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죽을 수 없는 사람의 바람
“열, 열 겁니다!”
그의 말에 놀란 리트릭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붙잡고서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벌컥 열었다.
라울을 뭐라고 해야 하지. 너무 보고 싶어 해서 들여보냈다고 하면, 이해해 주려나……?
공작성의 경비가 좀 더 삼엄해진 것이 최근이었다. 그런데도 일리안의 방문 앞을 교대로 지키게 하고, 그조차도 부족해 매일 밤마다 직접 방 안을 지키는 것이 율리어스였다.
리트릭은 그 정도로 그녀의 일에 민감한 율리어스였으니 라울을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라울이 율리어스에게 크게 혼이 나는 일만은 피하기를 바랐던 리트릭은 이내 율리어스보다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분명 라울은 일리안의 침대 위에서 가만히 누워……. 어?
“문 앞을 지키는 게 명령이었을 텐데.”
“그… 게. 그러니까.”
방 안에는 놀랍게도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일리안의 옆에 딱 붙어서 눈을 꼭 감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라울은 존재하지 않았다.
율리어스에게 무어라 변명할지 고민하던 리트릭이었기에 잠시나마 안도하긴 했지만, 이어서 다른 걱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고작 다섯 살에 불과한 아이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설마, 납치?
에릭으로부터 라울이 그동안 얼마나 위험한 삶을 살아왔는지는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리트릭은 순간적으로 드는 걱정에 심장이 철렁했다. 자신과 가장 친한 친우의 동생 같은 아이지 않은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결국 그대로 방을 나설 수는 없었다. 리트릭은 방 안을 조금 더 살펴보기 위해 시간을 끌 명목을 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어지지 못했다. 위압적일 정도로 큰 키의 율리어스가 성큼 다가와 그를 지척에서 내려다본 탓이었다.
헤이븐, 너는 대체 이런 사람 눈을 어떻게 그렇게 빤히 보냐?
그의 까맣게 죽어 있는 눈동자를 보던 리트릭이 침을 꿀꺽 삼켰다. 율리어스의 눈을 피해 라울이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마음이 다급해진 리트릭은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식… 사는 하고 계십니까?”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닐 텐데.”
그의 질문에 무서울 정도로 노려보던 율리어스가 퍽 귀찮은 얼굴로 리트릭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의 올가미 같은 시선에서 벗어난 리트릭은 곁눈질로 침대 부근을 살폈다.
“그야,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합니다만……. 헤이븐이 보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그렇게 말했나?”
다소 풀어졌던 율리어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바뀐 것은 그때였다. ‘헤이븐’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율리어스가 리트릭을 향해 다가와 눈을 내리깔았다.
리트릭의 말에 내내 관심이 없던 남자는 헤이븐이라는 단어 하나에 매섭게 반응했다. 리트릭은 그 변화가 놀라워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헤이븐 윈터, 그녀가 그렇게 말했느냐고 물었다.”
리트릭은 헤이븐의 마음속 깊은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3차 지원군에 지원한 이유가 율리어스를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빨랐던 리트릭은 벨로 숲에서 그녀가 찾아야 할 것이 있다며 떠났을 때부터 헤이븐 윈터의 마음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시작되었던 리트릭의 첫사랑이 정리되었던 즈음이기도 했다.
개구쟁이인 척 장난만 치지만 사실 리트릭은 누구보다도 눈치가 빨랐다. 그는 문득 고개를 숙이다 율리어스의 손목에 난 흉터들을 보았다.
“……헤이븐은 제 이름과 나이를 속이고 3차 지원군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녀의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고작 하급 기사의 실력으로요.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죠.”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었을 텐데.”
“엄청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지 뭡니까. 당신이 토벌로 떠났다는 걸 아는 순간, ‘역시 가야겠지.’ 하고요.”
율리어스가 입을 닫은 채 리트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그곳에 가야 할 이유는 당신밖에 없었습니다, 공작 전하.”
“…….”
“당신을 걱정해서가 아닙니다. 녀석의 친구로서 말하는 거죠. 부디 식사는 하십시오.”
리트릭은 어느 순간 율리어스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이 눈빛을 피하는 순간, 헤이븐의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율리어스가 리트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애석하게도, 하루에 내가 먹는 양은 인간의 양을 넘어. 네가 경고할 이유는 없겠군.”
“그런데 왜……. 그렇게 말라가십니까?”
“내 마나를 조금이라도 더 줘야 하니까.”
리트릭을 바라보는 율리어스의 눈빛은 무감각했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차마 리트릭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커다란 욕망이 담겨 있어서, 리트릭의 눈동자가 순간 떨렸다.
“팔을 베어 피를 뽑아 직접 먹이려고 했더니 신관이 말리더군. 가이우스가 말하기를, 그러다 내가 쓰러지면 헤이븐을 살릴 수 없으니 죽을 생각은 마라던가. 그래. 그래서 그 조그만 원통에 내 피와 마나를 담았다.”
“…….”
“식사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마나 증식 방법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더 뽑아내기 위해서는 할 만했지.”
율리어스에게 있어서 제 몸은 마나를 뽑아내는 기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제 몸에서 마나가 더 나오지 않았다간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어 보였다.
리트릭이 어딘지 두려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결국 율리어스는 그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리곤 관심 없는 말투로 툭 말했다.
“나는 죽을 수 없다. 그러니 그만 꺼져.”
그가 죽을 수 없는 이유는, 헤이븐 윈터를 살리기 위해서일까. 리트릭의 머릿속에 1가지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직접 그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조그만 물체가 침대 아래에서 파득 뛰쳐나왔다.
“율니, 죽지 마요!”
놀란 리트릭이 고개를 돌리자 라울이 침대 아래에서 달려와 율리어스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놀란 리트릭과는 달리 율리어스는 그다지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침대 아래를 제외하고 이상 없었나 보군.”
“그게……. 죄송합니다.”
율리어스는 이미 리트릭이 어째서 오늘따라 이상하게 굴었는지 알고 있었다는 듯 여상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라울이 침대 아래에 숨어 있으리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한 리트릭만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율니, 왜 죽어요?”
“죽을 수 없다고 했을 텐데.”
“하지만 율니 눈이 죽어 있어요. 죽고 싶다고 말해요.”
라울이 율리어스의 허벅지에 제 얼굴을 묻고 비벼댔다. 아이의 눈물, 콧물이 율리어스의 바지춤을 적시자 당황한 리트릭이 라울을 떼어내기 위해 다가갔다.
“일니안이 그랬어요. 죽으면 더는 볼 수 없어요……. 죽지 마요.”
그러나 리트릭이 라울의 허리를 잡기 직전, 율리어스가 아이의 허리를 잡고 안아 올렸다. 그의 팔 위에 안착하게 된 라울은 축 처진 눈꼬리로 율리어스를 바라보았다.
“죽지 않아.”
“…….”
“죽을 수 없다.”
율리어스는 죽을 수 없다고 말했지만, 살고 싶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어린 라울도 그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아도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는 알 수 없어 말해주지 못했다.
리트릭은 율리어스가 더 이상 살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차마 율리어스에게 살고 싶지 않느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것은 리트릭이나 라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율리어스가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주길 바라는 이는, 세상에 단 1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 * *
문 앞에 서 있던 리트릭이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는 목을 가누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바깥에선 어느새 해가 뜨고 새 1마리가 시끄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달칵.
그러다 리트릭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바로 세웠다. 핏발이 선 눈을 크게 뜬 리트릭이 제 앞을 가리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옷으로 방을 빠져나온 율리어스에게는 잠을 잔 흔적이 없었다. 그는 행거에 걸린 제 옷을 걸치고서 말없이 방 앞을 떠나갔다.
다음 교대 순서인 필립이 온 것은 그러고도 몇 분여가 흐른 뒤였다.
“여, 리트릭! 고생했다. 미안하게 됐어. 어제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밤새느라 피곤했지?”
“뭐, 별말씀을요……. 필립 경이 쉰 것도 아니고.”
“다음에 너 필요하면 내가 대신 설게. 그만 가봐.”
필립의 말에 겨우 새어나오는 하품을 참은 리트릭이 아무 생각 없이 자리를 떠나려다, 순간 스치는 생각에 겨우 몸을 세웠다. 그러자 보초를 설 준비를 하던 필립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리트릭. 왜 안 가냐?”
“그게……. 방에 두고 온 게 있어서.”
“뭐? 방에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 출입 금지잖아. 두고 온 물건이라니?”
“물건이 아니라 아이인데요…….”
리트릭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를 멀뚱히 보던 필립은 흐음, 하더니 입을 열었다.
“오는 길에 율리어스 님을 마주쳤는데. 그분이 그래서 그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분답지 않게 옷이 흐트러져 있더라고. 방에서 나오셨을 테고, 안에 아이가 있다며. 그래서 그런가 했지. 뭐, 아무튼 율리어스 님도 승인한 일인 거지? 들어가 봐.”
필립의 말이 모두 이해된 것은 아니었지만 리트릭은 먼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라울을 윈터 가문에 데려다주고 퇴근을 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는 탓이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인형처럼 잠이 든 라울이 보였다. 픽 웃은 리트릭이 아이에게 다가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안아 들었다.
아이를 데리고 방을 빠져나가려던 리트릭은 문득 보이는 물건에 멈칫했다.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의자가 그곳에 있었다. 종종 아침에 교대를 하고 나면 방 안을 확인하고는 했는데, 매일 밤마다 오던 율리어스가 의자를 남겨두고 간 적은 없었다.
낯선 물건에 리트릭은 어젯밤, 나가기 직전 일을 떠올렸다.
“율니. 헤입븐 언제 일어나요?”
“곧.”
“율니. 헤입븐 많이 아파요?”
“그래.”
옆에서 지켜보던 리트릭이 더 눈치를 볼 정도로 라울은 율리어스에게 질문을 던져댔다. 그의 대답이 무뚝뚝하기 그지없으니 질문을 멈출 법도 한데, 라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늘따라 리트릭에게도 떼를 쓰기는 했지만 율리어스에게 하는 것만큼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앞에 서면 입을 꾹 다물던 라울이 율리어스를 보자 종알종알 떠들었다.
“율니, 안아주면 안 돼요?”
“왜.”
“안아주세요.”
침대에 앉아 있던 라울이 타박타박 아래로 내려와 앞에 선 율리어스를 향해 팔을 쑥 내밀었다. 그런 라울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율리어스는 이내 아이의 겨드랑이 아래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그를 지켜보던 리트릭은 어서 바깥으로 가 의자 하나를 구해왔다. 그의 옆에 의자를 내려둔 리트릭은 이내 나가보겠다며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그러면, 지금까지는 한 번도 앉은 적이 없다는 거야?”
율리어스가 밤에 찾아온 것은 오늘 하루만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그가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율리어스는 매일 자정이 되면 방으로 찾아왔고 리트릭은 그가 매일 아침 방을 나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껏 한 번도 의자 하나 구비된 적이 없었던 것을 보면, 율리어스는 그 많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리트릭은 여태동안 그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잠든 헤이븐을 구경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 잠시나마 지켜본 율리어스는 침대 옆에 멀뚱히 서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제는… 애 때문에 계속 앉아 있었고?”
라울이 율리어스의 품에 안겨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는 것은 한번 문틈으로 훔쳐봐 알고 있었다. 혹시 라울이 율리어스에게 말도 안 되는 떼라도 쓸까 싶어 걱정된 탓이었다.
어제의 리트릭은 분명 율리어스가 라울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에 아이를 숨기려 했다. 그때의 자신을 떠올린 리트릭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야, 헤이븐.”
라울을 품에 안은 리트릭은 방을 나가기에 앞서 고요히 잠이 든 제 친우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다친 자의 얼굴 같지 않아 잠깐 잠이 든 것만 같았다. 어제의 율리어스가 오히려 더 병자 같았다.
리트릭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잠이 든 라울의 등을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네가 빨리 일어나야겠다.”
안 그럼 저 사람이 너무 불쌍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