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8화 (108/123)

108. 사내는 고양이다

“머리를 잘라주었냐… 니. 그건, 왜 묻습니까.”

일리안이 짧아진 제 뒷머리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히말은 율리어스의 시선도 잊고 탐구자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법을 절단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매우 깔끔하고 날카롭게……. 인간 중에 이런 마법을 할 수 있는 자가 있단 말입니까? 아…….”

다소 격앙된 어조로 말을 내뱉던 히말이 문득 그녀의 곁에 있던 율리어스를 발견하고서 입을 닫았다. 인간 중에, 라고 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그녀의 곁에는 다른 누구도 비교하지 못할 마법사가 있지 않던가.

그러나 율리어스는 히말에게서 눈을 떼고 일리안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린 채였다. 그는 꼭 방금 전의 히말처럼 손을 들어 그녀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헤이븐 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 마법은 서로의 머리카락을 매개체로 행했습니다. 그런데 헤이븐 님의 머리는 마법으로 만드신 머리카락이더군요. 그러니 머리를 잘라내셨다면, 마법이 끊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나만 일어날 수 있었다?”

“예. 그런데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마법의 시전자는 저이기도 했을뿐더러 운명을 엮는 마법은, 그리 쉽게 잘라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 하지만 율리어스 공작 전하시라면 충분히 가능한…….”

히말의 말을 잠자코 듣던 율리어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다 나직이 말했다.

“나는 잘라낸 적이 없다.”

“예? 그럼 대체 누가 해냈단 말입니까?”

히말과 율리어스의 눈빛이 동시에 일리안을 향했다. 둘이 아무 말 없이 자신만 바라보자 당황한 그녀가 제 볼을 긁었다.

리하르트가 잘라주었단 말을 둘에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일리안은 하려던 말의 주제를 바꾸기로 결정 내렸다.

“그럼, 히말. 황자의 머리카락도 잘라내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오, 헤이븐 님. 황자 저하께서 못 일어나시는 것은 그분의 문제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해서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헤이븐 님은… 황자 저하 때문에 이제껏 일어나지 못하셨던 겁니다.”

흐음, 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히말은 황자가 신관과 의원으로부터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판정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어딘지 이상했다. 황자가 일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에도 히말에게서 슬퍼하는 기색은 없었다. 도리어 어딘지 기뻐 보였다.

“그러니……. 제가 헤이븐 님과 다시 적대적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러면 다행인데요, 아, 히말. 그쪽들이 대장간에 아직 치르지 않은 대금이 있더군요. 부디 어서 계산해 주길 바랍니다.”

“예? 아……. 잊고 있었습니다. 그쪽은 제 관할이 아니었던 터라. 곧 제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지위는 잃으셨으나 재산은 남아 있으시니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하게 황자의 일을 자신이 해결하려 드는 히말의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안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물론 그에 따라 율리어스의 눈동자도 그 손에 눈길을 주었다.

“히말, 언제까지 황자의 아래에 있을 겁니까? 이제 여긴 아무도 없을 텐데.”

히말은 조용히 웃었다. 그녀는 그 웃음만으로도 그가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란 걸 깨달았다.

“아무도 곁에 안 계시잖습니까. 그러니 제가 이곳에 있는 겁니다.”

“……히말.”

“제게 볼일은 모두 마치신 것 같군요. 저는 이만 황자 저하께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뿐이라 배웅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제 말만 빠르게 마친 히말이 어딘지 급한 걸음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일리안이 중얼거렸다.

“여기에 묶여 있기에는 너무 젊은데.”

“묶여 있는 게 아닙니다.”

“뭐?”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율리어스 또한 히말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율리어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왕자를 묶고 있는 겁니다.”

“대체 어째서?”

“글쎄요.”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일리안은 이내 되었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히말이 이곳에 남는 게 기쁘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앞서 걸어가는 일리안의 뒤를 율리어스가 따라갔다. 마차에 가기까지 내내 조용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율리어스는 툭 말을 걸어왔다.

“일리안.”

“어, 유리.”

“머리는 누가 잘라주었습니까?”

어?

잠깐 멈칫했던 일리안은 어색하지 않은 태도로 앞만 보고 걸어갔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대답을 고민하는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날, 당신을 불렀던 게 나라는 이야기는 무슨 소립니까.”

“그건, 그러니까…….”

일리안은 고민했다. 리하르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에게 해도 되는 건가. 그러나 답은 얼마 가지 않아 바로 나왔다.

그럴 수 없다.

세상의 인과율이라던가, 그런 복잡한 것은 몰랐다. 단지 자신이 했던 일을 모두 떠올린 율리어스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일리안은 자신이 기억도 나지 않는 백 번이 넘는 시간 동안 죽었다는 사실보다 율리어스가 내내 자살을 해왔다는 사실이 아팠으니, 그 또한 서로의 죽음에 아파할 것은 당연했다. 일리안은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제껏 그와 겪어왔던 무수한 고통들은 자신이 안 것으로도 값을 다했다.

“꿈을 꾸었어.”

“꿈이요.”

“네가… 나왔는데. 나를 안고 울더라.”

일리안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뒤돌지 않은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우는 너를 두고 갈 수가 있어야지. 율리어스, 원래 맨날 우는 아이보다 안 울던 녀석이 우는 게 더 마음 아프다.”

말을 마친 일리안이 뒤돌아 율리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율리어스가 한 발짝 다가섰다. 그의 얼굴은 모래사막처럼 텁텁하고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그것에 감싸인 열기가 누구보다 뜨겁다는 것을, 일리안은 알고 있었다.

“눈물은 얼마든지 흘릴 수 있어요.”

“…….”

“고작 우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보내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그늘졌다. 사막이라고 생각했던 율리어스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축축이 젖어 들어갔다. 표정 없는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의 눈물에 놀란 일리안이 성큼 다가섰다. 그녀가 손을 들어 율리어스의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유리, 너, 왜……! 울지 마라. 어? 난 우는 사람 달래는 건 쥐약이라니까.”

“일리안. 내게 당신을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까.”

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일리안이 되었다며 내저었던 질문을 율리어스는 여태껏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제 눈물을 닦아주느라 다가왔던 일리안의 어깨를 율리어스가 움켜쥐었다. 고작 눈물 따위에 흔들려 제 품 안으로 들어온 그녀를, 율리어스는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잡아챘다.

눈물 사이로 그가 웃었다.

“곤란할 때, 볼을 긁는 습관이 있어요.”

“…….”

“그 모습을 좋아했습니다.”

일리안은 그에게 자신을 좋아하느냐고 물었고,

그는 그녀의 작은 습관을 좋아했다고 대답했다.

* * *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는 자리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율리어스의 맞은편에 앉았던 일리안이 그의 옆에 앉았다.

일리안은 창가에 기대어 마차의 바깥을 바라보았고, 옆에 앉은 율리어스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둘 사이는 손으로 엮여 있었다. 일리안의 조그만 손이 그에게 꾹 잡혀 있는 채였다.

처음에는 분명히 맞잡았던 손인데,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그녀의 손은 율리어스에게 붙잡힌 포로처럼 완전히 묶여 있었다. 그것이 의문이었던 일리안이 맞잡은 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율리어스. 그런데 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냐. 네 마법이면 충분할 텐데.”

“도착하는 대로 집으로 돌아갈 거잖습니까.”

싫어요.

그는 가끔 아이처럼 굴었다. 그래서 율리어스가 다 컸는가 싶다가도, 그가 이렇게 굴 때면 어렸을 때의 그가 생각나 일리안은 웃음이 났다.

그러다 문득 일리안의 생각이 오늘 오후에 보았던 집무실 책상 위 찻잔에 이르렀다. 그것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어쩌다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다.

“유리, 너……. 아직도 불면을 앓고 있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집무실 책상 위 찻잔. 사라가 타주는 불면에 좋은 차였잖아. 그거, 내가 매일 가져다주던 거라 기억하고 있다. 넌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일리안의 말대로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차였다. 그러나 그녀가 불면을 고쳐주겠노라 약속한 뒤로 율리어스는 그녀가 가져다주는 차 한 잔을 곧장 모두 마셔 버리고는 했었다.

그래도 지금에 와서는 어느 정도 고쳐졌을 줄 알았는데.

그의 불면의 근원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일리안이 눈을 찌푸리고 그에게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잠을 못 자는 거냐. 꿈이라도 꾸어?”

“제가 언제 처음, 불면을 앓게 되었는지 압니까.”

“……글쎄. 너 분명히 나랑 지낼 때는 잘 잤지 않냐. 왜, 아주 어릴 때 말이야.”

일리안의 기억에 따르자면, 율리어스는 아홉 살부터 일리안과 함께 지내었던 그때에는 매번 순식간에 잠들었다. 아이가 잘 자는지 궁금했던 그녀가 매번 확인하고 잠들었으니 정확한 기억이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일리안이 의뢰를 위해 집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뭐?”

“그때가 처음이었죠.”

눈을 내리깐 율리어스는 제 손에 쥐어져 있는 일리안의 손을 들어 가만히 매만졌다. 엄지로 일리안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소중히 쓰다듬었다.

“그렇게 당신의 품을 알아버렸는데, 사라진 뒤 제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럼, 공작성으로 돌아간 뒤부터…….”

“그래서 당신을 불렀어요. 가이우스가 낸 의견이었죠. 약이 통하지 않으면 차라리 당신을 고용하라는.”

아홉 살부터 불면을 앓고 살아왔다는 율리어스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당연한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고용을 했더니 이제는 당신이 없으면 방에 들어갈 수가 없더군요. 그게 열다섯이었습니다.”

내내 눈을 내리깔고 있던 율리어스가 그녀를 바라본 것은 그때였다. 손을 붙잡은 그의 얼굴이 간절하다고 생각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니 일리안, 당신을 처음으로 내 침대에서 재웠으니 내가 불면을 앓을 수밖에요.”

일리안이 처음으로 그의 침대에서, 품에 안겨 잠을 잤던 것은 벌써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다시금 불면을 앓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무어라 입을 열어야 할지 몰라 일리안이 망설이고 있던 때였다. 불면의 근원이 자신이었다는 율리어스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에게서 그녀를 탓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그랬음을 덤덤히 털어두었을 뿐이었다. 아마도 일리안이 묻지 않았더라면 내색조차 하지 않았을 터였다.

“……약도 복용하는 것 같던데.”

“몬스터가 먹는 것도 약이라 부를 수 있다면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아?”

그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왔다. 손을 맞잡고 있던 채라 그의 상반신과 일리안의 팔이 맞닿았다.

“일리안. 내 불면을 낫게 하고 싶습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야…….”

어깨에 얼굴을 묻은 율리어스는 꼭 고양이 같았다. 아니, 사실 고양이라는 애칭을 붙이기에는 검은 표범에 가까웠지만…….

불면을 낫게 해주고 싶냐는 그의 질문이 은근했다. 기회를 물어버린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약해진 틈을 파고들었다.

“같이 살아요.”

“……뭐?”

“그러면 나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는 매혹적으로 굴지 않았다. 단지 일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표정 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다지도 들어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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