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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4화 (94/123)
  • 94. 부디

    에릭이 불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몰리다 못해 밤처럼 어두워진 하늘 아래에는 새까만 폭풍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에릭 또한 율리어스의 곁에 있는 일리안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리트릭의 부추김에 의해 멀리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골렘 따위가 폭풍 속에서 온몸이 바스러지는 게 눈에 보였다. 에릭이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옆에서 리트릭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 가이우스 님?”

    가이우스가 울고 있었다.

    리트릭은 그런 가이우스의 어깨를 당황한 눈치로 토닥였다. 폭풍의 중심부에 선 율리어스를 보고 있는 가이우스의 턱을 타고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무슨…….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공작 전하랑 헤이븐은 안 나와도 되는 건가?”

    가이우스의 어깨를 토닥이느라 바쁘던 리트릭이 일리안이 있는 곳을 흘긋거렸다. ‘그’ 율리어스가 함께 있으니 그녀가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몬스터마저 몸이 갈려 나갈 정도로 위협적인 폭풍이었다.

    “……죽으시려는 겁니다.”

    “예?”

    “저분께서, 목숨을 끊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눈을 내리깐 가이우스로부터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율리어스와 일리안을 바라보던 에릭도 놀란 눈치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대체 왜……!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헤이븐이랑 숙소를 같이 쓰고 싶다던 사람이 죽는다고? 어째서요?”

    “저분이 죽는 이유야 다른 게 있겠습니까. 당신들이 말하는 헤이븐 님을 살리고 싶으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미루어두더라도, 그분이 다치는 건 못 보는 분이십니다.”

    눈물을 흘리는 가이우스의 얼굴과는 반대로, 그의 입가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율리어스 님이 죽지 않으면 헤이븐이 죽는다는 말입니까? 어째서, 아니, 둘 다 살릴 수는 없어요?”

    리트릭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돌아가는 상황을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닌 듯했지만, 일리안과 율리어스를 둘 모두 살리는 게 힘들다는 건 안 모양이었다.

    가이우스는 더 이상 리트릭의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폭풍 속을 향해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런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가이우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벽을 두드렸다.

    율리어스가 한 짓임이 분명했다. 다른 이들은 가로막는 게 없는 걸 보니 가이우스가 폭풍 속으로 몸을 던져 따라 죽을까 그의 앞에만 허공에 실드를 만들어둔 것이었다.

    이럴 때만 다정하십니다. 일리안 님이 아니고선 제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으시던 분이.

    그는 늘 그랬다. 기계 장치가 애초에 설계되기를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 그는 일리안이 아니고서는 톱니바퀴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실드가 가이우스를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일 터다.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거리가 제법 되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이우스는 율리어스가 웃고 있다는 것쯤은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가이우스는 처음으로 속으로 그를 욕했다.

    바라는 것, 하고자 한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주제에, 뭐가 좋다고.

    헛웃음을 짓는 가이우스의 옆에 에릭이 섰다. 그는 어딘지 혼란스러운 얼굴로 일리안과 율리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 사람은 왜 행복한 겁니까?”

    에릭은 율리어스가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었다면, 하는 가정 따위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한다면 물론 죽을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

    그의 웃음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 율리어스는 그녀와 해보지 못한 게 너무도 많지 않았던가. 너무도 이르게 다가온 죽음에 운명이 원망스러워야 하는 게 아니었나.

    “저분께서는 그걸 원하신답니다.”

    그러자 에릭의 얼굴이 더욱더 이상해졌다. 그의 상식으로는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좋아함이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렇게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었는데.

    “저분이 해왔던 건 그게 전부니까.”

    “…….”

    “다른 방법으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까.”

    가이우스가 나직이 덧붙였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평범하고 가볍게 그녀를 좋아할 줄 몰랐다. 아니, 그것은 그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건… 이상합니다.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확실히, 사랑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게 아니죠.”

    에릭이 멍한 얼굴로 율리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껴안고 있는 율리어스의 모습이 곧 죽는 이답지 않게 너무도 행복해 보여서,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에릭과 가이우스의 시야로 일리안이 제 배를 향해 단검을 치켜든 모습이 보였다.

    * * *

    “일리안.”

    율리어스가 제 어깨로 쓰러진 일리안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처음에는 아주 약하게 두드리다 문득 조금 다급해진 모습으로 몸을 흔들었다.

    “일리안?”

    제 품에 안겨든 일리안을 떼어내지도, 그렇다고 꽉 끌어안지도 못하던 율리어스가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핏물이 율리어스의 손목을 타고 팔뚝으로 흘러내렸다.

    일리안의 피였다.

    율리어스는 그 순간 섬뜩해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피에 젖은 단검이 그녀의 배 속을 갈랐다는 현실이 그제야 와닿았다.

    “일리안, 죽어요?”

    폭풍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살랑이는 바람마저 없이 가라앉은 폭풍의 중심부에는 율리어스와 일리안이 있었다. 둘의 주변에 뽑힌 나무나 바윗덩이 몇 개가 형편없이 널브러진 채였다.

    제 몸에서 마나를 빼내는 것을 멈춘 율리어스는 그제야 수월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이 벌벌 떨려 일리안을 쓰다듬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일리안. 안 돼요, 안 돼, 제발……. 가지 마요.”

    제 품에 안긴 일리안의 몸이 힘이 풀려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지려 하자, 그가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길어진 머리카락을 헤집고 뒷머리를 감쌌지만 점점 차가워지는 체온에 율리어스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가 무릎을 꿇었다. 품에 안긴 일리안의 몸 또한 아래로 내려갔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나를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그렇게 말하는 율리어스는 눈의 초점이 풀려 있었다. 그는 다른 생각이라곤 조금도 못 하겠는지 그녀의 귓가에 자꾸만 속삭이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곤 이전에 안아본 적이 있던 일리안의 시체뿐이었다.

    화살이 수십 개는 박혀 몸에 구멍이 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자신이 갔을 때에는 육안으로 시체라는 것조차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율리어스는 죽어간 일리안의 시체를 이미 껴안아본 적이 있었다.

    다시는, 그것을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제가 그렇게 미웠습니까?”

    일리안이 단검을 제 배로 밀어 넣은 장면이 자꾸만 반복되었다.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율리어스에게 일리안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알려준 것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바치는 죽음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이제는 일리안을 따라 죽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살린 제 목숨을 어떻게 제멋대로 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율리어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차갑게 식어가는 일리안의 몸을 붙잡고 멍하니 있는 것밖에는 없었다.

    일리안이 내린 벌이었다. 율리어스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뭐냐. ……유리? 유리라고 부르자.”

    “망할, 내 눈엔 더럽게 사랑스럽기만 한 인간이라고.”

    “……유리.”

    율리어스에게 있어 일리안을 사랑하는 것은 습관이었다. 그는 너무도 오래도록 그녀를 사랑해 왔고, 이제는 그곳에 녹이 슬어버려 원래대로 돌아가는 법조차도 잊어버렸다. 오래된 율리어스의 습관은 고칠 수 없게 되었다.

    율리어스가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때는 일리안의 앞에서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앞에서만 비로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뛰고, 땀이 흐르고, 두려워하고…….

    일리안의 앞에 서면 인간이 되는 그 기분을 짧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인간이 되는 그 기분을 사랑했고, 그다음에는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황자 전하!”

    저 멀리서 히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옆에 있던 황자가 구멍이 난 배를 손으로 겨우 막은 채 쓰러졌다.

    히말이 그것을 제 힐링 마법으로 응급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도와줄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힐링 마법을 행하느라 빛나던 히말의 손이 순간 움찔거렸다.

    율리어스가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묘한 힘이 있어서, 히말은 다른 곳을 바라볼 수조차도 없었다.

    히말은 그가 당장 황자와 자신을 죽이리라 생각했다. 그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고, 좋은 협박거리였던 여자 또한 배를 뚫려 죽어가고 있을 테니까.

    때문에 지그시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다 아무리 기다려도 제 목숨을 거둬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눈을 떴다.

    이미 율리어스는 히말과 황자로부터 고개를 돌린 뒤였다.

    * * *

    “가이우스 님. 폭풍이… 멈췄습니다.”

    에릭이 눈을 찌푸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칠기만 했던 바람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하늘을 수놓았던 먹구름조차 물러가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에릭이 가이우스를 향해 말하며 일리안과 율리어스가 서 있을 자리를 바라보았다. 율리어스의 품에 안긴 일리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리안을 품에 안은 율리어스의 모습에 에릭과 리트릭의 얼굴에 안도가 서렸다.

    “둘 다… 살았어?”

    리트릭이 중얼거리자 그제야 현실이 와닿았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에릭의 눈에 일리안의 붉게 물든 배가 보였다. 순간 그녀가 붉은 옷을 입었나 생각했던 에릭이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붉은 옷이 아니라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였다.

    가이우스와 리트릭도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는지 다급하게 둘에게 달려갔다.

    “율리어스 님!”

    “헤이븐!”

    이름을 외치며 달려간 그들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가 검게 죽은 눈으로 그들을 향해 나직이 말한 탓이었다.

    “다가오지 마라.”

    일리안을 품에 안은 율리어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눈은 초점이 나가 있었고, 달려간 그들이 당장이라도 일리안을 빼앗아갈 것이라 생각했는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그의 모습은 인간 같다기보다는 한 마리의 짐승 같았다. 율리어스의 주위로 넘실거리는 마나에 의해 허공을 떠다니는 흙이나 돌 따위들이 그 기괴함을 더했다.

    그의 붉게 물든 눈가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인간형 몬스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율리어스는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율리어스 님. 가이우습니다.”

    움직인 것은 가이우스였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 율리어스가 이를 드러냈다. 가이우스는 그것에 잠시 움찔거리긴 했지만 이내 그의 앞에 마주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릭과 리트릭은 주변에 일렁이는 율리어스의 마나에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어갔다.

    “외람되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가이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율리어스의 초점이 나간 눈이 그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분을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

    “숨이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곧 가실 겁니다.”

    율리어스와 가이우스의 거리는 한 발자국이 채 되지 않았다. 가이우스는 또렷한 눈으로 그의 품에 안긴 일리안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순간 율리어스의 초점이 돌아왔다.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멎어든 것도 그때였다.

    “부디, 이번엔 멀리 보내지 마십시오.”

    율리어스와 일리안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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