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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1화 (101/123)
  • 101. 백스물네 번째

    율리어스의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일리안을 주시했다. 그녀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일리안을 안았던 손의 힘을 스르륵 풀었다. 옅게 떨려오는 율리어스의 손이 현실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맞습니까.”

    “아니라고 한다면?”

    “죽여 버릴 겁니다.”

    그리고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일리안이 그 말에 웃었다. 누워 있느라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가 율리어스의 팔을 간질였다. 그는 그 감각이 이제야 느껴지는 듯 물끄러미 제 팔 부분을 내려다보았다.

    한 차례 웃은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아래로 내려간 손을 붙잡았다. 이윽고 붙잡은 그의 손을 제 맥박이 뛰는 목으로 가져갔다.

    쿵, 쿵, 쿵…….

    제법 빠르게 뛰는 맥박이 율리어스의 손가락에 느껴졌다. 어느새 제 손을 떼어낸 율리어스가 그런 손가락을 한번 가볍게 쥐었다 폈다.

    “애석하게도 죽일 수는 없겠는데.”

    율리어스의 귓가로 한 번 더 일리안이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눈을 내리깔고 있던 율리어스가 문득 눈을 들었다.

    일리안과 눈을 마주친 그가 말했다.

    “일리안. 안아도 됩니까.”

    일리안이 그 부탁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감각한 얼굴인 주제에 그런 부탁을 해오는 율리어스가 낯설었다.

    “미안하지만, 안 돼.”

    “어째섭니까?”

    “네가 아직 어리잖냐. 여기는 침대고.”

    자신은 열일곱 살인 헤이븐 윈터의 몸을 한 일리안이 율리어스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율리어스가 다시 일리안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럼, 안아줘요.”

    “뭐?”

    “안아주세요, 일리안.”

    하?

    그렇게 말하며 팔을 벌리는 율리어스의 행동이 그냥 해본 말 같지는 않았다. 안아달라고 조르는 율리어스의 모습에 문득 처음 만났던 아홉 살 그때의 그 아이가 떠올랐다.

    하지만 어렸을 적 안아달라고 일리안을 졸랐던 유리와는 달리 제 앞에 있는 이는 이미 키가 190에 다다르고 있었다. 제가 안아보았자 안기는 형태가 될 터였다.

    그럼에도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팔을 붙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온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어깨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되었어?”

    눈을 감은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허리 부분을 붙잡았다.

    허리를 감아 안은 것도 아니고, 겨우 옷자락이나 붙잡는 그의 모습에 일리안이 픽 웃었다. 방금 전까지 환상이라며 와락 끌어안던 남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손을 내린 일리안이 애매하게 내려앉은 율리어스의 손을 붙잡고 대신 둘러주었다. 그 모습에 율리어스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안는 건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나만 안는 건 치사하잖아. 안 그러냐?”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던 율리어스는 다시 일리안의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이윽고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허리를 제 품으로 확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품 안에 갇히듯 안겨 버린 일리안의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치사합니다.”

    * * *

    일리안과 율리어스가 일어난 것은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고서였다. 밤늦은 새벽이었던 탓에 율리어스는 이곳에서 자라며 그녀를 붙잡았지만, 자신이 정신을 잃은 지 1주일이 넘었다는 사실을 들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탓이었다.

    일리안이 침대 아래로 발을 내뻗었다. 부드러운 카펫의 촉감이 일리안의 맨발에 닿아왔다.

    “신발도 신지 않고 어딜 가셨던 겁니까.”

    “누가 부르더라고.”

    바닥에 깔린 카펫은 부드러웠지만 다른 이들이 신발을 신고 밟아댄 것이었다. 그녀가 맨발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율리어스가 일리안을 안아 들었다.

    “부르다니, 누가요.”

    “리하르…, 아니, 율리어스. 걸어갈 수 있어.”

    “신발도 없잖습니까.”

    “공작성에서 발을 다칠 일은 없을걸.”

    사람이 걷는 웬만한 길에는 카펫이 깔려 있는 데다 공작성의 시종들이 얼마나 깨끗이 청소를 하는지는 일리안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율리어스는 그녀를 내려주지 않았다.

    “발을 다치고서 안는 건 늦습니다.”

    “……그래, 네 멋대로 해라.”

    그러나 일리안은 그 말을 한 것을 얼마 가지 않아 후회했다. 방문을 연 순간, 그 앞에서 걸어오던 가이우스, 리트릭 일행과 마주친 탓이었다.

    율리어스의 품에 안겨 있던 일리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리트릭이 눈을 크게 치떴다.

    “헤이븐?! 너, 어디, 아니, 정신은 차렸던 거야?!”

    “……어.”

    “제기랄, 그럼 어디 간다고 말을 했어야지! 내가 널 잃어버린 걸까 봐 얼마나 걱정을, 하…….”

    리트릭이 제 이마를 붙잡았다. 처음에는 놀라고, 두 번째는 잔뜩 성을 내던 리트릭은 이내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 붉어진 눈시울을 닦아냈다.

    “다행이다…….”

    그는 제 눈가가 붉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싫은지 결국 뒤돌았다. 곁에 있던 가이우스 또한 놀란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보다 율리어스와 일리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신을 차리셔서 다행입니다, 헤이븐 윈터 님.”

    다음 차례에 고개를 든 가이우스가 일리안의 눈을 뚜렷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조용히 일리안에게 말했다.

    “다음에 어딘가를 가실 때에는, 부디 말해주십시오.”

    “……예, 가이우스 씨.”

    그녀에게 확답을 들은 가이우스는 제 옆에 있는 리트릭의 등을 토닥였다. 마음이 놓여 우는 리트릭을 달래며 가이우스가 먼저 가보겠다는 눈짓을 보내왔다.

    “일리안, 어딜 가는 겁니까.”

    “이 복도의 끝.”

    당장 앞으로 쭉 가달라는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일리안에 율리어스는 묵묵히 걸음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다다른 복도의 끝에는 벽면에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율리어스가 그곳에 멈춰 서자 일리안이 그에게 자신을 내려달라 부탁했다.

    조심스레 카펫에 일리안을 내려주자, 그녀가 바닥에 있는 카펫을 걷어냈다. 율리어스가 그 순간 멈칫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일리안은 카펫 아래에 숨겨진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 일리안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손등을 감쌌다.

    “이곳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누가 불렀다니까. 여기로.”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손등을 감싸고 힘을 주자마자 깃털이라도 된 마냥 문이 열렸다. 그녀가 서슴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기억과는 달리 지하와 이어지는 계단에는 불이 꺼져 깜깜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내부에 율리어스가 눈을 움직였다.

    그러자 계단의 양옆으로 촛불이 켜졌다.

    “그래서, 부른 사람이 누굽니까.”

    “너.”

    벽을 짚은 일리안이 지하의 가장 바닥에 발을 뻗었다. 계단과는 달리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지하 공간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네가 나를 이곳으로 불렀어.”

    율리어스는 자신이 일리안을 이곳으로 불렀다는 말에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그가 손을 움직였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에 빛이 들어찼다.

    지하실에는 그 어떤 글씨도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지하실의 정중앙에는 오래된 기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법 물품으로 보이는 그것은 일리안도 한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마탑 경매장에서 율리어스가 사들였던 시간 재생기가 버려진 채 있었다. 일리안이 그것에 슬그머니 다가섰다.

    “유리.”

    “예.”

    손을 들어 시간 재생기를 매만지던 일리안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율리어스와 눈이 마주치자 물었다.

    “여기서 뭘 하려 한 거냐.”

    다른 때와는 달리 즉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딘가 머뭇거리던 율리어스가 일리안이 눈빛으로 대답을 촉구하자 결국 뱉어냈다.

    “시간을… 되돌리려 했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죽었지 않습니까. 내 눈앞에서.”

    일리안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율리어스는 그녀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당연한 것처럼 대답하는 율리어스가, 일리안은 어쩐지 밉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신을 되살리고 싶었습니다. 이 장치를 만든 이는 제 마나를 모두 쏟아부어 조금이라도 되돌렸으니, 내 마나라면 당신 하나쯤은 되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시간 재생기를 제 손으로 쿵 두드렸다. 그러자 텅, 하는 빈 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그런데 불가능하더군요.”

    “불가능했다고?”

    “기계는 처음부터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만든 이가 한 번 사용을 했을 때 그 쓰임새를 다 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을 되돌리는 것에 대한 힌트는 충분히 얻었으니, 그것으로 값어치는 되었죠.”

    비어 있던 시간 재생기가 옆으로 굴러갔다. 커다란 그것이 자리를 옮기자 바닥의 일부분을 차지한 조그만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글자들을 바라보던 일리안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힌트라면.”

    “제 마나를 모두 바쳐야 한다는 겁니다. 기회는 한 번밖에 되지 않겠지만, 실패하면 그것대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을 따라갈 수 있다면요.”

    다행스럽게도 글자들은 바닥을 전부 채우지도 못하고 끝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쯤, 당신이 헤이븐 윈터가 되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제야 글자들이 왜 중간에 끊어져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리하르트가 일리안의 운명을 건드렸고, 때문에 율리어스의 죽음이 그를 빗겨간 것이었다.

    일리안과 함께 글자들을 내려다보던 율리어스가 문득 말했다.

    “당신이 헤이븐 윈터의 몸으로 들어온 이유는, 제가 이미 한번 시간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리안이 놀란 얼굴로 율리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늘 자신이 죽기 직전에야 리하르트를 만나 기억을 되돌려 받았으니, 이번 생에는 아직 모든 기억이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모두 아는 것처럼 말했다.

    “다행입니다.”

    “……뭐가?”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아서, 그리고.”

    율리어스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바닥에 붙어 있던 글씨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떠오른 글자들은 잠시 바람결에 흩날리듯 살랑이다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바닥은 비어 있었다.

    “당신을 잃고 과거를 돌린 게 지금의 ‘내’가 아니어서.”

    “그게 무슨 말이냐?”

    “일리안. 내가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나는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기억도 하지 못하는 ‘나’를 내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율리어스는 자신이 몇 번이나 시간을 되돌렸는지 알지 못했다.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첫 번째의 ‘자신’도, 두 번째의 ‘자신’도, 그 뒤로도 쭉 실패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

    “아마 시간을 되돌렸을 즈음의 나는,”

    미쳐 있었을 겁니다.

    읊조리는 율리어스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미쳤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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