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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100화 (100/123)

100. 이대로 죽게 해주세요

“어? 환자분이 안 계시네요?”

아샤가 그 말을 내뱉은 뒤부터 리트릭의 시간은 지옥 같았다. 그는 허겁지겁 달려 렉스 단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해야 했고, 리트릭은 렉스 단장으로부터 엄청난 노성을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나서 그에게 떨어진 명령은 하나였다.

“율리어스 님에게는 네가 보고해!”

렉스 단장에게 깨지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리트릭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율리어스의 방에 찾아가야만 했다.

가는 도중에 차라리 가이우스라도 만나기를 바랐다. 그에게 보고하면 어떻게든 율리어스에게 대신 보고를 올려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이우스는 보이지 않았다. 리트릭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율리어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

들려오는 소리가 없었다. 리트릭은 침을 꿀꺽 삼키고 율리어스의 방문을 열었다.

그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깨워서라도 보고를 올려야 했다. 렉스 단장이 리트릭에게 율리어스로부터 자신이 자고 있다면 강제로라도 깨우라는 명령을 들었다고 한 탓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율리어스는 침대 한가운데에서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잠든 그의 흉부가 오르내리지 않아 리트릭은 잠시 그가 죽었나,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침대 바로 옆에 선 리트릭이 말했다.

“저, 율리어스 님.”

차마 말이 나오지 않던 리트릭은 차라리 잠든 상대에게 말하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에 입을 열었다.

“헤이븐이…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잠이 든 줄만 알았던 율리어스가 벌컥 일어섰다.

리트릭이 눈으로 잡을 수 없는 속도로 목줄기를 쥔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리트릭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율리어스에게 목을 잡혀 벽에 등을 부딪친 뒤였다.

“뭐라고 했나.”

“헤이븐 님이… 컥, 사라지셨습니다. 의, 의원은 분명히 잠들어 있다고, 허억…….”

리트릭이 말을 하던 도중 율리어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벽에 등을 붙인 채 스르르 주저앉은 리트릭은 겨우 쉬어지는 숨을 컥컥대며 거칠게 몰아쉬었다.

숨을 가다듬고서야 율리어스가 마법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트릭은 허둥지둥 일어서서 율리어스의 방을 뛰쳐나갔다.

그가 헤이븐의 방 앞에 다다랐을 때에는, 이미 방 안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그림자가 제 주인이 사라지는 걸 보지도 못했다, 라.”

“……면목 없습니다.”

홀로 방을 지킨다고 생각했던 리트릭이 놀란 얼굴로 헤이븐의 방 안을 바라보았다. 엉망이 된 방의 한가운데에 선 율리어스를 중심으로 무릎 꿇은 검은 제복의 사내들 수십 명이 있었다.

리트릭으로서는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리하르트 기사단 소속이 아닌 저들은 분명 율리어스의 직속인 그림자들일 터였다.

“복도를 걸어간 흔적은 있으나, 그걸 본 시종은 누구도 없다.”

율리어스가 고개를 들어 방의 가장자리에 서 있는 시종들을 둘러보았다. 한 번씩 눈길을 받은 시종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일리안이 일어나지 못한 지는 제법 되었지만 율리어스의 명령으로 그녀가 일어나면 언제든지 활동할 수 있도록 신발과 옷가지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침대 바로 아래에는 가벼운 슬리퍼 하나가 언제나 놓여 있었다. 슬리퍼는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조용히 움직인 율리어스가 슬리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 발로 일어나 갔는지, 누군가 데려갔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거군.”

차라리 제 발로 직접 일어나 사라진 것이라면 좋으련만, 아무도 본 이가 없어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율리어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바닥에 놓인 슬리퍼를 훑어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율리어스가 그림자의 허리에 달려 있던 검을 빼어 들었다. 제복을 입은 무리들에게 성큼 다가선 그가 차가운 검날로 제일 선두에 있던 사내의 턱을 들어 올렸다.

“네 몫의 일을 하지 못한다면, 네가 내 아래에 있을 이유는 무엇이지.”

시종들 사이로 히익,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들은 율리어스가 눈동자만 굴려 시종들을 바라보았다.

“명령한 것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머저리들을 고용한 적은 없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네놈이 나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따위는 알고 싶어 한 적이 없다. 그러니 네 목전에도 검이 닿고 싶은 게 아니라면, 소리 내지 마라.”

숨을 들이켠 시종이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다시금 제 앞에 무릎을 꿇은 검은 복장의 사내에게 시선을 돌린 율리어스가 말했다.

“네가 제 몫을 하지 못한다면 네 존재의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죽여주십시오.”

율리어스가 그 말에 칼을 쳐들었다. 당장이라도 그것이 사내의 목에 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을 막아선 것은 리트릭이었다.

“율리어스 님! 아니, 공작 전하!”

“…….”

“제가, 제가 보초를 잘못 섰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달려온 리트릭이 율리어스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제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았던 그림자, 에더리움이 눈을 뜨고 그런 리트릭을 바라보았다.

리트릭은 자신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 같아 울먹였다. 자신이 귀찮아하지 않고 헤이븐의 방 안을 확인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가이우스가 율리어스에게 달려왔다.

“율리어스 님, 노하신 것은 알겠으나 지금은 헤이븐 님의 위치를 파악해야 하지 않습니까. 처벌은 그 뒤에 내리십시오.”

탁, 타악…….

부드러운 카펫 위로 율리어스가 쥐고 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율리어스는 제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을 다시는 바라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가이우스가 그 뒤를 따랐다.

아직까지 울먹이며 율리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리트릭은 검게 그림자 진 율리어스의 손으로부터 무언가 뚝뚝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트릭이 제 앞에도 떨어진 액체를 손으로 훔쳤다. 그것은 율리어스의 피였다.

* * *

갑작스럽게 밤중에 호출된 리하르트 기사단 전원이 공작성 곳곳에 배치되어 사람 1명을 찾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강화된 기사단의 보안을 뚫고 아무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밖을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먼저 내부를 찾기로 한 탓이었다.

가이우스와 그림자들을 이끈 율리어스는 넓은 공작성 전부를 직접 걸어 찾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무감했지만 뒤를 따르는 이들이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로 급했다.

“……율리어스 님, 아무래도 공작성 안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수도에 수배령을 내리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율리어스는 제 집무실에 들렀다. 더 이상 찾아볼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율리어스에게 가이우스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방 안에 배치된 수십 명의 그림자들을 뚫고 나갔으니 공작성을 나가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가이우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던 율리어스는 가만히 집무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차 마실 시간인데요, 율리어스 님.”

창가에 다가선 율리어스가 커다란 창문 2개를 벌컥 열었다. 그러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율리어스가 창문 아래를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율리어스 님!”

그가 창틀 위로 올라섰다. 율리어스가 또다시 죽으려는 것인가 싶던 가이우스가 놀란 얼굴로 다급히 다가왔다.

열다섯 살 때와는 달리 키가 커버린 율리어스는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없이 창틀 아래로 투명한 계단을 만들어냈다.

율리어스가 조용히 그것을 밟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야, 잠을 자야 하니까요. 격한 운동을 하면 잠이 잘 오는데. 모르셨죠?”

“아아, 이쪽으로 나오기나 하세요. 어, 머리 부딪쳐요. 고개 숙이고. 그렇지.”

율리어스가 층계를 밟고 내려가는 것을 본 가이우스는 뒤에 있는 이들에게 손짓으로 명령했다. 침실로 향하라는 뜻이었다.

단숨에 침실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율리어스는 비어 있는 제 침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의 귓가로 자꾸만 일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는 거 보고 있을 테니까, 눈 감으세요.”

홀린 것처럼 율리어스가 침대로 향했다. 그의 귓가로 일리안이 속삭이는 것만 같아, 그는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일리안 하인리히의 목소리였지만 어느새 헤이븐 윈터의 목소리와 섞여 들렸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율리어스는 그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그만 자라고.”

이대로 눈을 감고 죽을 수 있다면 죽고 싶었다. 율리어스는 일어나지 않는 일리안을 바라보는 것에 지쳐 있었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에 공포를 느끼는 것도 이제는 그만하고 싶었다.

그냥, 이렇게 환상이라도 좋으니 목소리만 들으며 잠에 빠질 수 있다면.

그는 그만 쉬고 싶었다.

“다른 생각하는 거 눈에 다 보이는데. 자는 척이라도 할 거면 그 구겨진 미간부터 풀어보던가.”

누군가 카펫 위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문득 율리어스의 미간으로 따뜻한 손이 닿아왔다. 찌푸려진 미간이 둥글게 매만져지자 살며시 풀려갔다.

드디어 미쳐가는 건가.

환청에 그치지 않고 느껴지는 환상은 행복했지만 그만큼이나 불안했다. 오래도록 불면증을 앓았던 율리어스는 이렇게 꿈으로 다가온 그녀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환상은 제 기억을 따라 생겨났으니, 그의 기억 속 어딘가에 있는 일리안이 또 튀어나올 터였다. 그대로 죽음 같은 잠에 들려던 율리어스는 적어도 그녀가 죽는 모습만은 아니기를 바랐다.

“그런데, 율리어스. 지금은 재워줄 생각이 없는데.”

재워줄 생각이… 없어?

일리안 하인리히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율리어스의 머릿속을 한 문장이 관통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율리어스가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씩 웃고 있는 일리안이 서 있었다.

“나, 머리 잘랐는데. 그래도 자려고?”

일리안이 다시 짧아진 제 머리를 어색하게 매만지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영 이상한 모양이었다.

율리어스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이 확 당겨지자 일리안은 굴러떨어지듯 누워 있는 율리어스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품에 안긴 채 침대에 누운 일리안이 율리어스를 올려다보았다.

“……유리?”

“환각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누가 절 죽이기 위해 당신을 보냈다 해도 상관없어요.”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어깨를 감싸 꽉 끌어안았다. 이제껏 조심스러워하던 율리어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도 될 것처럼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실었다.

“도망가지 마요. 제발, 이대로 죽게 해줘요.”

“유리, 도망가지 않아.”

“더 이상 못 하겠습니다. 당신이 사라질까 봐 사람을 붙이고서도 빌어먹을 정도로 초조한 것도, 눈을 뜨지 않는 당신을 보면서 숨이 붙어 있는지 수십 번이고 확인하는 것도. 이제 모두 그만두고 싶습니다, 일리안…….”

그의 목소리가 비참할 정도로 고통에 차 있어서, 일리안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러니 이대로 죽게 해주세요. 이번 환각은, 제법 사실 같잖습니까.”

“…….”

“아니, 어쩌면 가장 비현실적인 환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그렇게 다정히 불러줄 리가 없으니. 먼저 다가와서 제 이마를 만져주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쫓아가야 하는 건 나였잖습니까.”

그 말에 일리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품속에서 눈을 뜬 그녀는 너무 좁아 잘 뻗어지지 않는 팔을 움직였다. 일리안의 조그만 손이 율리어스의 턱을 붙잡았다.

“율리어스.”

일리안이 붙잡은 율리어스의 고개를 조금 아래로 내렸다. 현실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듯 눈을 감은 율리어스의 얼굴이 보였다.

“나를 봐.”

그러자 율리어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디에도 가지 않아.”

나는 네 옆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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