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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8화 (98/123)

98. 그러므로 시간은, 단 한 번만 흐른다.

눈을 감고 있던 일리안은 누군가 자꾸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이불 밖으로 손을 내저었다. 이제 막 잠이 들었던 참인데, 부르는 목소리가 귀찮기 짝이 없었다.

[일리안. 이봐, 일리안.]

결국 일리안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넓은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막 해가 졌는지 방 안은 어둡기는 했지만 밤 같진 않았다. 촛불 하나가 구석에서 유약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긴 윈터 저택이 아닌데.

이전에 공작성에서 사용했던 방이라는 것을 떠올린 일리안은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그제야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황자를 죽이기 위해 단검으로 제 배를 찔렀다. 배 속을 파고들었던 검의 감각이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이 났다.

뭐야. 안 죽었잖아.

당연히 자신이 죽으리라 생각했던 일리안은 설마 황자도 살아 있는 건가 싶어 얼굴을 구겼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을 불러올 생각이었다.

[일리안.]

침대에 앉아 있던 일리안이 멈칫했다.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일리안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방 바깥, 저 멀리서부터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맨발로 자리에서 일어선 일리안이 실내용 슬리퍼조차 신지 않고 이끌리듯 목소리를 찾아갔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바깥에는 사람 1명 다니지 않았다.

지나가는 이가 있으면 율리어스의 안전을 확인할 생각이었던 일리안은 결국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복도의 끝에 도달한 일리안은 바닥에 있는 정사각형의 나무틀 사이로 보이는 계단을 확인하고서 멈칫했다.

그 옆으로 바닥에 깔린 카펫의 일부분이 뒤집어져 있었는데, 비스듬하게 걸쳐진 나무 뚜껑을 닫고, 복도에 깔린 카펫을 덮으면 분명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공작성에 제법 자주 왔던 일리안 또한 처음 보는 지하 계단의 존재에 의문을 가졌다.

[일리안, 어서.]

“그만 좀 불러라. 안 그래도 들어갈 거라고.”

또다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귀찮은 기색으로 대꾸한 일리안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벽면에는 방금 전 누군가 들어오기라도 했던 듯 오래되지 않은 촛불이 일정한 거리로 불붙어 있었다.

“부른 놈, 너 귀신이면 나랑 천국 가는 거다. 사람이면 바로 죽는 거고.”

현재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일리안은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후비며 중얼거렸다.

지하의 가장 바닥에 도착하자 그녀를 기다렸던 듯 빈 공간에 불이 들어왔다. 촛불이 아닌 마법으로 켜진 불이었다.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니, 애석하게 되었군.]

“……아무리 봐도 귀신같은데?”

누군가 뒤돌아 서 있었다. 그의 머리가 바닥까지 닿아 있는 걸 보던 일리안은 그가 영락없이 귀신이라고 생각했다.

귀신같다는 일리안의 말에 상대가 몸을 돌렸다. 남자가 일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무감각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율리어스?”

[리하르트다.]

머리가 검은 남자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율리어스와 닮아 있었다. 율리어스가 머리를 기르거나 여자였다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거라 생각했던 일리안의 상상과 꼭 닮아 있었다.

“율리어스도 리하르트긴 한데.”

[그렇겠지. 내 이름을 토대로 지었으니.]

사내가 제 이름을 토대로 지었다는 말에 문득 이야기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블랙 드래곤의 이름을 본떠 지었다는 리하르트 가문의 이야기.

“드래곤이라고?”

[처음 보나?]

“거, 그럼 드래곤을 어디서 봅니까? 그게 파충류도 아니고.”

남자는 제 종족이 파충류에 비견되었다는 사실이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일리안이 하하, 하고 사람 좋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농담도 못 하겠네. 누구한테 묻든 다 처음 봤다고 할 겁니다.”

[…….]

“그건 그렇고, 그쪽은 여기서 사는 사람? 율리어스도 알고 있나? 월세는 다달이 내는 편?”

농담도 못 하겠다는 제 말과는 달리 일리안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자꾸만 농을 쳤다. 남자는 그런 일리안을 보고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남자가 제 손가락을 부딪쳤다. 사방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던 실내가 단번에 밝아진 것은 그때였다.

“……이게 뭐냐.”

[이곳은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 율리어스의 공간이다.]

바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의미 모를 고대어들이 흰 글씨로 수놓아져 있었고, 그것은 바닥을 넘어 벽까지 이어졌다.

그 마법진이 주는 분위기는 경외라기보다는 어딘지 소름을 돋게 했다. 일리안이 멈칫거리는 사이 자신을 리하르트라 소개한 남자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건, 대체……. 율리어스가 뭘 하려 한 겁니까?”

리하르트는 일리안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져왔다.

[시간이 몇 번 흐른다고 생각하나, 일리안?]

당연히 한 번이라고 대답하려던 일리안은 문득 자신이 시간을 거슬러 헤이븐 윈터의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리하르트가 그 대답을 대신했다.

[한 번이다.]

“예?”

[시간은 단 한 번만 흐른다.]

남자의 말은 정답이었다. 모든 사람은 시간이 단 한 번만 흐른다 생각하고 살며, 그 때문에 하루하루가 소중한 게 아니던가.

그러나 일리안만이 그것에 해당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몸으로 2번의 시간을 살았던 일리안이 답하지 못하자 리하르트가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못했어.]

“그… 게,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겠지. 너 말고도 시간이 단 한 번만 흐르지 못한 이가 있으니까.]

“누굽니까?”

[율리어스.]

사내의 목소리가 물에서 말하는 것처럼 먹먹했다. 일리안은 멍한 얼굴로 리하르트를 쳐다봤다.

[자, 일리안. 다녀오도록 해.]

리하르트의 목소리에서 물방울이 보글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 일리안의 등을 밀었다. 일리안은 그 순간 시야가 까맣게 물들며 정신을 잃었다.

* * *

흰 눈이 내리는 설산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그곳이 일리안에게 있어서 익숙한 발로란 산임을 깨달았다.

산 아래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중앙에는 고작 서른은 되었을까 싶은 젊은 일리안 하인리히가 눈 덮인 설산을 내달리고 있었다.

“저년이다. 저년만 죽이면 돼!”

“뭐, 뭐가 저리 날쌔?!”

일리안의 반대편에는 사내들이 많았다. 활이나 검을 손에 쥔 이들은 일리안을 바짝 뒤쫓았고, 어느 순간 그녀의 어깨에 화살 하나가 꽂혀들었다.

화살에 맞아 비틀거리는 일리안의 반대쪽 어깨에도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그것을 맞은 일리안이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황자 전하, 여자가 죽었습니다.”

일리안이 쓰러지자 나무 사이에서 황자가 걸어왔다. 불쾌한 얼굴의 그가 화살을 쏜 사내의 멱살을 잡았다.

“분명 죽이지 말고 포획하라 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너무 날렵해서 화살이 아니면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럼 덫이라도 놓으란 말이다. 산짐승을 처음 잡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황자가 되었다는 듯 남자의 멱살을 탁 놓았다. 그리고는 다가가 쓰러진 일리안의 시신을 발로 툭툭 차 뒤집었다.

“이걸로 그 괴물이 죽을지 모르겠어.”

이내 황자는 시체에 관심을 끄고서 자리를 떠났다. 여자를 붙잡아 협박하려는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공격은 되었을 터였다.

황자가 자리를 떠나자 찾아온 무리가 있었다. 말을 탄 율리어스가 하얗게 쌓인 눈 사이로 보이는 시체에 천천히 다가갔다.

말에서 내린 그가 시체를 안아 들었다.

[이제 잘 보도록 해. 율리어스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발로란 산의 허공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일리안은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고개를 돌렸다는 감각은 있었지만 실제로 고개가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영혼처럼 홀로 허공에 떠 있었다. 허공에 있는 일리안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장면이 뒤바뀌었다.

이제 일리안이 있는 곳은 정신을 잃기 전 리하르트와 서 있던 지하실이었다. 그녀가 그곳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중앙에 제 시체를 안고서 바닥에 앉은 율리어스였다.

[율리어스가 이곳에서 뭘 하려 했느냐고 물었나.]

연이어 리하르트가 일리안의 머릿속으로 제 목소리를 전했다. 일리안은 멍한 눈으로 율리어스를 허공에서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는 죽어도 당신을 놓아줄 수가 없어요, 일리안.”

메마른 얼굴의 율리어스가 일리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자 마법진에 쓰여 있던 글자들이 어지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움직이려 해? 건방지구나.”

눈을 감았던 율리어스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어지럽게 움직이던 글자들이 잠시 멈추었을 때였다. 주저앉은 율리어스의 앞에 리하르트가 서 있었다.

“시간을 움직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나?”

“드래곤의 심장을 바치겠다는 뜻이지.”

리하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드래곤인 리하르트로서는 심장을 바치겠다는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실패한다면?”

그의 질문에 율리어스가 웃었다.

“죽을 수 있어 다행이군.”

리하르트는 그런 율리어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얼굴을 다소 구겼다. 그러나 곧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리하르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시간을 돌린다고 해서, 네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

“너는 네가 시간을 돌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테고 모든 운명은 어김없이 돌아갈 테지. 무슨 뜻인지 알겠나. 네 죽음은 헛되이 소모된다는 의미다.”

시간을 돌린다고 해서,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율리어스는 리하르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을 보던 리하르트가 하, 하고 웃었다.

“모든 걸 알고도 그런 선택을 하겠다는 거군. 대체 어째서?”

그 질문에는 율리어스가 고개를 숙였다. 제 품에 안긴 일리안의 시체를 보던 율리어스가 손에 힘을 주어 꽉 끌어안았다.

“나는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뭐?”

“사람이라고 했다.”

리하르트가 이제 되었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러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멈추었던 글씨들이 다시 어지럽게 움직이며 마법이 시작되었다.

율리어스의 몸이 조각나 찢어졌다. 일리안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의 몸이 조각나 분해되자 그 사이로 붉게 빛나는 심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그것을 씹어 삼켰다.

[이제 알겠나.]

일리안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때에는 다시 리하르트와 둘밖에 없던 지하 공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생생하게 움직이던 마법진은 다시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저게, 무슨……. 난 저렇게 죽은 적이 없습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황자가 부리는 사람들에 의해 화살을 맞고 죽은 적은 없었다. 일리안은 그것이 리하르트가 보여주는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단 한 번만 흐르지.]

“……왜 자꾸 같은 말을 하십니까?”

[몇 날, 몇 시, 몇 분, 몇 초. 실리트의 딸인 세레타는 매번 같은 시각에 남자와 도망을 치다 죽었고, 타파는 가을이 되기 전에 의자에 앉아 숨이 멎었지.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려도 모두 똑같이 흘러갔으니, 우리는 시간이 단 한 번만 흐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일리안은 숨을 잠시 멈췄다.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직접 전해져 왔다.

몇 번이고 시간을 돌려도 바뀌지 않아.

그러니 시간은 한 번만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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