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4화 (104/123)

104. 잠자는 황자님

라울은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껴안은 아이의 등을 느리게 두드리던 일리안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침 밖에서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가 깰까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못한 일리안이 직접 문으로 다가가 열었다.

“헤이븐 님, 요…….”

문 앞에 선 타피아에게 일리안이 손가락을 제 입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든 라울을 발견한 타피아 또한 재빠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타피아를 잠시 문 앞에 세워둔 일리안은 아이를 침대에 눕혔다. 눈이 발개진 라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서야 문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타피아, 무슨 일이야?”

“식사 준비가 끝났어요. 라울 님도 점심 식사를 하기 전이라 함께 준비해 두었는데……. 깨우지 않아도 될까요?”

“지금은 낮잠 좀 재우고, 이따가 내가 따로 먹이지 뭐. 나도 대충 먹고 돌아와야겠다.”

깨어난 라울이 자신을 찾을까 걱정된 일리안은 어서 식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덩달아 타피아의 걸음도 빨라져야만 했다.

“그동안 라울, 밥은 잘 먹은 거야?”

“그게……. 저와 디노 경이 옆에서 같이 있으면 잘 드시더라고요. 그런데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고개를 푹 숙이고 손도 대지 않으시지 뭐예요. 그다음부터는 절대 자리를 비우지 않았지만, 아마 별로 먹고 싶지 않으셨던 걸 거예요.”

식당에 도착한 일리안이 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짧은 한숨과 함께였다.

라울에게 미안해 쉽사리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일리안이 자꾸만 포크를 들었다 내려두며 라울의 방이 있는 방향을 힐끗거리자 보다 못한 타피아가 그녀의 손에 포크를 꾹 쥐여줬다.

“라울 님이 신경 쓰이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헤이븐 님이 먼저예요. 한동안 누워 계셨잖아요. 어서 식사하세요.”

“어, 그래야지…….”

“정 신경 쓰이시면, 한 번 더 식사를 준비할 테니 조금만 먹고 이따 라울 님이 식사하실 때 한 번 더 드세요. 지금은 스튜만 드시고 라울 님께 돌아가시고요.”

홀로 식사를 담당하는 타피아만 번거로워질 일이었다. 그러나 타피아는 자신은 괜찮다며 웃을 뿐이었다.

결국 일리안이 마지못해 스푼으로 고기 스튜를 떠먹으려 했을 때였다. 종이를 품에 안은 디노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디노 경? 무슨 일이에요?”

“저, 헤이븐 님……. 오래 누워 계셨던 터라 오늘까지는 더 쉬게 해드리고 싶은데, 정말 급한 사안이라서요. 하아, 분재원장이 오늘까지는 꼭 결재를 받아야 한다고…….”

디노 또한 다른 이들의 부추김에 떠밀려서 온 듯 차마 다가오진 못하고 멀찍이 서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타피아가 미간을 구겼다.

“디노 경, 바쁜 건 알겠지만 이제껏 아프셔서 치료받던 분이에요. 오늘까지 이러셔야겠어요?”

“저도, 저도 이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워 계신 동안 취소된 계약도 너무 많았고, 분재원장이, 으으……. 헤이븐 님,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건 다 괜찮으니 여기 사인 한 번만 해주세요.”

디노가 성큼성큼 다가와 식탁 위에 종이 몇 장을 늘어두었다. 화가 난 타피아가 한마디를 더 하려던 순간이었다.

“괜찮아, 타피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그런데 나 몸이 회복되기도 했고……. 내가 내 몫의 일을 못 한 건 사실이니까. 디노도 너무 미안해할 필요 없다?”

사람 좋은 디노와 타피아가 싸우는 일은 거의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인가 싶던 일리안이 어서 둘의 사이를 중재했다.

스푼을 내려둔 일리안은 먼저 디노가 내민 종이를 천천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디노의 말대로 모두 윈터 남작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었다.

“디노, 이거 서류가 더 있을 텐데? 어디 있어?”

“아, 여기 있습니다. 이거 말씀하신 거 맞으시죠?”

“어, 고마워. 그런데 확실히 보좌관을 1명 고용하긴 해야겠다. 이제 슬슬 디노가 모두 담당하기엔 벅차 보이네.”

디노는 자신이 모두 할 수 있다며 툴툴거렸지만 일리안은 대답하지 않고서 종이를 계속 읽어갈 뿐이었다. 가끔 타피아의 재촉에 종이를 들지 않은 손으로 고기 스튜를 떠먹기도 했다.

그러느라 제법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문득 식당 저 멀리 복도에서부터 누군가 우당탕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헤입븐. 헤입븐?”

일리안의 무릎에 무언가가 철썩 달라붙었다. 그녀가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콧물을 훌쩍이는 라울이 그곳에 있었다.

불안해할 아이를 위해 어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려 했던 일리안은 제 부족함에 이마를 두드렸다. 그리고선 종이를 내려두고 라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라울, 배는?”

라울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안의 무릎 위에 다소곳이 앉은 라울 앞에 타피아가 재빨리 아이용 식사를 준비해 왔다.

타피아의 보조와 함께 라울이 식사를 시작하고, 일리안은 아이를 무릎에 올려둔 채 디노가 가져다주는 서류들을 훑어 내렸다. 그러다 가끔 라울의 턱에 묻은 음식물을 엄지로 닦아주기도 했다.

“으음, 디노. 이건 내가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라울 님, 고기도 조금 드셔야죠. 입에 안 맞으세요?”

“제가 생각해도 헤이븐 님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긴 합니다. 분재원장도 그랬고요.”

“타퍄. 여기. 여기 묻었어요. 닦아주세요.”

곧 식탁 위는 일리안의 비즈니스와 라울의 식사로 복잡해졌다. 겨우 그 복잡함이 가셨을 때는, 라울의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였다.

라울은 식사가 끝나자 일리안의 품에 꼭 안겨 떨어지지 않았다. 타피아가 대신 안아주겠다고 손을 뻗어도 못 들은 척으로 일관했다.

디노는 결재만 한번 하면 된다고 했지만, 사실 일리안이 직접 움직여서 보고 판단해야 하는 서류들이 대부분이었다. 제 품에 안긴 라울을 내려다보던 일리안은 결국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라울, 같이 있을까?”

“응. 으응.”

“디노, 타피아. 나갈 준비 해줘. 지금 바로 분재원으로 가봐야겠다. 라울도 같이!”

라울을 껴안고 자리에서 일어선 일리안이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복도로 걸어갔다. 사실 라울이 제법 커 무거울 법도 한데, 그녀는 아이를 안은 팔을 추슬러 올리며 꼭 끌어안을 뿐이었다.

“헤이븐 님, 지금요? 이제 막 돌아오신 참인데…….”

“타피아, 걱정은 거기까지. 나 정말 멀쩡하거든.”

“헤, 헤이븐 님. 라울 님도 같이 데려가시겠다고요? 괜찮긴 하지만 가위나 사다리가 많아서 위험할 수도 있는데…….”

“내가 안고 있을 거야. 바쁘다, 어서 움직이자.”

* * *

윈터 분재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슬슬 해가 지려 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 바쁘게 일하는 중이었던 정원사들이 그녀의 도착에 모두 모여들었다.

가장 먼저 게릭이 그녀를 반겼다.

“헤이븐, 너! 아팠다면서?! 다 나은 거냐?!”

“예, 게릭 아저씨. 저 다 나았습니다. 아저씨랑 팔씨름해도 이길 것 같은데요?”

“하하, 그래. 말하는 것 보니 다 나았구만. 괜히 사람을 걱정시키고 말이야!”

다른 정원사들도 일리안의 등을 툭툭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게릭이 으응?, 하고 의아한 소리를 내었다.

“그런데 헤이븐, 너 고새 아들이 생긴 거냐?”

일리안의 품에 안겨 있던 라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수염이 잔뜩 난 게릭은 어린아이를 보는 게 즐거운지 제 얼굴을 확 들이밀었다.

“흑, 흐으…….”

“이봐, 게릭! 너 애를 울리면 어떡해?!”

“하하! 게릭이 얼마나 무섭게 생겼으면 얼굴만 보고도 아이가 우냐!”

게릭과 눈을 마주친 라울이 울자 그를 나무라는 것이 반, 놀리는 것이 반이었다. 머쓱해진 게릭은 제 뒷머리를 긁적이며 소심하게 라울에게 사과했다.

“거, 놀랐으면 미안하다. 응? 울지 마라.”

“아저씨, 얘가 에릭처럼 드센 줄 아나. 엄청 소심하다고요.”

“……아니, 에릭 어릴 때는 내가 이렇게 하면 좋아서 깔깔 웃었단 말이다. 지 엄마 품에 안겨서 내 얼굴 보고 얼마나 웃었는데!”

“에릭, 그 녀석도 보면 성격 특이하다니까. 우리 라울은 그런 거 안 좋아해요. 대신, 손가락 줘보세요.”

게릭이 일리안의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라울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평생을 정원 일을 하며 살아왔던 게릭의 손가락은 자잘한 흉터들이 많았는데, 라울이 강아지처럼 코를 내밀고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 조그만 손을 내밀어 게릭의 큼지막한 손가락을 꾹 잡았다.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재밌는지 방실방실 웃었다.

제 품에 안겨서 웃는 라울을 내려다보던 일리안이 아이가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잡힌 게릭은 천사처럼 웃는 라울이 신기한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쁘죠?”

“뭐, 뭐가 이렇게 귀엽……. 아이고, 좋아? 응? 좋냐? 내 손가락 너 다 가져라!”

라울이 웃는 모습에 울었던 일은 다 잊어버린 게릭이 그새 또 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라울이 눈이 마주쳐도 울지 않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그의 뺨에 짧게 뽀뽀를 남겼다.

라울의 뽀뽀를 받은 게릭이 멍한 얼굴로 제 뺨을 감싸 쥐었다.

“귀여워…….”

제가 더 자랑스러워진 일리안은 것 보라며 히죽 웃었다. 다른 정원사들은 게릭에게 부럽다며 야유를 보내었다.

“아, 제가 봐야 할 게 있다고 들었는데.”

“어어, 맞다. 그랬었지. 이리 좀 와봐라.”

일리안이 라울을 안은 채 따라가자 그녀의 뒤에서 다른 일을 처리하고 있던 디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헤이븐 님, 라울 님은 제가 안고 있을까요?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되었어, 디노. 볼일 보도록 해.”

디노가 대신 안아 들겠다는 말에 라울의 고개가 움츠러든 참이었다. 일리안은 픽 웃으며 라울의 머리를 매만지고는 게릭의 뒤를 따라갔다.

“이것 좀 봐라. 저번에 주문했던 가위란 말이야, 이게.”

“이게 뭡니까?”

일리안이 3차 지원군으로 떠나기 전에 주문하고 갔던 가위가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듯 가위는 모두 새것이었다.

“이 가위, 날 부분이 죄다 삐뚤빼뚤한 게 모두 다른 거 보이냐? 우리가 하루 이틀 일한 정원사들도 아니고, 이 정돈 한두 번 써보면 다 눈치채거든. 하아, 그래서 반품하려고 찾아갔더니.”

“윈터 남작이 재촉해서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그래. 네가 직접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도로 들고 가라 도리어 성화지 뭐냐. 원장님이 다녀와서 내가 한마디 하러 갔더니 만나주지도 않더구나.”

가위를 유심히 내려다보던 일리안은 라울을 품에서 내려두었다. 대신 아이의 한 손을 꼭 잡고서 나머지 손으로 가위를 들어 올렸다.

“급한 대로 잡화점에서 파는 기성품을 쓰고 있기는 한데……. 아니, 우리야 장비가 좋지 않아도 정원 일은 할 수 있다지만. 이게 다 얼마냐? 응? 돈이 아깝잖아.”

화가 난 게릭이 가위가 든 박스를 발로 퍽 찼다. 놀란 라울이 움찔거리자 게릭이 뒤늦게 아이에게 양손을 들고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뭐, 제가 가면 해결될 일이겠네요. 아직 대장간 문 닫을 시간 아니죠? 지금 가보겠습니다.”

“바로? 너 나은 지도 얼마 안 되었다면서. 무리하는 것 아니냐?”

“다 나았다니까요. 그리고 라울도 오랜만에 밖을 돌아다녀서 재밌어하고요.”

라울의 손을 꼭 잡은 일리안은 아이를 한번 내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라울이 웃자 그녀도 마주 씩 웃어 보였다.

게릭의 배웅과 함께 빠르게 분재농원을 나온 일리안은 대장간으로 가기 위해 어서 걸음을 옮겼다. 대장간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라울의 손을 잡고 산책하듯 걸어가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디노, 같이 가도 괜찮겠어? 바빠 보이던데.”

“두 분만 보냈다가 대장간에서 박대라도 당하시면 제가 큰일 납니다, 타피아한테요. 그리고 그렇게 바쁘지도 않고요.”

뒤따라오는 디노를 한번 바라본 일리안은 이내 다시 움직였다. 라울은 그녀의 손을 잡고 밖을 돌아다니는 것이 기쁜지 연신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때였다. 일리안의 허리쯤에 닿을 법한 소년이 그녀와 몸이 부딪쳤다. 소년은 별로 개의치 않은 듯 그녀를 힐끗 보고는 제 갈 길을 걸어갔다.

일리안의 뒤에서 소년의 해맑은 음성이 들려왔다.

“급보요, 급보! 신문 드릴까요?”

“얼마니?”

“1골드요.”

“신문이 뭐 그렇게 비싸? 참나.”

“어? 황자 전하 이야긴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러면 됐고요. 저 갑니다!”

그 이야기에 일리안이 지나친 소년을 뒤돌아보았다. 소년은 신문 여러 장을 옆구리에 끼고서 여기저기 신문을 팔아대기 바빴다.

소년에게 다가간 일리안이 그를 불러 세웠다. 영문도 모르고 갔던 길을 돌아가게 된 라울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신문 한 장. 여기, 1골드.”

소년은 일리안이 내미는 1골드와 라울을 잠시 번갈아 보다 신문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동전을 쥐여주었다.

“1골드가 아니라 50실버예요.”

“……아까는 1골드로 팔았지 않냐?”

“이 꼬맹이가 제 동생이랑 닮아서요. 서비스!”

유쾌하게 웃은 소년이 신문을 남겨두고 떠났다. 일리안은 신문을 펼치지도 않고 한 손으로 쥔 채 그 즉시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잠자는 황자님, 언제까지 잠들어 있단 말인가?」

신문의 일면을 꾸민 첫 번째 타이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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