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9화 (99/123)
  • 99. 머리카락, 잘라줄까?

    일리안은 리하르트의 말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알 수 있는 것은, 율리어스가 시간을 되돌렸다는 것뿐이었다.

    리하르트는 인간인 그녀가 모두 이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듯 의문스러운 일리안의 얼굴에도 잠잠했다. 대신 그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이해가 되지 않을 거다. 인간인 네가 드래곤인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지.]

    리하르트가 일리안의 어깨를 감쌌다. 손등을 잠시 스친 남자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일리안이 움찔거렸다.

    [네가 방금 본 건 율리어스의 첫 번째 시간이었다.]

    “첫 번째 시간이라는 건,”

    [다음은 두 번째.]

    일리안의 어깨를 감싼 리하르트가 앞을 주시했다. 그의 손길이 꼭 일리안이 앞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 같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을 고정했다.

    넓은 지하실은 또다시 사라지고 눈이 내리는 발로란 산이 튀어나왔다. 일리안은 그곳에서 서른 살의 자신이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세 번째.]

    이번에는 조금 더 빠르게 장면이 전환되었다. 율리어스가 리하르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까지 첫 번째, 두 번째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리안의 어깨를 감쌌던 리하르트는 무감각한 눈으로 읊조렸다. 이전보다 더 빨라진 장면들이었지만 그것은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그녀가 화살을 맞기 전까지 움직인 발자국의 수, 리하르트와 율리어스가 나눈 대화의 한 마디까지.

    [아흔여덟 번째.]

    “대체… 대체 얼마나 봐야 하는 겁니까? 이건 대체 언제 끝나는 겁니까.”

    더 이상 자신의 시체와 그것을 끌어안고 죽어가는 율리어스를 볼 수 없던 일리안이 고개를 모로 틀었다. 그러자 리하르트가 턱을 감싸 앞을 바라보게끔 만들었다.

    [백 번째에 이르렀을 때에는, ‘위’에 계시는 분들이 노하셨다. 시간이 흘러가지 못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방법을 고안해야 했다. 그 방법이 율리어스에게 기억을 돌려주는 거였지.]

    리하르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백한 번째의 시간이 돌아갔다. 설산에서 일리안이 죽는 것은 똑같았지만 달라진 것은 율리어스와 리하르트의 대화였다.

    “너는 네가 시간을 돌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테고 모든 운명은 어김없이 돌아갈 테지.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네 죽음은 헛되이 소모된다는 의미다.”

    “나는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율리어스의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답고 무감각한 얼굴은 조금도 인간 같지 않았지만, 그는 자꾸만 자신을 인간이라 칭했다.

    리하르트는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유일하게 일리안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거머쥘 수 있는 드래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따위에 집착하는 율리어스가,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이제껏 그저 손을 저어 그의 행동을 관망하던 리하르트와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네 기억을 돌려주겠다.”

    그제야 리하르트의 손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벽면의 글씨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리하르트의 손끝에서 시작된 검은 기운이 율리어스를 향해갔다.

    검은 기운이 율리어스의 몸을 감쌌다. 율리어스는 단지 눈을 한번 끔뻑일 뿐이었다.

    “이게 내 기억의 전부인가?”

    “그래. 이제야 알겠나. 네가 얼마나 허튼짓을 해왔는지.”

    리하르트가 율리어스에게 기억을 돌려준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율리어스의 명석한 머리로 자신이 해온 짓이 얼마나 허튼일이었는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리하르트는 무감한 눈으로 율리어스를 바라보다 이내 한 발짝 물러섰다. 그가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리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러나 벽면의 글씨는 백 번 동안 반복한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율리어스가 죽음을 바치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였다.

    “……이게 무슨 짓이지.”

    “이번이 백한 번째라고 했나.”

    율리어스가 제 품에 안긴 일리안의 입술을 엄지로 매만졌다. 눈을 감은 그녀의 모습이 평안해 보여, 율리어스는 녹아내릴 듯 웃었다.

    그는 이미 리하르트와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 죽은 일리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다음번엔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시간의 마법은 흐르기 시작한 뒤였다. 율리어스의 몸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는 드물게 다급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율리어스! 네 시간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을 텐데! 네가 하는 짓은 모두 의미가 없다!”

    “어째서?”

    “뭐?”

    그의 얼굴은 이미 모두 조각나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율리어스의 생각이 리하르트의 머릿속으로 전달되어 왔다.

    “다시 한번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인데, 어째서 의미가 없지?”

    제 몸이 모두 아스러지기 직전, 그가 남긴 말이었다.

    * * *

    그 뒤로 리하르트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위에 있는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율리어스를 멈추어야 했지만, 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탓이었다.

    반은 인간의 몸인 율리어스와는 달리 완전한 드래곤인 리하르트는 율법에 의해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때문에 리하르트는 율리어스와 다시 만났을 때 조금은 더 조급한 얼굴로 말했다.

    “네 기억을 돌려주겠다.”

    기억을 돌려준다는 것은 율리어스에게 그다지 기쁜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이제껏 겪었던 몸이 조각나는 기분을 모두 한 번에 겪게 된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였고,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일리안을 살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리하르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리하르트는 그에게 기억을 돌려주다 보면 언젠가는 그만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율리어스는 자신의 기억이 축적되어 고통이 몇십 배로 돌아옴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렸다. 그것이 멍청한 짓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왜…….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그가 시간을 돌린 지 백스물두 번째가 되었을 때였다. 리하르트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율리어스를 내려다보았다.

    기억을 받은 뒤 제 몸을 조각낼 준비를 하던 율리어스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무기질의 눈동자가 리하르트를 향했다.

    “백스물두 번째.”

    “뭐?”

    “네게 백스물두 번째 말했을 텐데.”

    율리어스는 리하르트와 대화를 나누는 잠시간의 시간조차도 아까운 듯 이미 제 몸을 조각내고 있었다. 자그마치 백스물두 번째 자살이었다.

    “나는 드래곤이 아니라.”

    “…….”

    “인간이라고 했다.”

    율리어스의 말이 끝나자 일리안의 시야가 바뀌었다. 오래도록 잠이 들었다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이 몽롱했던 일리안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그녀의 턱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리안은 뺨으로부터 느껴지는 차가운 액체에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내었다.

    자신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깨닫자 연이어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일리안이 멍한 얼굴로 눈 아래가 붉게 달아오를 때까지 제 눈물을 닦아냈다.

    [우리는 백스물두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서야 깨달았지. 더 이상 율리어스에게 기억을 돌려주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그래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일리안의 곁에 붙어 있던 리하르트는 그녀의 눈물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일리안을 힐끗 바라보다 제멋대로 말을 이어갔다.

    [그 방법이 바로, 네 죽음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일리안의 눈앞으로 익숙한 장면들이 흘러갔다. 타파의 죽음을 목격하고, 미하엘을 만나며, 라울을 먼저 보낸 뒤 강물에 빠져 죽었던 인생이었다.

    [네가 기억하고 있던 유일한 삶은 설산에서 죽지 않았을 터다.]

    “…….”

    [네 3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인생에서 ‘나’를 만나는 운명은 존재하지 않았고, 내가 네 영혼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네가 강물에 빠져 죽어야만 했으니 그리 만들었지.]

    유난히 검다고 생각했던 강물이었다. 왜인지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그제야 떠올랐다. 그것을 떠올리자 강물에 빠졌던 일이 방금 전 일어난 것처럼 기억이 생생히 스쳐 지나갔다.

    물을 잔뜩 먹으며 몸부림치던 일리안은 물속 저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본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그에게 손을 뻗으며 살려 달라고 속으로 외쳤다.

    리하르트는 그 강물 속에 있었다. 일리안은 리하르트가 자신의 죽음을 관망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명의 실을 짜내는 베틀이 말하기를, 일리안 하인리히의 실을 더 늘릴 수는 없으니 다른 실을 가져와 엮으라더군. 그러면 무사히 시간이 흘러갈 거라는 말과 함께. 그래서 우리는 네 죽음을 바쳤다.]

    일리안 하인리히는 죽어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지도 몰랐다.

    말을 마친 리하르트가 그제야 일리안의 어깨를 놓았다. 그가 잡았던 어깨가 욱신거리자 일리안이 제 어깨를 내려다봤다.

    상대의 눈물조차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리하르트는 완연한 드래곤이었다. 그는 제 힘이 상대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지 못했고, 때문에 일리안의 어깨를 붙잡아 멍들게 했다.

    그러나 드래곤인 리하르트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일리안이 나직이 말했다.

    “어째서 제게 이걸 보여주는 겁니까.”

    [죽음을 선택했더군.]

    리하르트가 입을 달싹였다.

    [네가 죽는다면 율리어스는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할 테고, 우리에게는 그걸 막아야 할 이유가 있다. 율리어스에게 기억을 돌려준다고 해서 선택이 바뀌지 않을 테니 인간인 네게 기억을 돌려주는 수밖에.]

    “……”

    [그럼 이제 율리어스를 사랑하는 너는, 다시는 죽을 수 없을 테니.]

    “그래서……. 율리어스 때와는 달리 제게는 일일이 장면을 보여주신 겁니까?”

    리하르트는 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가 이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일리안을 불러서까지 기억을 돌려주는 것은 오로지 흘러가지 않았던 시간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사무적인 얼굴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담겨 있지 않았다.

    율리어스에게는 그저 마법으로 기억을 돌려주는 것에 그쳤던 반면, 일리안에게는 어깨를 붙잡고 그녀와 그가 죽어간 장면을 모두 보여준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안이 제 어깨를 매만지던 손을 붙잡아 내리고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젖어들어 있었지만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당신들의 필요에 의해 모든 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같습니다만, 예, 뭐.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무엇이?]

    리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다란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무엇이 고맙다는 말이지? 우리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했을 뿐이고, 너와 율리어스는 우리의 안일함으로 백스물네 번을 죽어야만 했다. 만약 우리가 조금 더 빨리 판단을 했다면 적어도 죽는 횟수는 줄어들었을 테지. 그런데도 고맙다는 건가?]

    “……윗분들 이야기가 어려워서 잘 이해는 안 갑니다만, 어쨌든 그건 우리가 선택한 일이 아닙니까. 뭐,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율리어스가 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일리안이 씩 웃었다. 리하르트의 어깨에 손을 툭 얹은 그녀가 말했다.

    “녀석이 한 일은 곧 제 책임이기도 하죠. 과정이 어찌 되었든 유리가 바라는 대로 되었으니 고맙다고 하는 겁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문득 한 걸음 물러섰다. 자연스럽게 떼어진 일리안의 손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리하르트는 몸을 돌려 벽에 어지럽게 새겨진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홀로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도 율리어스가 이해되지 않아.]

    어지럽게 새겨진 글자들은 리하르트가 질리도록 봐왔던 것이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백 번이 넘는 시간 동안 율리어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위해 죽음을 바치는 것을.

    “그야, 당신은 드래곤이고 율리어스는 사람이잖습니까.”

    [헛소리군. 율리어스는 사람의 태에서 나왔지만 드래곤이다. 운명을 다루는 베틀로부터 들은 ‘확답’이야.]

    “그럼 키운 쪽이 사람이라 그런가 봅니다. 그러다 보면 몸은 드래곤이어도 마음은 사람일 수도 있지.”

    일리안이 짓궂게 웃으며 그거 반은 내가 키웠거든, 하고 덧붙였다. 리하르트는 그런 일리안의 웃음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리하르트.”

    [불렀는가.]

    “그 말은 결국 당신도 사람 같은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깨를 으쓱인 일리안이 이내 뒤돌았다. 그리곤 어딘지 바쁜 기색으로 제 뒤에 선 리하르트를 힐끗 바라보고서 말했다.

    “제가 지금 율리어스가 좀 보고 싶어져서. 이만 가봐야겠는데요.”

    [가보도록 해.]

    고개를 잠시 돌렸을 때 마주친 리하르트의 눈이 언뜻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면 일리안의 착각이었을까. 다시 앞을 바라본 일리안이 걸어갔다.

    가만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눈에 문득 길어진 일리안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봐, 일리안. 그 머리, 잘라줄까? 아니. 이상한 게 묻어 있어서 말이야.]

    “이상한 것?”

    리하르트의 말에 일리안이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안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잘라낸 머리카락은 바닥으로 떨어지다 이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는 그녀에게 있어 필요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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