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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7화 (97/123)
  • 97. 환자분?

    리트릭의 부탁과는 달리, 일리안은 10일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그에 초조해진 것은 리트릭 뿐만이 아니었다.

    쿵!

    일리안의 방문 앞을 지키던 리트릭이 때 아닌 소음에 화들짝 놀라 움찔거렸다. 소음의 근원지가 방 안이었던 탓에 리트릭은 급하게 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율리어스 님.”

    “내 마나로 살아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도무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건강은 모두 회복되셨는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날과는 달리 오전부터 일리안을 찾아온 율리어스는 의원과 함께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마다 한 번씩 있는 의원의 진찰 날 중 하루인 탓이었다.

    율리어스의 손아귀에 멱살을 잡힌 왜소한 의원이 벌벌 떨었다. 두려워하는 의원과는 달리 율리어스의 얼굴은 잠잠했다. 곁에 있던 가이우스가 그를 말렸다.

    “진정하십시오, 율리어스 님. 의원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살리라고 명을 내렸고, 해내겠다는 말을 지키지 못한 게 죄가 아니면 무엇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실 뿐이지,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닙니다. 괜찮으실 겁니다.”

    가이우스가 필사적으로 의원을 도왔다. 그러자 율리어스가 잡고 있던 멱살을 툭 놓고서 무감각한 눈으로 고개 숙인 가이우스를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뿐, 죽지는 않을 테니 괜찮다.”

    “…….”

    “숨만 붙어 있으면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나 보군.”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트릭도 순간 제 머릿속을 훑기라도 한 것 같은 말에 움찔거렸다. 그녀의 죽음에 몹시도 예민한 것 같던 율리어스였으니, 당장은 일어나지 못해도 건강만 괜찮다면 넘어가 주리라 생각했다.

    리트릭은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을 나무랐다. 율리어스가 그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는 며칠 전에도 제 눈으로 보았지 않던가.

    “내 몸에 있는 마나를 모두 주면, 일어날 수 있나?”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자, 잘못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그녀를 살릴 수 있냐고 물었다.”

    의원에게 다가서는 율리어스의 앞을 가이우스가 가로막았다. 쿵, 곧장 무릎 꿇은 가이우스는 머리를 숙이고 조언했다.

    “그분께서 살리신 목숨이지 않습니까. 부디,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가이우스는 어째서 율리어스가 이다지도 조급하게 구는지 알고 있었다. 헤이븐 윈터가 큰 사고를 겪은 뒤 기억 상실을 앓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접 조사한 게 가이우스였고, 그 뒤로 성격이 변했다는 것 또한 알았다.

    일리안 하인리히가 헤이븐 윈터의 몸에 깃들게 된 것에는 사고가 시작점이었다는 소리였다. 율리어스를 진정시키고 있는 가이우스였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이가 헤이븐 윈터일지, 일리안 하인리히일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가이우스.”

    “……예, 주군.”

    “원통의 크기를 늘려라.”

    “하지만, 율리어스 님!”

    무릎을 꿇고 있던 가이우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손가락만 한 원통에 율리어스가 얼마나 많은 마나를 담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가이우스였다.

    크기를 늘린다는 것은, 결국 율리어스의 목숨을 조금 더 태우겠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간절한 가이우스와는 달리 내려다보는 율리어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걸 지독히도 싫어하셨으니,”

    “…….”

    “나를 불쌍하게 여긴다면 일어나겠지.”

    율리어스가 구비된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그의 주변에 시립해 있던 시녀 몇 명이 트레이를 끌고 율리어스에게 다가갔다.

    트레이에서 나온 것은 이제 손가락 서너 개를 합친 것 같은 원통이었다. 율리어스가 제 오른팔의 옷소매를 걷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이우스는 리트릭을 돌아봤다.

    “……문을 닫도록.”

    “예? 예, 알겠습니다.”

    멍하니 있던 리트릭이 그제야 문을 닫았다. 자신도 나가야 하나 고민했던 리트릭은 이내 방 안에 있기를 택했다. 가이우스가 리트릭을 향해 말없이 안에 있으라는 턱짓을 해온 탓이었다.

    내부는 고요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고, 시녀는 아무렇지 않게 원통을 율리어스의 팔에 흡착시켰다. 그러자 검은색의 무언가가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율리어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잠잠해 마나를 빼내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원통을 떼어낸 시녀가 율리어스의 팔을 흰 수건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것을 다시 트레이에 담아 가이우스의 앞에 내밀자 그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명령했다.

    “……투여하십시오.”

    “네, 가이우스 님.”

    그 순간이었다.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율리어스가 몸의 힘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것을 받아 든 것은 그 옆에 있던 리트릭이었다.

    반사적으로 율리어스를 받아낸 리트릭은 제가 더 놀란 눈치로 가이우스를 바라보았다. 가이우스는 그런 율리어스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리트릭 경. 그분을 침실로 옮겨주겠습니까.”

    “……예? 아… 알겠습니다.”

    “완전히 정신을 잃으셨을 겁니다. 오늘도 겨우 낮에 일어나신 터라…….”

    리트릭은 영문도 모르는 얼굴로 율리어스를 업었다. 고개를 잠시 돌리자 시녀들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원통을 일리안의 팔에 흡착시키고 있었다.

    리트릭이 복도를 나오자 가이우스 또한 뒤를 따랐다. 평소와 달리 복도로 내리쬐는 햇빛이 없자 의아하게 여긴 리트릭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나를 뽑고, 정신을 잃고, 일어나면 식사를 하고……. 그리고는 마나 증강에 효험이 있다는 약초나 환약을 드십니다. 다시 약을 흡수하느라 잠을 주무시고 나면 밤에 일어나 그분의 방으로 가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가이우스가 웃었다. 그 웃음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하루가 길지 않습니까.”

    리트릭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문득 율리어스의 ‘죽을 수 없다.’는 말이 와닿았다. 그는 정말 죽을 수가 없을 뿐이었다.

    “헤이븐이 정신을 차리면, 괜찮아집니까?”

    “글쎄요.”

    정신을 차린 게 헤이븐 윈터라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일 테죠.

    가이우스가 속으로 덧붙였다. 열일곱 살의 헤이븐 윈터가 다시 몸을 차지했다는 보고를 올리면, 제 주군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가이우스는 그 끔찍한 상상을 하기 싫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어딘지 곰곰이 생각하던 리트릭이 문득 말했다.

    “저는 누굴 못 좋아할 것 같습니다.”

    “리트릭 경이 말입니까? 어째서요?”

    “에릭이든 율리어스 님이든……. 누굴 좋아하는 게 그다지 행복해 보이질 않습니다.”

    리트릭이 율리어스의 몸을 한 번 더 추어올렸다. 그의 키가 리트릭보다 커서 바닥에 발이 닿을까 싶어 몇 번이나 반복해야만 했다.

    리트릭의 말을 듣던 가이우스가 미소 지었다. 제법 오랜만에 제대로 지어보는 미소였다.

    “그건 리트릭 경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싫어할 수 있다면 힘들 이유도 없겠죠.”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분명 행복할 때도 있으셨을 겁니다. 당사자가 아닌 우리만 모를 뿐.”

    올해로 스무 살이 되었던 리트릭은 가이우스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친구가 조금 더 소중한 나이였다.

    얼마 가지 않아 율리어스의 침실에 도착했다. 리트릭이 침대에 율리어스를 조심히 내려두자 가이우스가 그를 도와 침대 위를 정리했다.

    “아, 리트릭 경. 헤이븐 님의 방으로 돌아가실 때에 의원에게 이야기를 전해주시겠습니까?”

    “무슨 이야기요?”

    “저녁에 마법사가 진찰할 예정이라고 해주십시오. 율리어스 님께서 내린 명령입니다만, 의원도 알고 있어야 할 듯합니다.”

    * * *

    리트릭은 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근무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는 있어야 했으니, 적어도 몇 시간은 더 남아 있었다.

    방 앞으로 돌아가기 위해 긴 복도를 조용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서 왜소한 몸집의 의원이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리트릭이 반가운 얼굴로 한달음에 다가갔다. 그에게 전해줘야 하는 말이 있는 덕택이었다.

    “의원님! 마침 잘 됐습니다. 돌아가는 길이십니까?”

    “예? 예…….”

    “가이우스 님께서 전하라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녁에 마법사가 진찰할 예정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에 의원에 어깨가 축 처졌다. 아무래도 그녀가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이라고 생각해 자존감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제 할아버지가 떠오른 리트릭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다방면으로 알아보실 생각인 것 같습니다. 헤이븐이 일어나면 의원님께도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제 손을 꼼지락거리던 의원이 무언가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리트릭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그를 달랬다.

    “들어보고,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 비밀로 하겠습니다.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사실 건강에는 정말 이상이 없으십니다. 고작 의원인 제가 그분의 마나가 어떤 효능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웬만한 비약보다 좋더군요. 그래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러니까.”

    입이 마르는 듯 입술을 달싹인 의원이 이어 말했다.

    “마나는 그만 주셔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거,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겁니다. 뵐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마르시니까.”

    “음, 그렇긴 하죠.”

    “누워 계신 분보다 진찰을 받아야 할 분은 그분이실 겁니다. 제 소견으로는……. 누워 계신 분께선 이미 건강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하신 대로 마법사에게 고견을 묻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리트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우스에게 이 이야기는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리트릭은 의원에게 인사를 하고서 다시 복도를 떠나갔다.

    생각보다 의원에게 잡혀 있는 시간이 길었다. 정신을 잃은 그녀 혼자 방 안에 있으리라 생각한 리트릭의 발걸음이 조급해졌다.

    “뭐, 위험할 것도 없지만.”

    중얼거린 리트릭의 걸음이 문득 느려졌다. 리하르트 기사단이 공작성의 엄호와 순찰을 강화한 된 뒤부터 성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졌지만 안심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렉스 단장 또한 방의 경호는 1명이면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온갖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방의 앞이었다. 안을 열어 확인해 볼까 하던 리트릭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혼자 있는 일리안의 방문을 여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안에서 큰 소음이 들리거나 한번 확인해야 할 때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를 불러 함께하라는 렉스 단장의 경고가 있었다.

    그러려면 또 기사를 찾으러 방 앞을 떠나야만 했다. 그것이 귀찮았던 리트릭은 방금 의원 선생도 나왔으니 별일 없겠지, 라며 제 자리를 지켰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을 때였다.

    “저, 기사님. 이쪽은 가이우스 님께서 말씀하신 분이세요.”

    “반가워요. 마법사 아샤입니다. 들어가 봐도 될까요?”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리트릭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곳엔 늘 보던 시녀 둘과 함께 로브를 쓴 아샤라는 여성이 있었다.

    분홍색 머리가 인상적인 여자는 기사인 리트릭에게도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맞잡은 리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저녁에 오신다고 했던 그 마법사분이십니까?”

    “네, 아무래도 그게 제가 맞는 듯하네요. 리커버리 전문 마법사예요.”

    활짝 웃는 아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국적인 아샤의 얼굴에 순간 제 직무를 잊을 뻔했던 리트릭이 흠, 하고 목을 다듬었다.

    “겉옷은 모두 벗어주시고, 소지하신 물건은 이곳에 담아주십시오.”

    “어머,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샤의 로브는 비를 제법 맞은 듯 젖어 있었다. 그녀와 시녀들이 모두 준비를 마치자 리트릭이 무거운 문을 대신 열어주었다.

    의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더 이상 없다고 했으니, 리트릭은 제발 이 사람 좋아 보이는 아샤가 무엇이라도 알아내기를 바랐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모두를 위해서라도.

    문을 연 리트릭은 슬쩍 침대 위에 있을 헤이븐을 확인했다. 곧 나갈 터라 얼굴이나 한번 확인하려 한 것이었다.

    “어? 환자분이 안 계시네요?”

    리트릭의 어깨 너머로 아샤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그녀의 말대로 침대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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