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3화 (93/123)
  • 93. 당신의 시간을 위한 죽음

    일리안이 멍한 얼굴로 율리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늘 무감각하기 짝이 없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자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그렇게 웃는 율리어스의 모습은 몹시도 인간 같았다. 아니, 인간이든 아니든 그것은 이제 상관없었다.

    율리어스의 주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그와 함께 시작된 검은 폭풍은 히말이 마법을 부릴 때와 마찬가지로 거셌지만, 그 크기가 달랐다. 그의 주변에 있던 이들은 날카로운 바람에 피부에 생채기가 날 정도였다.

    황자는 이미 율리어스의 주변에 있다간 마나 폭발에 의해 위험해질 것을 알았는지 히말과 함께 저 멀리 물러난 뒤였다.

    “일리안.”

    폭풍의 눈에 있던 율리어스가 일리안을 나직이 불렀다.

    “이리 와요.”

    그의 흰 손이 일리안에게 내밀어졌다. 이미 율리어스와 그녀의 주변에 있던 다른 기사들은 폭풍을 피해 도망가 남아 있지 않았다.

    저 멀리서 가이우스가 무릎을 꿇은 채 울부짖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언가에 가로막혀 가까이 올 수 없는지 허공을 두드리고 있었다.

    모두가 도망갈 만큼 위협적인 폭풍이었으니, 일리안이라고 해서 안전할 리가 없었다. 온몸 곳곳에 옷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일리안을 바라보던 율리어스가 조금 더 손을 내밀었다.

    “당신과 함께 죽고 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리어스가 한 걸음 일리안을 향해 움직였다. 폭풍은 그런 율리어스를 중심으로 하듯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제 마나가 거칠어서. 그러니 내 품으로 오세요.”

    율리어스는 일리안과 함께 죽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이 홀로 죽고 난 뒤 그녀가 율리어스를 완전히 잊은 채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는 일리안과 함께 죽고 싶지 않았다. 그가 일리안을 사랑하는 방법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느리게 한 걸음 내밀었던 율리어스는 이내 성큼 걸어가 일리안을 와락 껴안았다. 그의 마나 폭풍에 의해 옷이 찢어지고, 온몸에 상처가 났던 일리안은 그가 껴안자 사위가 고요해진 것을 느꼈다.

    그곳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율리어스와 일리안의 숨소리밖에 없었다. 아니, 느리게 뛰어대는 율리어스의 심장 소리 또한 들려왔다.

    “휘말려 죽는 일 따위는 없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율리어스.”

    “불렀습니까.”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일리안이 손을 들어 율리어스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유리.”

    그 부름에 율리어스가 눈을 접어 웃었다. 그 웃음에는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죽으려고?”

    “제가 죽는다고 해서 일리안이 위험해질 리는 없을 겁니다. 황자와 당신의 몸이 이어져 있다는 건, 곧 황자도 당신을 섣불리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니까.”

    “그러면, 네가 죽을 필요는 없지 않냐. 황자도 제 목숨을 끊으려 들지는 않을 것 아니야.”

    율리어스의 얼굴에선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평소처럼 무감각한 눈의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귓가에 입을 바짝 붙였다.

    “제가 죽지 않으면요.”

    “…….”

    “당신의 발이 피에 젖어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내려앉았는데, 분수처럼 피가 쏟아지는 그 모습을 또 보라는 말입니까?”

    일리안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율리어스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울컥해 있었다.

    “황자가 제 손가락을 자르면요. 제 다리라도 잘라내면? 그가 못 할 것 같습니까? 일리안, 그는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제 몸에 무슨 짓이든 할 겁니다.”

    “나는… 버틸 수 있어. 그러니 유리, 그동안 네가 방법을 찾아. 제발, 유리.”

    “아니요, 일리안.”

    그의 침잠한 눈동자가 일리안의 눈을 직시했다.

    “제가 버틸 수 없습니다.”

    “…….”

    “그 전에 내가 죽어요.”

    율리어스의 목소리가 물에 젖은 솜 같았다. 일리안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우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율리어스는 일리안이 더 이상 제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한 번 더 그녀를 품속에 가두었다. 갈급한 손으로 몇 번이고 그녀의 등을 매만지던 율리어스는 고개를 숙여 일리안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죽는다는 게,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위험을 핑계로 당신을 이렇게 마음껏 안을 수 있다면요.”

    문득 일리안의 머릿속으로 이제껏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들지 못하던 율리어스가 스쳐 지나갔다. 그랬던 것이 모두 거짓이었던 것처럼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제멋대로 끌어안고서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율리어스의 일리안을 향한 욕심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느껴졌다. 그는 제 모든 욕심을 바닥 저 깊은 곳에 묻어두고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제 고삐를 붙잡았다.

    일리안이 눈을 기댔던 율리어스의 어깨 부근이 젖어 들어갔다. 일리안은 그 어깨에 얼굴을 떼지 않고서 중얼거렸다.

    “죽지 마.”

    “일리안.”

    “죽지 마라, 유리.”

    그녀의 간절한 바람과는 반대로, 주변에 심어져 있던 나무 몇 그루가 뽑혀 바람에 날아갔다. 더욱더 거세진 폭풍은 일리안과 율리어스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서 모두 없애 버릴 것처럼 불어대고 있었다.

    “다음 생에는,”

    “……어.”

    “저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과 같이요.

    그 순간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의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 * *

    “일리안, 늦었어요.”

    “유리. 밖에 나올 때는 겉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지 않냐.”

    “안 추워요.”

    어린 율리어스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추위를 타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얇은 튜닉 한 장 입고서 밖에 나와 일리안을 기다리다 그녀에게 혼이 나는 게 하루의 일과였다.

    아무리 어려도 멍청하지는 않았던 율리어스가 그 습관을 고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얇은 옷 1장으로 밖에서 일리안을 기다리면, 돌아온 그녀는 제 겉옷을 벗어 율리어스에게 입혀주었다.

    “……따뜻해.”

    일리안의 옷을 받은 율리어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일리안의 체취가 묻은 옷에 팔소매를 들어 코를 박고 냄새를 맡기도 했다.

    아무리 혼을 내도 그 버릇을 고치지 않던 율리어스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일리안이 감기에 걸렸을 때였다.

    일리안의 다달이 월세를 내는 조그만 집에는 방 안을 따뜻하게 해주는 마법 난로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율리어스는 그것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일리안이 뒤늦게 방 안을 따뜻하게 만들고는 했었다.

    그러다 일리안이 감기에 걸려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되자 놀란 것은 율리어스였다. 그는 열이 나면 주변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말에 제 마법을 부려 방을 데웠다.

    “……덥다.”

    정신을 차린 일리안이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땀이 날 정도로 더워 막 손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 제 옆에서 잠이 든 율리어스가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방이 뜨거웠다. 불 속에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더운 방 속에서 율리어스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잠들어 있었다.

    “하, 참. 땀도 안 흘리네.”

    자리에서 일어나 이상할 정도로 활활 타는 마법 난로를 꺼버린 일리안은 잠든 율리어스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아이의 이마를 툭 두드렸다.

    “추위도, 더위도 모른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네.”

    추위도 모르는 아이가 마법 난로를 켠 이유야 빤했다. 일리안이 픽 웃으며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제가 덮던 담요를 끌어 아이의 조그만 몸 위로 덮어줬다.

    추위도, 더위도 알지 못한다고 해서 따뜻함마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일리안의 기억 속으로 어렸던 율리어스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제 앞에 서서 나직이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도 현실 같지 않았다.

    “다음 생에는, 저도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율리어스는 웃지도, 그렇다고 울지도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묵묵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할 뿐이었다.

    그가 추위와 더위를 모른다고 해서, 감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해서, 혹은 드래곤의 피가 흐른다고 해서 인간이 아닐 수는 없었다.

    율리어스의 나이가 고작 스물이었다.

    이대로 죽기엔 못 해본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너무나 많았다. 행복조차도 잘 모르는 아이를 일리안은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율리어스.”

    일리안이 율리어스로부터 한 걸음 멀어졌다. 숨조차 멈춘 채 자신의 마나를 움직이던 율리어스가 감았던 눈을 뜬 것은 그때였다.

    그가 놀란 눈으로 한 발짝 일리안에게 다가왔다. 일리안의 바로 뒤는 폭풍이 도사렸고, 이제는 거기에 휘말렸다간 생채기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곧바로 몸이 찢어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때문에 율리어스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멋대로 마법을 부려 일리안을 다시 품에 안고 싶었지만 이미 모든 마나를 몸 밖으로 빼내는 중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전에 내가 그랬었지 않냐.”

    “일리안, 알겠으니 이쪽으로 오세요. 거긴 위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네 목숨을 바쳐서 살릴 수 있다면.”

    일리안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지만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붉어진 일리안의 눈가만큼이나 그녀의 목소리도 젖어들어 있었다.

    “너는 날 포기할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물었는데.”

    “……기억하고 있습니다.”

    율리어스는 이제 섣불리 말을 하는 것조차도 힘들어 보였다. 모든 마나를 빼내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그는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강제로 움직여 일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일리안이 다가오던 율리어스의 어깨를 손을 뻗어 밀어냈다.

    “내가 어째서 그렇게 물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

    “…….”

    “없겠지. 그래, 없어야 해. 그랬으면 너는 그렇게 대답해선 안 되었으니까.”

    침을 삼켰다. 아주 잠시 쉬었던 일리안은 이어서 말했다.

    “상대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게, 어쩌면 이기적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길 바라마.”

    품 안으로 손이 움직였다. 제 가슴팍을 뒤지던 일리안의 손에는 짧지만 날이 선 단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히말에게 붙잡혔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단검이었지만 모두의 눈이 자신을 향해 있던 터라 사용조차도 못 했던 검이었다. 고작 단검 하나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애썼지만 결국 실패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쓰려는 건 아니었는데.

    일리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일리안의 웃음을 보던 율리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율리어스, 네가 그랬었지. 나는 네게 늘 새로운 감정을 알려준다고.”

    “당신은 늘 제게……. 새로운 감정을 알려줘요.”

    일리안이 알려주고 싶던 것은 그런 불행한 감정들이 아니었다. 아홉 살이던 그를 처음 알았을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에 잘해주고 싶었고, 다시 만나 율리어스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깨닫게 하고 싶기도 했다.

    “이번에 알려줄 감정은, 네가 조금 아플지도 모르겠다.”

    단도를 양손으로 쥐었다. 거꾸로 쥔 단검은 상대를 향하지 않고 제 몸을 가리켰다.

    율리어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러나 그는 마나를 빼내느라 무리하게 힘을 쓴 만큼 손가락 하나조차 까닥이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었다.

    일리안의 단검이 그녀의 배를 갈랐다. 손잡이만 보일 정도로 깊숙이 들어갔던 단검은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피에 젖은 채로 빠져나왔다.

    몸을 가눌 수 없어진 일리안이 앞으로 쓰러졌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몸을 받들었다.

    힘이 풀려가는 몸으로 율리어스의 어깨에 다시금 기댔던 일리안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저 멀리, 히말과 함께 외곽으로 빠져 있던 황자의 배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일리안이 웃었다. 그녀는 웃는 낯으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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