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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5화 (9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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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에릭!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애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면…….”

    “보고 싶다고 우는데 어떡하냐. 밥도 안 먹고 움직이지도 않고 소리도 안 질러. 눈물만 흘리지.”

    에릭의 품에는 라울이 안겨 있었다. 공작성의 복도에 선 리트릭은 곤란한 얼굴로 라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는 에릭의 말이 사실이었던 듯, 라울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본 리트릭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나와야 한다. 나도 곧 교대라고. 아니다, 그냥 나도 같이 들어가자.”

    근무 중이었는지 리트릭은 제복을 입고 있는 채였다. 몸을 돌린 리트릭이 제 등 뒤에 있는 커다란 문을 열어주었다.

    라울을 양손으로 안고 있느라 문을 열 수 없던 에릭은 리트릭의 도움으로 방 안에 들어갔다. 리트릭 또한 소음 하나 없이 조용히 움직이는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섰다.

    방 중앙에 놓인 침대에 다가간 에릭이 제 품에 안긴 라울을 들어 침대로 가까이했다. 고요히 잠든 일리안이 그곳에 있었다.

    “라울, 봐. 헤이븐은 자고 있지?”

    아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라울은 가만히 일리안을 보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을 뚜욱 흘렸다. 벌린 입 사이로 아이 특유의 뭉개진 발음이 들려왔다.

    “헤입븐, 헤입븐…….”

    라울은 그녀가 다쳤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에릭이 변명한 대로 그녀가 잠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건만, 라울은 그녀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라도 했는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에릭의 양손에 허리가 잡혀 있던 라울이 일리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라울답지 않은 모습으로 발버둥을 쳤다.

    “흐, 흐으……. 헤입븐…….”

    “라, 라울. 헤이븐은 피곤할 테니까…….”

    에릭이 곤란한 얼굴로 아이를 도로 제 품으로 가져왔다. 그러자 라울의 발버둥이 더욱 거세졌다.

    “에릭, 됐어. 헤이븐 옆에 내려둬 줘.”

    “뭐? 그러다 깨기라도 하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리트릭이 자조적인 얼굴로 웃었다.

    “그러면, 다행이지.”

    에릭은 그 말에 결국 라울을 일리안의 옆자리에 내려두었다. 이제껏 거세게 발버둥 치던 라울이 잠잠해진 것은 그때였다.

    아이는 엄지를 빨며 일리안의 옆에 꼭 달라붙었다. 잠이 든 일리안은 깨어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지 1주일이 흐른 날이었다.

    * * *

    “리트릭? 무슨 일이야? 넌 내일 아침 근무일 텐데.”

    “렉스 단장이 필립 경을 불렀다더라. 무슨 일이라도 있나 봐. 그래서 오늘만 대신 서달라던데.”

    “허, 너도 피곤하겠네. 당장 오늘 오전에도 근무였으면서. 괜찮겠냐?”

    리트릭이 설렁설렁 손을 저어 보였다. 볼레르는 짐짓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결국 자리를 떠났다.

    며칠 사이 교대 근무로 일리안의 방문을 지키고 있던 리트릭은 볼레르가 떠나고 혼자가 되자 흘러나오는 하품을 손으로 막았다.

    리트릭이 하는 일은 어렵진 않았지만 다소 지루한 일이었다. 몇 시간 동안 가만히 문 앞에 서서 오가는 이들의 신분과 물건을 확인하는 게 고작이었다.

    복도 저 멀리서 시녀 2명이 트레이를 끌고 오는 게 보였다. 잠시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한 리트릭이 굳은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오후에 주입할 마나입니다.”

    “트레이 안에 든 것을 모두 보여주시고, 겉옷은 벗어 여기에 걸어주십시오.”

    리트릭이 사무적인 얼굴로 트레이 안에 있는 물건 모두를 확인했다. 시녀들 또한 몇 번이고 해왔던 듯 익숙한 몸짓으로 겉옷을 벗어 문 앞에 있는 행거에 걸었다.

    의례적인 검문을 마치자 리트릭이 고개를 까닥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제야 시녀들은 일리안의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상관의 명령으로 방문 앞을 지킨 지도 벌써 1주일이었다. 그녀와 가깝다는 이유로 보초를 서게 된 것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리트릭은 가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고 생각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리하르트 공작성이지 않은가.

    리하르트 기사단이 매일같이 공작성 주위를 엄호하고 있었다. 내부에 일하던 이들은 다들 오랫동안 공작성에 종사해 온 이들이었으니 불안은 내려두어도 될 텐데.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순간, 안쪽에서 문이 열리며 시녀들이 나왔다.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각이었다.

    “저, 기사님. 안에 아이가 있는 데요…….”

    “예? 아이라니, 그게 무슨.”

    아이라는 말에 잠시 멈칫했던 리트릭이 제 이마를 붙잡았다. 오전에 에릭과 함께 찾아왔던 라울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간 덕택이었다.

    에릭, 잠깐만 두고 가겠다며!

    라울이 일리안의 팔을 제 다리로 꼭 끌어안고 잠든 탓에 강제로 떼어낼 수가 없었다. 에릭은 그런 라울을 두고 오전에만 잠시 여기 두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왔고, 리트릭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마나를 주입받기 전까지만 재우자고 약속한 게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그대로 퇴근을 했던 리트릭은 에릭이 다시 라울을 데리러 온 줄로만 알았다.

    에릭은 리트릭이 알아서 라울을 데리고 나올 줄 안 모양이었다. 그가 그대로 퇴근을 했으리라고는 알지 못했을 테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시녀들이 물러서자 방 안에 들어선 리트릭이 침대로 다가갔다. 그곳엔 라울이 훌쩍이며 눈을 꼭 감은 채 일리안을 껴안고 있었다.

    “라울. 라울? 일어났어?”

    그러자 라울이 볼살이 흔들리도록 고개를 저었다. 눈을 꼭 감은 걸 보아하니, 자신이 일어났다는 걸 들키는 순간 이곳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허리를 짚은 리트릭이 곤란한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라울, 헤이븐도 해야 할 일이 있거든. 너도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헤입븐 이제 일어나요?”

    눈을 뜬 라울이 불안한 눈으로 리트릭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순진한 눈망울을 본 리트릭은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순간 시선을 피했다.

    “어, 어. 곧 일어나지.”

    “그럼 일어나는 것만 보고 갈래요.”

    오늘의 라울은 이상했다. 가끔 오가며 라울을 본 적이 있던 리트릭은 아이가 조용하고 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아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일어나면 에릭에게 말해줄게. 어? 내가 약속한다. 그때 다시 보러 와.”

    “싫어! 싫어요!”

    다시 라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리안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그 모습에 제 머리를 헤집은 리트릭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 헤이븐이 제 엄마인 줄 아는 거 아니야?

    결국 리트릭이 강제로 라울을 떼어내기 위해 아이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때, 리트릭의 어깨에 조그만 손이 올라왔다.

    “기사님, 괜찮아요. 마나를 주입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그냥 두세요.”

    “예? 그래도…….”

    “아이가 저렇게 우는걸요. 저희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조용히 있던 아이였어요. 불편하게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봐요.”

    미소 지은 시녀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서 침대의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라울은 일리안의 이불 속으로 꼬물거리며 숨어들어 갔다.

    조용해진 주변에 라울이 이불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러다 제 바로 앞에 있는 리트릭의 얼굴에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라울, 너 조용히 있어야 돼. 아니, 잠깐. 밥은? 하루 종일 밥도 안 먹었을 것 아니야.”

    “배 안 보파요.(안 고파요.)”

    “웃기고 있네! 너, 이 형처럼 크려면 하루 5끼 먹어도 부족하다. 어?”

    두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리트릭이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저, 사라 주방장님께 식사 좀 얻어오겠습니다. 그때 동안만…….”

    “예, 다녀오세요.”

    눈이 마주친 시녀의 손에는 검은색의 마나가 들어 있는 원통이 쥐어져 있었다. 시녀가 그것을 일리안의 팔에 흡착시켰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일리안은 식사를 할 수 없었고, 대신 그녀의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것이 마나였다. 검은색의 마나가 순식간에 일리안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트릭은 이내 말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문 앞에 선 리트릭이 지나가는 시종 1명을 붙잡았다.

    “어, 디올! 마침 잘 만났다. 지금 바빠?”

    “바쁘진 않은데……. 왜?”

    그가 주방에서 일하는 시종임을 아는 리트릭이 사정을 설명하고서 아이가 먹을 식사 조금을 부탁했다. 보초를 서야 하는 입장인 리트릭이 방문 앞을 비울 수는 없는 탓이었다.

    “알겠어. 사라 주방장님께 말씀드리면 되지?”

    “어. 고마워!”

    * * *

    “배 안 고프다면서.”

    “안 보파요.(안 고파요.)”

    “근데 그렇게 잘 먹냐? 뭐, 못 먹는 것보다는 낫지만.”

    흰색의 아이용 식판에는 사라의 영양과 정성이 담긴 식사가 들어 있었다. 후식용 과일마저 챙긴 식판은 급하게 만들어진 식사 같지 않았다.

    침대에 앉아 짧은 손가락으로 포크를 쥐고 식사를 하던 라울이 입을 시무룩하게 내밀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리트릭은 얼레, 하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헤입븐도 배 보플 텐데. (헤이븐도 배 고플 텐데.)”

    “허어, 이 녀석 보게? 네가 잘 먹어야 헤이븐도 나중에 일어나서 잘 먹지. 너 볼 홀쭉해져 있어봐. 일어난 헤이븐 목구멍으로 밥이 잘 넘어가겠냐?”

    리트릭의 말에 설득당한 라울이 재게 손을 놀려 식사를 마쳤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트릭은 아이의 머리를 거칠게 만지고서 씩 웃었다.

    “다 먹었네, 잘했다. 형은 이 식판 치우고 올 테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한 손으로 아이용 식판을 든 리트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울은 조금 더 일리안의 옆에 있어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눈을 반짝였다.

    식판을 치우러 가는 길에 에릭에게 연락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리트릭이 성큼성큼 방을 빠져나갔다. 아마 에릭도 돌아오지 않는 라울에 걱정을 하고 있을 터였다.

    문을 닫고 나온 리트릭은 문 앞에서 기다리는 누군가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디올?”

    “리트릭, 아이는? 잘 먹었어?”

    “어, 거의 마시던데. 맛있나 보더라.”

    “다행이다. 그거 반은 내가 했거든. 식판은 이리 줘.”

    디올이 웃는 낯으로 식판을 받아갔다. 주방까지 가는 시간을 번 리트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뒤돌았다.

    혹시 라울이 외로울까 싶어 안에서 같이 있어줄 요량이었다. 문을 조금 연 리트릭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라울은 침대 위에 무릎 꿇은 채 조용히 일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이답지 않게 고요했다.

    결국 리트릭은 문을 다시 닫았다.

    “요즘 애들은 애 같지도 않네…….”

    난 저 때 뛰어다니기 바빴는데.

    머리를 벅벅 긁은 리트릭은 차라리 잘 되었다며 방 안의 일에 대한 신경을 껐다. 그렇게 보초를 선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와중이었다.

    “……졸리네.”

    자신도 모르게 하품을 한 리트릭이 복도에 난 창을 바라봤다. 이미 까맣게 물든 지 오래였다.

    아무 생각 없이 어둠이 내린 밖을 보던 리트릭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이 시간쯤에도 분명 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런, 미친.”

    갑자기 대신 서게 되긴 했지만, 이걸 잊고 있었다니!

    저 멀리 어두워진 복도 끝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재빨리 몸을 바로 한 리트릭이 다소 흐트러진 제복을 다잡았다.

    “…….”

    “이상 없습니다.”

    율리어스가 다가오자 리트릭은 알아서 보고를 마쳤다. 그 말을 하지 않았다간 율리어스가 근무자를 뚫어져라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율리어스의 턱이 베일 듯 날카로워져 있었다. 영문은 몰라도 그는 날마다 메말라 가고 있었다.

    “문을.”

    “예, 알겠습니다.”

    율리어스가 겉옷을 벗는 사이, 리트릭이 문손잡이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리트릭은 멈칫했다. 문득 안에 있는 라울이 떠오른 탓이었다.

    어? 오늘 이상 없는 거 맞나……?

    즉시 문을 열지 못하고 리트릭이 멈칫거리자 그 모습을 보던 율리어스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졸지에 율리어스의 가라앉은 시선을 받게 된 리트릭은 식은땀을 흘렸다.

    “열라고 했을 텐데.”

    “……그, 게 말입니다.”

    말을 하다 눈이 마주친 리트릭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저게, 사람 눈이 맞는 건가?

    그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산 사람의 눈보다는 죽은 자의 것에 가까웠다. 그의 눈을 처음 본 리트릭이 순간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때였다.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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