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이건 약속입니다.
“저는 좋아요.”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일리안은 윈터 저택의 이들에게 공작성에서 함께 지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가장 먼저 대답한 것이 타피아였다.
“헤이븐 님, 전에 그러셨죠. 꼭 가지고 싶은 게 생기셨다고요.”
“…….”
“이번엔 가지셔야죠.”
타피아는 그녀가 자신들에게 그렇게 물어주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배려임을 알았다. 한낱 고용인에 불과한 저들을 가족으로 대해준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타피아의 동의에 일리안이 조금 더 주저하는 얼굴로 이야기를 꺼내었다.
“타피아, 그럼 윈터 저택은…….”
“쓸모가 없어지면 팔아야겠죠.”
“예전에는 그렇게 말렸었잖아. ……그때 타피아가 울어서 내가 얼마나 당황했었는데.”
저택을 팔아야 한다는 타피아의 단호한 주장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일리안이었다. 주전자를 든 타피아가 따뜻한 찻물을 다시금 채우며 덤덤히 말했다.
“돈에 밀려서 저택을 팔았으면, 저희는 어디로 갔을까요?”
“뭐?”
“헤이븐 님이 방 한 칸밖에 없는 허름한 집으로 가셨어도 따라갔을 거예요. 오히려 행복했을 수도 있죠. 빚에 밀려 급박하지도 않고, 음식도 조금 더 풍족하게 먹으면서요.”
타피아가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고 주전자를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하지만 헤이븐 님이 늘 귀족이길 바랐어요. 부족할 것 하나 없는 분이시니, 저처럼 평민이 되지 않길 소원했어요.”
“타피아.”
“어쩌면 제 욕심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세르앙 자작 부인께 무릎 꿇고 빌다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헤이븐 님은 자신이 가진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답니다.”
고요하게 제 의견을 말한 타피아는 라울에게 돌아갔다. 손수건을 들고서 라울의 입가를 닦아주어도 되겠냐는 타피아의 모습은 처음 보았던 스물두 살의 어리기만 했던 그녀가 아니었다.
당연히 타피아가 반대할 줄 알았던 일리안은 생각보다 순순히 동의하자 미간을 좁혔다. 잠자코 식사하던 라울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타퍄, 내가 할 수 있어요.”
“어머, 정말요? 제가 실수했네요. 손수건을 드릴까요?”
“응.”
타피아로부터 손수건을 받아 든 라울이 제 입가를 열심히 닦아댔다. 그런 라울을 지켜보던 일리안은 아이에게도 물어볼까 잠시 고민했다.
결국 입은 떼어지지 않았다. 율리어스와 함께 살겠느냐고 물어보면, 그를 좋아하는 아이는 분명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 터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야기는 일리안의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라울 님은요? 율리어스 공작 전하와 같이 살아도 괜찮으시겠어요?”
“율니? 율니! 율니 좋아요. 언제 살아요? 밤 몇 번 세면 돼요?”
라울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하자 타피아도 마주 웃었다. 타피아가 라울에게 밤 하나만 세어도 될지 모른다며 농담하듯 말했다.
일리안의 미간은 더더욱 찌푸려졌다.
율리어스의 함께 살자는 제안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함께 지내었다간 당연하게 그의 침대에서 함께 눈을 뜨고 감을 것 같았다.
연인으로서의 율리어스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분명 자신이 그보다 열다섯 살이나 많다는 사실은 그도, 자신도 너무 잘 알고 있을 텐데.
속된 말로, 순식간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웃음이 넘치는 따뜻한 분위기가 깨어진 것은 그때였다. 언제나 라울의 옆에서 웃음을 담당하던 디노가 갑작스레 잔을 떨어트린 것이었다.
“디노?”
“디노 경?”
디노가 고개를 숙인 채 부들부들 떨었다. 주먹을 꽉 쥔 디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붉게 젖어 있었다.
“저는 싫습니다!”
그날, 모두는 화를 내는 디노를 처음 보았다. 가끔씩은 그가 어떻게 기사가 되었나 싶을 정도로 남들에게 휘둘리고 다정한 품성을 지닌 이가 디노였다. 그랬던 그가 눈을 붉게 물들일 정도로 화를 낸 것이었다.
디노를 제외한 모두가 놀라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디노는 떨리는 음성으로 제 말을 이어갔다.
“헤, 헤이븐 님 나이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열일곱입니다, 열일곱! 그분께서는요? 이제 스물이시죠. 성인이시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 성인도 되지 않으신 분이… 함께 사시겠다니요!”
“어머, 디노 경. 헤이븐 님은 다음 주면 성인이 되시는걸요. 생일이시잖아요.”
타피아가 의아한 얼굴로 디노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 말에 디노가 할 말이 없어졌는지 우물거렸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저는… 싫습니다!”
결국 디노가 제 팔로 얼굴을 닦으며 식당을 뛰쳐나갔다. 일리안과 타피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디노 경이 사춘기가 온 걸까요? 반항?”
“타피아……. 디노도 이제 스물여덟이야.”
“어머, 그랬죠, 참.”
타피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능숙하게 라울의 식사를 도왔다. 일리안과 라울도 마저 식사를 하느라 바빴다. 안타깝게도, 울며 뛰쳐나간 디노의 뒤를 따라가는 이는 없었다.
* * *
“헤이븐 님, 어디 가세요?”
“응, 식사도 다했으니 디노 찾으러 가야지.”
디노가 울며 뛰쳐나갔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던 타피아가 뒷정리를 하다 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두세요, 괜찮을 거예요.”
“디노는 우는데 안 따라가면 서운해하잖아. ……에릭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둘이 은근히 합이 잘 맞았단 말이지.”
“음, 에릭 경이 있을 때는 확실히 편했죠. 아무튼 디노 경도 참, 너무 자주 울어요. 가끔은 라울 님이 더 어른 같다니까요?”
타피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화를 내는 디노는 자주 보기 힘들었지만, 눈물을 흘리는 디노는 제법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일리안보다 더 오랫동안 디노와 함께해 온 타피아는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식당을 나가는 일리안에게 타피아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래도 헤이븐 님이 직접 달래주면 엄청 좋아할 거예요. 그 사람, 원래 그러니까.”
일리안은 타피아에게 ‘……둘이 부부야?’라고 물으려다 도로 삼켰다.
라울은 타피아의 뒷정리를 돕겠다며 분주히 움직였다. 일리안이 홀로 디노의 뒤를 따라갔다.
디노는 꼭 자신이 서운함을 알리기라도 하려 했는지, 그가 향한 곳은 모두 문이 열려 있었다. 식당에서 홀로, 홀에서 현관으로, 현관에서 정원으로……. 따라오라는 의미 같았다.
디노가 열어두었던 문을 하나씩 닫으며 따라간 일리안은 정원 끄트머리에서 구겨져 있는 디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제가 직접 분재농원에서 받아와 심은 데이지 앞에 쭈그려 있는 채였다.
“디노.”
“…….”
“라울이 너 찾던데?”
“정말입니까?”
디노가 벌떡 일어났다. 라울이 먼저 사람을 찾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디노였으니 아마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을 터다.
일어선 디노가 뒤로 돈 순간, 그는 깨달았다. 라울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이야기 좀 하자.”
“……저는 할 이야기 없습니다.”
“이야기해 주면 라울이 너한테 한 말 전해준다.”
“정말요?”
라울의 이야기에는 자석처럼 반응하는 디노를 두고 일리안이 씩 웃었다. 디노는 결국 그녀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터덜터덜 다가갔다.
“왜 우냐. 기사는 울면 안 되지 않나?”
“아, 안 울었습니다. 조금 젖었을 뿐이지……. 그리고 기사는 울면 안 된다니요! 눈에 먼지가 들어가도 눈물은 납니다!”
“그래, 그래. 그래서 왜 울었는데?”
일어섰던 디노가 다시 쭈그려 앉았다. 그는 처량한 눈으로 바람결에 흔들리는 데이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리안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디노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일리안은 데이지를 곁눈질로 바라보다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오늘따라 별 몇 개가 제법 반짝이고 있었다.
“……저는, 헤이븐 님과 라울 님, 그리고 타피아. 이렇게 넷이서 함께 지내는 게 좋습니다.”
“그거야 다들 그렇지. 그런데 공작성에 간다고 해서 헤어지는 건 아니잖아.”
디노가 돌 1개를 주워 바닥을 긁었다. 손을 가만히 있는 게 어색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공작성에 들어가는 건 말입니다. 왜인지 헤이븐 님을 보내는 일 같습니다.”
“너……. 내가 비앙카나 타피아와 둘이 산다고 해도 이랬을 거냐?”
“예? 제가 왜요?”
“그럼 에릭이나 리트릭은?”
“헤이븐 님,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습니다만……. 저 말고 사내놈들은 다 늑대입니다. 늑대요!”
일리안은 디노의 그 반응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너, 내 아빠냐……?
아마도 디노에게 있어서 공작성에 들어가는 것은, 제 딸을 다른 놈에게 주는 것과도 같은 기분인 것 같았다. 일리안은 그제야 디노가 어째서 화를 내었는지 알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봐, 디노.”
“예.”
“나, 결혼하는 거 아닌데.”
“예?”
“율리어스랑 결혼하는 게 아니라고.”
일리안의 말에 디노 또한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빴는지 겨우 깨달은 듯했다. 그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일리안은 그런 디노를 바라보다 픽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근데.”
“……예.”
“내가 나중에 결혼하면.”
디노가 내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 줘.
일리안이 속삭였다. 디노는 그녀의 말에 눈시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머지않아 그의 턱을 타고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
제 팔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러 닦은 디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바라보며 웃던 일리안은 다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 * *
“그래서 말인데, 율리어스.”
며칠 뒤, 일리안은 먼저 율리어스를 찾아갔다. 점심이 막 지난 뒤라 집무실에 앉은 둘의 사이에는 찻잔 2개가 놓여 있었다.
율리어스의 찻잔은 사라가 매번 타주는 불면에 좋은 차였다. 자신의 불면을 신경 써달라는, 율리어스의 작은 심술 같기도 했다.
“함께 사는 건 역시 무리겠다.”
일리안이 긴장한 어투로 결론을 내렸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조금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직, 뭐, 이런 말 하긴 우습지만 내가 성인이 아니기도 하고……. 라울에게 더 집중하고 싶거든.”
디노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리안은 공작성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을 내렸다. 윈터 가문의 사람들 중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단순히 일리안 본인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리안이 평범한 연애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속도가 제법 빠르다는 것은 알았다.
너무 빠른 연애는 이르게 끝날 수도 있다.
그 언젠가 지나간 아는 용병 중 1명이 한 이야기였다. 고작 이런 것으로 겁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리안은 율리어스가 서운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조금쯤 딱딱하게 굳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율리어스를 풀어줄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래요.”
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소파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율리어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일리안.”
“……괜찮냐?”
“괜찮지 않을 건 뭡니까.”
그가 너무도 담담했다.
율리어스가 서운해하지 않아서, 괜한 싸움으로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기는 한데……. 어쩐지 너무 담담하니 일리안이 도리어 서운할 것 같았다. 눈을 찡그린 일리안이 요상한 제 마음을 다스리려 할 때였다.
“대신, 다른 제안을 하고 싶은데요.”
“……제안?”
일리안의 앞으로 정육면체의 손바닥만 한 상자가 내밀어졌다. 벨벳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상자에 율리어스가 손을 올리자 그것이 입을 열었다.
안에는 조그만 링이 들어 있었다. 세밀한 음각과 별빛이 뿌려진 듯 박힌 보석은 몹시도 고귀해 보였다.
“반지?”
일리안이 직접 그것을 꺼내 제 손가락에 넣었다. 조금 작은 것 같던 링은 검지에 들어가자 크기가 자동으로 맞춰졌다.
“팔목에 착용할 수도, 목걸이로 쓸 수도 있습니다. 손을 써야 하는 일이면 발목이나 목에 찰 수도 있겠죠.”
율리어스가 직접 손을 움직여 일리안의 손에서 링을 빼내었다.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감싼 율리어스는 링을 일리안의 팔목으로 밀어 넣었다. 링이 팔목에 부착되듯 감겨 들어갔다.
“그러니 일을 갈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산책을 가더라도.”
“…….”
“빼지 마세요.”
일리안은 자신이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율리어스가 서운해하지 않는 조건이었다.
이건, 약속입니다.
율리어스가 속삭였다. 링이 채워진 팔목이 율리어스의 커다란 손에 의해 한 번 더 감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