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7화 (107/123)

107. 고개 들어 고개 내려

율리어스와 일리안이 함께 탄 마차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공작성에서 황궁으로 가는 길은 크게 멀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1분 1초가 몇 년처럼 느껴졌다.

맞은편에 앉은 율리어스가 일리안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는 탓이었다.

그의 검은 눈에는 기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녀를 보고 싶은 사람처럼 집요한 눈길을 보내었다. 어차피 황궁으로 가는 길이었으니 돌아오는 길도 함께 올 텐데도 그러했다.

일리안은 그 눈길을 피하기 위해 부러 창문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잔잔한 바람과 함께 지나가는 사람들의 고즈넉한 풍경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문득 일리안이 그를 불렀다.

“유리.”

마차가 달리는 소리와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자신도 그들에게 동화되었다. 마차의 창문틀에 손을 얹고서 밖을 향해 조금 더 몸을 내밀자 일리안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일리안은 아직도 자신이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기에는 벅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제 더 이상 율리어스와 함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헷갈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를 좋아해?”

그의 행동들로 이제는 그가 제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일리안에게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말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일리안은 그와 조금쯤은 평범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 비록 그는 공작이었고, 자신은 한낱 남작 영애였지만 적어도 이전 삶보다는 평범하게 살 수 있을 터였다. 일리안의 뺨이 묘하게 달아올랐다.

마차의 분위기가,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는 소음들이, 머리를 간질이는 바람결이 마음을 녹였다. 대단한 대답을 바라지 않았기에 무겁게 질문하지 않았다.

일리안이 씩 웃었다.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율리어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흔이라는 인생을 살며 배우자가 없어 크게 외로웠던 적은 없었다. 그녀에게는 라울과 타파가 있었고, 그들 외에도 빈 옆자리들을 채워주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지나갔던 이들 중에서는 일리안에게 고백을 해오는 녀석들도 가끔 있었다. 모멸 차지는 않더라도 단호하게 그것들을 거절했던 일리안이었으니, 그녀가 평생을 배우자 없이 살아갔던 데에는 제 자신의 이유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일리안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좋아한다’라는 소리가 듣고 싶어질 줄은 몰랐다며 속으로 웃었다.

“일리안.”

마차 밖에서부터 들려오던 소음들이 뚝 끊기는 것 같았다. 자신만을 올곧이 바라보는 율리어스의 눈동자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일리안과 율리어스, 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오갔다. 율리어스는 머뭇거리지 않았지만 성급하게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가 입을 열었을 때였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춰 서고 마부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맞춰 율리어스의 입은 다시 닫혔다. 일리안이 먼저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린 탓이었다.

그녀가 다시 율리어스를 바라보았다. 직감적으로 대답을 할 분위기가 지나갔다는 것을 눈치챈 일리안이 다시금 웃었다. 그리곤 그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되었어, 대답은. 주책이었다.”

일리안이 먼저 마차 밖으로 나갔다. 율리어스는 가만히 눈을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 *

“죄송합니다. 황궁에서는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서 그 누구도 마차를 탈 수 없기 때문에, 걸어서 이동해 주셔야겠습니다.”

젊은 시종이 허리를 굽히며 설명하자 일리안은 되었다며 가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녀도 황성에 들어온 경험이라면 제법 많았다.

율리어스의 호위 용병으로서 일할 때, 종종 그와 함께 황궁을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던 덕택이다. 이제는 제법 달라진 입장으로 그의 옆에 나란히 서 황성에 들어서자 기분이 오묘했다.

“……이렇게 멀었나?”

한참을 걸어가던 일리안이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황자가 머무르는 제2 성은 이렇게까지 구석에 처박혀 있지 않았다.

황자는 많았지만 율리어스를 노렸던 그는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였다. 때문에 황궁에 들어서면 얼마 가지 않아 황자의 거처가 있었다. 그런데 일리안과 율리어스의 앞에서 그들을 안내하는 시종은 자꾸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입니다. 리하르트 공작 전하, 윈터 남작 각하.”

안내한 시종은 돌아가실 때 뵙겠다며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둘만 남게 된 일리안이 성에 들어가기 앞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랗고 투박한 성 하나를 돌벽이 둘러싸고 있는 공작성과는 달리, 황성은 여러 개의 조그만 성들을 높은 벽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성은 물론 황제의 것이었다.

사람들은 성들의 크기대로 이름을 붙여 불렀는데 황자는 대개 제2 성을 사용했다. 그러나 일리안과 율리어스가 서 있는 곳은 성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할 정도로 조그만 곳이었다.

“황자가…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어째서?”

“그는 선을 넘었으니까요.”

일리안이 손을 뻗어 제 앞에 있는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법한 조그만 문을 매만졌다. 차별을 두기 위해 돌벽으로 한 번 더 둘러싸인 다른 성들과는 달리 이곳은 사람의 키에 겨우 미칠 법한 울타리가 둘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가 황실과 리하르트 사이의 선을 넘었으니, 황제는 그를 잘라내야 했을 겁니다. 나와 전면전을 하기 싫다면.”

율리어스의 짧은 설명은 1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황자는 버려진 것이다. 제 아비로부터.

“제가 만약 황자의 손에 죽거나 미쳤더라면, 상황은 제법 달라졌을 겁니다. 황자는 이 나라의 전부를 가지고 싶어 했으니까.”

만약 율리어스가 황자의 손에 죽었더라면 황자는 황제보다도 더 높은 위상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리하르트를 따랐던 모든 귀족들을 제 아래에 두고서 황제가 황위를 물려줄 때까지 차근히 절차를 밟아냈더라면.

율리어스는 자신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무덤덤한 얼굴로 읊조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손을 잡아챘다.

그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유리.”

“불렀습니까.”

“내 앞에서 한 번 더 죽음을 말하면, 너.”

다시는 손 안 잡아준다.

어느새 율리어스의 커다란 손을 고쳐 쥔 일리안이 제 앞에 선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얼떨결에 따라 들어가게 된 율리어스는 뒤에서 그녀의 붉어진 귓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성, 이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스러울 정도로 작았던 그곳은 내부도 물론 협소했다. 아니, 그것보다 놀라운 것은 그래도 황성인 곳에 고용인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잠들어 있는 황자를 보기 위해 찾아왔던 일리안은 이대로 복도의 모든 문을 일일이 열어 확인해야 하나 싶어 눈을 찌푸렸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히말?”

율리어스의 손을 놓은 일리안이 단번에 그에게 달려갔다. 손이 놓아진 율리어스가 가만히 서서 제 손을 아쉬운 눈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는 것은 몰랐을 터다.

“헤이븐… 윈터 님.”

“진짜 히말이네.”

처음에는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히말이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짓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런 히말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가 자신에게 했던 짓은 분명히 잘못되었지만, 어쩐지 그를 미워할 수 없는 탓이었다. 머리가 만져진 히말이 놀라 움찔, 몸을 떨었다.

“고개 들어도 됩니다, 히말.”

“……제가 감히…….”

“뭐, 히말이 제게 못 할 짓을 하기는 했지만.”

다시금 몸을 떤 히말이 고개를 더더욱 숙였다. 그러자 일리안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는 히말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요.”

“예? 무슨…….”

“보아하니 히말 혼자 황자의 아래에 있기로 한 모양인데,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나랑은 적대 관계긴 하네요. 그럼 다음에 다시 적으로 만나면 그때는 고개 들지 맙시다. 예?”

히말은 도대체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눈만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라도 보면 종잡을 수라도 있을까 싶은 탓이었다.

그러나 눈을 들었을 때 보인 것은 그녀보다도 율리어스였다. 어깨 너머의 율리어스가 히말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히말이 허리를 더 숙였다.

“고개 들라니까.”

“그게, 저……. 죄송합니다만 공작 전하께서 허락을 해주셔야 들 수 있습니다.”

“율리어스?”

히말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일리안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율리어스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곤 히말의 머리를 다시금 쓰다듬었다.

“율리어스도 허락했습니다.”

“……정말 그러셨습니까?”

히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와 눈이 마주쳤다. 율리어스는 아무 말도 없이 히말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히말은 다시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일리안은 고개를 들라고 재촉하고, 율리어스는 말없이 무언의 압박을 넣으니 대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는 이게 편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을 하다 만 일리안이 번뜩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율리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히말의 머리에 올려두었던 손을 떼어내고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율리어스.”

“예.”

“유리.”

다가간 일리안은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부를 뿐이었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무엇을 하지 말라고, 무슨 짓을 했느냐고 캐묻지 않았다. 단지 눈을 마주칠 뿐이었다.

그러자 율리어스는 가만히 자신이 놓친 일리안의 손을 잡아챘다. 손을 잡은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히말, 허리 세워요.”

“저, 저는 이게 편한 것…….”

“시끄럽고, 고개 들어.”

겨우 히말이 고개를 들었다. 율리어스는 다행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조그만 손을 제 손에 모두 넣고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일리안이 먼저 히말을 향해 움직이자 율리어스는 가만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히말에게 다시금 다가온 그녀가 물었다.

“황자는 어디 있습니까?”

“……방에 계십니다. 헤이븐 님, 비록 그분이 황자의 권위를 모두 잃으셨으나 아직 전하시옵니다. 궁에는 벽에도 귀가 있으니 부디 언행에 주의해 주십시오.”

히말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질책했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닌 듯했다. 진심으로 그녀가 혹여 언행으로 인해 괜한 오해를 살까 싶은 눈치였다.

“황자 전하를 보러 오셨습니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셔서… 대화를 나눌 상태가 되지 않으십니다.”

곤란한 얼굴로 읊조리는 히말의 태도는 분명히 진실되었지만 어딘지 황자를 보여주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일리안은 그런 히말의 아리송한 태도를 느끼지 못했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아니, 히말을 보러 왔는데요.”

“……저를 말이십니까?”

“물론이죠. 마법의 시전자가 히말이었으니까.”

일리안이 알고 싶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자신과 황자의 몸은 운명이 엮여 들어갔으니 자신이 깨어났다면 당연히 그가 깨어나리라 생각했는데, 왜 자신만 일어날 수 있던 것인지.

그녀가 제 의문을 털어놓자 히말은 일리안의 얼굴을 처음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실례지만 머리를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어째서지.”

대답은 율리어스로부터 들려왔다. 당연히 일리안에게 물었던 히말은 당황해 눈을 끔뻑이며 덧붙였다.

“마법의 매개체, 를 머리카락… 으로 했기 때문에…….”

“만져봐도 좋아요, 히말.”

히말이 손을 떨며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율리어스의 시선이 탐탁지 않은 탓이었다.

조심스럽다 못해 간지러울 정도로 스쳤던 히말의 손이 떼어졌다. 손을 떼어낸 그가 제 손을 내려다보다 그녀에게 문득 물었다.

“혹, 누가 머리를 잘라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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