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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6화 (106/123)

106. 눈 감지 마세요.

리하르트 공작성은 주위가 모두 회색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흔히들 철옹성이라고 불렀다. 그 철옹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의 키보다 서너 배는 더 큰 대문을 지나쳐야만 했다.

그리고 일리안은 그 앞에 서 있었다.

“다녀오겠다고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는 아니었다고…….”

차마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를 다시 만날 생각은 있었지만 이런 용건으로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모두 라울 때문이었다.

“헤입븐, 나빠요!”

라울은 진심으로 화난 듯 그녀를 나무랐고, 일리안이 사과를 해도 저녁 시간 내내 그녀를 무시하며 태도를 일관했다. 용서를 한 것은 결국 일리안이 대장장이와의 계약서를 이행하겠다고 했을 때였다.

물론 라울은 계약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말의 분위기상 그것이 그녀가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뜻임을 알았기에 용서한 것이었다.

라울은 오늘 아침 일리안이 나가기 전까지도 허리에 손을 얹고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 약속을 꼭 지켜야 하노라고.

“헤이븐 님! 오랜만입니다!”

“아,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다들 잘 지냈어요?”

“물론이죠. 공작 전하를 만나러 오신 겁니까?”

리하르트 공작성의 대문을 지키는 경비병 중 1명이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일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 인사에 화답했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온 경비병의 질문에는 답할 수가 없었다. 물론 율리어스를 만나러 온 것은 맞았지만…….

사실 그를 만나기에 앞서 머뭇거리는 데에는, 물론 자신이 해야 하는 부탁 때문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도 분명히 있었다.

망할, 유리 얼굴을 대체 어떻게 보냐고.

애석하게도 그녀는 마흔이라는 세월을 포함하여 현재 열일곱 살에 이르기까지,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유리를 떠올린 일리안의 얼굴이 순간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분명 며칠 전 눈을 뜨고 일어나 율리어스의 얼굴을 대했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어딘지 조금 간지럽기는 했지만 무난히 넘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이 흐르고, 다시 율리어스의 얼굴을 보자니 쑥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를 보자마자 무어라 인사를 해야 할 지부터가 고민이었던 것이다.

“저, 헤이븐 님. 문 열어드리면 되겠습니까?”

“예? 아, 아. 예, 아니, 잠시만요. 아직…….”

일리안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율리어스에게도 연락이 갈 터이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일리안의 옆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왜 아직입니까.”

“유리, 너, 왜……?”

“날 보러온 게 아닙니까?”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던 일리안은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가 바로 옆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탓이었다.

당황한 일리안이 경비병들을 바라보았다. 율리어스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였다.

“아직, 문 열어달라고 안 했는데요.”

“그렇기는 한데, 헤이븐 님이 오시면 연락을 드려야 해서요. ……어차피 들어가실 것 아닙니까?”

일리안이 리하르트 공작성 앞을 서성인 지가 벌써 십여 분이 흘렀으니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일리안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지만.

제 말을 무시당하자 율리어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그는 한 걸음 멀어진 일리안에게 자신이 다시 다가서며 물었다.

“절 보러온 게 아닙니까.”

“뭐?”

“누굽니까.”

순간 일리안의 머릿속으로 리트릭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여기서 사실 리트릭을 보러왔다고 대답하면…….

그녀는 그 생각을 순식간에 취소했다. 리, 라고 말하게 위해 벌어진 일리안의 입술 모양을 본 율리어스의 표정이 사나워진 탓이었다.

“리, 가 없지, 그럴 리가 없지……. 너를 보러오긴 했는데.”

그 말에 율리어스의 얼굴이 다시 잠잠해졌다. 물론 지나가는 이가 본다면 한결같이 표정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일리안에게는 달랐다.

“일리안, 실례하겠습니다.”

일리안이 뭐?, 라고 말하려 했을 때였다. 율리어스의 손이 그녀를 향해 뻗어오더니 어느 순간 눈가를 모두 덮었다. 일리안의 시야가 깜깜히 변했다.

다음 순간에는 율리어스가 손을 떼어냈다. 그때는 이미 그들이 율리어스의 집무실로 옮겨간 뒤였다.

“조용한 곳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집무실이라니. 보통은 손님을 응접실로 데려갈 텐데.”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손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일리안이 그랬었죠.”

그것은 일리안이 율리어스가 아직 채 자라기 전이었을 때 해준 말이었다. 그녀는 그가 그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우스워 픽 웃으며 율리어스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종이 1장 흐트러지지 않고 정돈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러다 문득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 한 잔을 발견했다.

설마 아직도 불면증을 앓고 있는 건가. 일리안이 그것에 대해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제 심장이 아플 정도로 뛰어대지 않으면, 안아준다고 했지 않습니까. 일리안.”

“……유리?”

그녀의 허리에 팔이 둘러졌다. 제 뒤를 감싸온 율리어스에 그녀가 차에 손을 뻗으려던 것도 잊고서 딱딱하게 멈춰 섰다.

그러나 그의 말과는 달리 일리안은 제 머리 뒤에 바로 붙어온 율리어스의 가슴팍에서 익숙한 소음을 들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놀랍도록 빠르게 뛰어대고 있었다.

“그건, 제가 죽기 전까지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약속이 다른데.”

“일리안이 안아주지 않으면, 제가 안으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제는 당신이 안아줘야만 할 정도로 작지 않습니다.

일리안의 귓가가 간지러웠다. 그가 고개를 반쯤 숙여 귓가에 말하는 덕에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들려왔다.

그나마 잠잠해졌던 제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일리안은 자신이 뒤돌아 있는 것에 감사했다. 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율리어스, 오늘 네게 찾아온 건 할 말이 있어서야.”

“말씀하세요.”

그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율리어스는 그녀를 안은 그 자세 그대로 일리안의 이야기를 들을 모양이었다.

“황자를… 만나고 싶어서.”

“어째섭니까?”

“확인해야 할 것도 있고, 뭐, 부탁받은 것도 있고.”

“부탁이라면.”

그에게 대장간에서 있던 이야기를 말해줄까 고민하던 일리안은 이내 입을 열었다. 가위를 무상으로 받기로 했다던가, 하는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 채였다.

“그리드만, 씨라고……. 황궁에서 대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생계가 어려워 보이더라.”

“도와주겠다는 겁니까?”

“뭐, 그렇… 다고 할 수 있지.”

“다른 사내를 도와주기 위해, 제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율리어스는 고조 없이 덤덤하게 내뱉었지만,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일리안은 뜨끔했다. 사실 율리어스를 이용하는 게 맞기는 한 탓이었다.

일리안은 율리어스에게 조금이라도 변명을 하기 위해 다급히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의 품에 갇힌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율리어스를 마주해야만 했다.

“일리안. 내가 필요합니까?”

그녀는 그가 불쾌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뒤로 돌아 그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에는, 율리어스의 눈동자에 희미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고민하던 일리안이 순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어스는 그 순간 일리안의 허리를 안고 들어 집무실 책상 위에 앉혔다.

그러자 율리어스와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그가 일리안이 앉아 있는 곳 옆으로 손을 뻗어 내디디며 그녀를 제 팔 안에 가두었다.

“……율리어스?”

“저도 일리안이 필요해요.”

“뭐?”

율리어스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일리안은 숨을 쉬는 것조차 멈춘 채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다가오지 않았다. 어느 순간 멈추었고, 일리안과 코끝이 미묘하게 스쳤다. 율리어스가 말했다.

“입 맞추고 싶습니다.”

“유리, 그러니까,”

“제멋대로 하고 싶어요.”

하지 말까요.

율리어스는 웃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일리안이 끝끝내 고개를 저었더라면,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저 멀리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일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목을 움직여 침을 겨우 삼킨 그녀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악마에 홀린 것만 같았다.

일리안과 율리어스의 코끝이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부딪친 것은 코끝이 아니었다.

일리안의 머리 뒤로 율리어스의 손이 감싸왔다. 다소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저돌적인 율리어스의 태도에 일리안의 몸이 자꾸만 뒤로 물러서는 탓이었다.

손길은 다정했지만 일면으로는 단호했다. 그는 그녀가 물러서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율리어스, 잠깐만. 기다려. 율리어스!”

율리어스의 몸이 일리안을 향해 반쯤 기울여졌다. 도망칠 곳을 찾다 그의 손에 저지되자 결국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어깨를 짚고 입을 떼어냈다. 겨우 가빠진 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제멋대로, 하라고 했잖습니까.”

“뭐? 그건, 그러니까.”

“조금만 더요, 일리안.”

조금만.

율리어스는 꼭 응석을 부리는 것 같았다. 물론 다시 다가온 율리어스의 입맞춤은 그렇지 않았다. 일리안을 압도적으로 끌고 가는 그의 입맞춤은 제멋대로였지만, 어딘지 간절했다. 그는 처음으로 물을 마셔보는 사람처럼 일리안의 입술을 탐했다.

처음에는 그런 율리어스를 따라가기가 벅차 숨을 골라야 했던 일리안이었지만, 결국 그녀는 그를 받아들였다.

“일리안.”

입술을 떼어낸 율리어스가 나직이 일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앞서, 일리안의 입가에 묻은 묽은 액체를 빨아들였다. 그러고도 율리어스의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 마냥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입가 주위를 입 맞추었다. 일리안은 제 얼굴 위로 남는 간지러운 감각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눈 감지 마세요.”

그의 목소리에 일리안은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다시금 눈을 떴다. 바로 앞에서 제 얼굴을 내려다보는 율리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자꾸 이러시면, 다음에는 정말 제멋대로 할 겁니다.”

“뭐? 너, 인마, 그거……!”

“일리안이 가르쳐 준 거잖습니까.”

그렇게 말한 율리어스가 무심한 얼굴로 손을 들어 일리안의 입가를 닦아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일리안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뒷머리를 고정한 채였다. 그의 손이 워낙 커 일리안의 얼굴이 다 가려질 것 같았다.

일리안은 그가 입가를 닦아주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했던 말이 자신이 며칠 전 했던 말과 똑같기 때문이었다.

“율리어스.”

“……예.”

“자꾸 이러면, 다음에는 정말 못 안아준다.”

율리어스의 얼굴만 보자면 그의 말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저답지 않은 내용의 말들을 해댔다.

“당신이 가르쳐 주는 것이면 뭐든, 잘 배웠으니까요.”

“그건, 가르쳐 준 게 아니라 널 놀리려고 한 거지!”

“안타깝지만, 일리안.”

저는 지금 당신을 놀리는 게 아니어서요.

엄지로 일리안의 입가를 닦아내던 율리어스가 겨우 그것을 끝마쳤는지 손을 떼어냈다. 그렇게 지나가듯 선언한 율리어스는 뒷머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일순 그가 다시금 입을 맞추는 줄 알았던 일리안이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가온 것은 그의 입술이 아니라 목소리였다.

얼마 가지 않아 율리어스가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아무 일도 없던 듯 뒤돌아선 그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황성으로 가겠다고 명령을 내리는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일리안에게도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듣고도 일리안은 집무실 책상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율리어스가 한 말을 다시금 곱씹는 탓이었다.

“눈을 계속 감고 계시면, 다음에도.”

제멋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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