의 발목 옷깃을 꽉 붙잡았다.

일리안의 몸이 앞으로 넘어갔다. 겔트 백작은 그녀가 완전히 넘어질 때까지 발목 옷깃을 놔주지 않아 낙법을 취할 수도 없었다. 연회장에서 일리안이 구르느라 낸 큰 소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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