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5화 (105/123)

105. 나빠요

황자가 일어나지 못했다.

신문에는 깨어나지 않는 황자라는 타이틀과 함께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토벌에서 몬스터들의 급습을 받아 중상을 입은 황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일리안이나 율리어스를 공격했다는 이야기는 신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백성들을 위해 나간 토벌에서 중상을 입은 황자는 동정심을 살 법도 했지만, 기사는 만약 그가 일어나지 못한다면 계속 황자로 두어도 되는지에 대한 신랄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일리안이 살아온 헤라프 제국에는 황자를 제외하고도 많은 황위 계승자들이 있었고,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이 또한 차고 넘치는 탓이었다.

길거리에 서서 가만히 신문을 읽던 일리안을 디노와 라울은 서로 장난치며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녀가 신문을 다 읽고서 그것을 접어 들었을 때쯤이었다.

“……이런. 디노, 라울. 오래 기다렸지?”

“괜찬아요.”

“아닙니다, 헤이븐 님. 소식을 듣지 못하셨을 테니 궁금하셨을 겁니다.”

디노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던 듯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더듬다 겨우 그것을 내뱉었다.

“에릭 경이 말해줬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헤이븐 님을 그렇게 만드셨다고…….”

그의 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평생을 평민으로 살아온 디노로서는 아마도 이런 커다란 인물들과 엮이는 게 익숙하지 않을 터였다.

디노와 타피아 또한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 줄은 몰랐던 일리안이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는데.”

“타피아와 저는 이미 결심했습니다. 헤이븐 님이 헤라프 제국을 나가게 되면, 저희도 따라가겠다고요. 걱정 마시죠.”

“뭐?”

“같이 나갈 겁니다!”

일리안이 짧게 웃었다. 상대가 황자인 탓에 그들은 당연히 저들이 헤라프 제국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되면 나가서 뭘 할까?”

“헤이븐 님은 재능이 있으시니, 타국에 가도 잘 지내실 겁니다. 진심으로요.”

“내가 그래도 너희를 굶기지는 않지. 우리, 라울도!”

라울의 손을 잡고 있던 일리안이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갑작스레 시선이 높아진 라울이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서 맑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다 어느새 다다른 대장간에 디노가 먼저 달려갔다. 라울을 안고 있어 느려진 일리안 대신 조금이라도 먼저 가 길을 터놓기 위해서였다.

달려갔던 디노는 문 앞까지 가더니 갑작스레 뒤돌아 돌아왔다. 일리안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헤이븐 님, 저희가 조금 늦었나 봅니다……. 이미 문을 닫았어요.”

“분명 대장간 마감 시간은 아직일 텐데. 벌써 문을 닫았다고?”

확인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대장간에 다가갔던 일리안은 운영 종료라는 말이 붙어 있는 팻말에 흠, 하고 뒤돌았다.

“어쩔 수 없지. 걸음만 괜히 했네. 내일 다시 와야겠다.”

“약속을 따로 잡을까요?”

“잡으면 좋긴 한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 작정하고 피해 다니는 거면 약속도 안 잡아줄 테니까.”

디노와 말을 나눈 일리안이 결국 윈터 가문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였다.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중년 남성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윈터 남작 각하?”

일리안과 디노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일전에 가위를 부탁했던 그리드만이 문을 열고 반쯤 나와 있었다.

일리안이 단번에 그에게 다가가 따지려던 순간이었다. 그리드만이 문 안으로 쏙 몸을 집어넣었다.

“윈터 남작이 오셨네! 드디어 윈터 남작이 오셨단 말이야!”

문 안으로 들어갔던 그리드만이 다시금 나오더니 단숨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어서 들어오라는 듯 대장간의 문을 열어 일리안을 안내했다.

당연히 그리드만이 자신을 피해 다니리라 생각했던 일리안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계약 또한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리드만 씨.”

“예? 예에……. 윈터 남작 각하도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이죠. 저희 정원사들은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지만.”

일리안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그리드만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잠시 움찔거렸다.

“제가 그때 분명히 닷새 내에는 완성을 부탁한다고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들어보니 열흘이 넘게 걸렸다더군요. 그리고 받아온 가위들의 상태들은, 뭐.”

“윈터 남작님! 아니, 헤이븐 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하하, 아니요. 괜찮습니다. 말은 되었고 돈을 받아야겠는데요. 자아, 계약서를 한번 봅시다.”

그녀가 종이 1장을 품에서 꺼내 들었을 때였다.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간 그리드만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오더니, 그녀의 앞에 쿵 하고 내려두었다.

“……가위?”

“예, 보십시오. 계약했던 것보다 더 좋은 상품이라는 것, 알아보시겠지요? 날 부분은 합금을 썼고, 손잡이 부분에는 장시간 일하는 윈터 분재원의 정원사들을 위해 곡선을…….”

“아니, 설명은 되었습니다. 이걸 왜 이제 가져왔는지가 궁금한데요.”

“이, 이제 제 말도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리드만이 내민 가위들은 슬쩍 보기에도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토벌단에 들어가기 전부터 매달려야만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윈터 분재원에 이 가위들을 가져다주었으면 되었을 텐데, 왜 한사코 윈터 남작이 직접 와야 한다고 했던 걸까.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은 일리안에게 볼일이 있었다.

“떠나시기 전에 보셨을 겁니다. 저희 대장간이 황궁 기사단의 이번 토벌 무기들을 모두 담당했다는 것을요.”

“예,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 모든 대장장이들이 하던 일을 놓고 매달렸습니다. 문하생들도 마찬가지였습죠. 사람과 시간만 투자했겠습니까? 근방에서 구할 수 있는 미스릴이며 값비싼 재료들을 죄다 사들였습니다!”

“그런데요?”

침이 튈 정도로 열변을 토하던 그리드만의 어깨가 축 처졌다.

“구매자인 황자 전하께서 중상을 입고 쓰러지셨지요.”

“어차피 대금은 황궁에서 내주는 게 아닙니까?”

“저희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황궁 놈들이 저들은 모른다, 쓰러진 황자가 독단적으로 진행한 일이다. 그래서 돈은 내줄 수가 없다지 뭡니까? 황자 전하의 보좌관인지 뭔지 하는 놈은 연락도 되지 않고요.”

그리드만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자세히 보니, 그동안 마음고생을 제법 하기는 했는지 듬성듬성 난 수염과 함께 안색이 초췌했다.

“저희 대장간, 이대로 가다간 정말 망하게 생겼습니다. 여기 있는 100명의 대장장이들이 다 거리로 쫓겨나 구걸이나 하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요.”

“상황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날 왜 부릅니까, 나는 거기 상관도 없는데.”

일리안은 직감적으로 자칫하다간 이들과 엮일 수도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드만은 동정심을 위해서인지 벌써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뒤에도 윈터 분재원의 정원사들과 그 가족까지 합하자면 100명이 넘는 입들이 있었다.

그녀는 짐짓 모른 체하기로 결심했다.

“그게, 헤이븐 님이… 리하르트 가문과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리하르트 가문은 이번에 황궁 기사단과 공동으로 토벌 작전을 진행했고요. 그… 공작 전하시라면 황자 쪽 사람들과 인연이 닿으실지도 모르잖습니까? 아니, 아니지. 분명히 연줄이 있으실 겁니다!”

“거…….”

“한 번만요. 제발,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말만이라도 해주십시오!”

그리드만이 털썩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뒤에서 지켜보다 놀란 디노가 달려왔지만, 이미 그리드만의 뒤로 슬금슬금 나온 대장장이들과 문하생들이 우르르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일리안이 손가락으로 제 볼을 긁었다.

“이 전정 가위는 처음 계약한 것보다 훨씬 비싼 겁니다. 그런데 돈 더 안 받겠습니다. 거기다 저희 대장간이 살아 있는 한 정기적으로, 그리고 무상으로! 윈터 분재원의 전정 가위를 만들어줄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리드만이 붙잡은 바짓가랑이를 슬며시 털어내려 했던 일리안이 ‘무상’이라는 제안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곤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상으로요?”

“예, 예! 무상만 하겠습니까? 1달에 한 번! 방금 내드린 가위들의 수준으로 꼭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리드만은 당장 이 위기만 넘길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그는 그것을 문서상으로도 남기겠다며 제 뒤에 있는 문하생에게 종이와 펜을 받아와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적은 계약서를 곁눈질로 한번 훑어본 일리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리하르트 공작 전하가 쉬운 분은 아니시라, 잘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사,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그런 걸 가릴 때겠습니까?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말이라도……!”

“그럼, 기왕 무상으로 주는 거 이번 가위도 무상으로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치러야 할 잔금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해, 해드리겠습니다.”

“일이 잘되면 무상 계약은 진행하는 걸로, 안 되어도 이 가위는 주는 걸로. 물론 안 되어도 우리 잘못은 없습니다.”

어때?

그녀가 그리드만을 은근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드만은 그것이 악마가 속삭이는 것과 진배없다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계약이 대장간에 큰 손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우리, 말이 제법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일리안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제 바로 앞에 무릎 꿇은 그리드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손을 붙잡자 일리안이 힘을 줘 단번에 그리드만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리드만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일리안이 그의 무릎과 어깨를 툭툭 털어주었다.

“디노, 가위 챙겨.”

뒤에서 라울을 안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디노는 그녀의 말에 허둥지둥 아이를 내려놓고 가위 박스를 챙겨 들었다.

일리안이 뒤돌아 디노 대신 라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곤 아직 서 있는 그리드만을 고개만 돌려 바라보며 말했다.

“가위, 잘 받아갑니다.”

딸랑.

대장간의 문이 잠시 열렸다 닫혔다. 순식간에 사라진 일리안 일행에 그리드만이 멍하니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제가 방금 전까지 수기로 작성했던 계약서를 들기 위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윈터 분재원에 가위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약속이 적혀진 종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문하생 중 하나가 그녀가 그것을 가져갔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왜……. 벌써 망한 것 같지…….”

뒤에 서 있던 문하생들이 그리드만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드만이 헤이븐 윈터라는 사람의 사업 수완을 알게 되는 것은, 제법 나중의 일이었다.

* * *

가위 박스를 든 디노가 어쩐지 가벼워 보이는 일리안의 발걸음을 서둘러 따라왔다. 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헤이븐 님, 이거 괜찮은 겁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자 전하의 측근에 말을 전하라니……. 주제넘은 이야기지만 관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응? 황자 측근에 말이라니. 그게 무슨 이야기야, 디노.”

“예?”

“나는 황자의 측근이든, 율리어스에게든 말을 하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디노가 입을 허, 벌리고 멈춰 섰다. 문득 방금 전 그녀와 그리드만이 나누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일이 잘되면 무상 계약은 진행하는 걸로, 안 되어도 이 가위는 주는 걸로. 물론 안 되어도 우리 잘못은 없습니다.”

단 한 번도 그녀는 리하르트 공작 전하에게 말을 전해주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계약 조건은 ‘대장간이 다시 일어서면 무상 제공을 해주고, 안 되어도 이번 가위는 무료로’였던 것이다.

“하하. 저 대장간, 참 좋은 곳이네. 가위를 무료로 다 주고 말이야.”

일리안이 안고 있던 라울을 한 번 더 추슬러 올렸다. 가위를 무료로 얻어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디노는 잠시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어 우물쭈물거렸다. 물론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였다. 일리안의 품에 잠자코 안겨 있던 라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헤입븐, 나빠요.”

“어?”

“납빠요!”

일리안이 당황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라울은 눈썹을 대각선으로 그린 채 잔뜩 화를 내고 있었다.

세상살이에 때가 타버린 일리안과 그렇지 못한 아이 둘은 애석하게도 사업에 있어서 잘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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