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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2화 (92/123)

92.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

일리안은 손목이 묶인 채로 개처럼 잡혀 끌려가야만 했다. 황자를 선두로 한 일행이 대체 어디를 향해가고 있는지는 그녀조차도 의문이었다.

일리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제 손목에 이어진 줄을 잡은 채 떠들어대는 사내들의 이야기에서 정보를 훔쳐내는 것뿐이었다.

“이보시오, 이제 할 일도 끝났으니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응? 나머지 녀석들이 그 괴물 새끼 하나는 확실히 처리했을 거라고.”

핀튼 마을의 사내가 히죽 웃으며 지껄였다. 황자는 그것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히말은 사내에게 시선을 한 번 주었지만 이내 눈을 돌렸다.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사내가 일리안과 이어진 줄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제 앞에 있는 이가 황자라는 사실조차도 잊었는지 그 행동이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빌어먹을, 이깟 계집애 하나 잡고 있는 걸 얼마나 해야 한단 말이야?! 애초에 우리 약속은 사람 하나를 죽이는 거였잖소. 그 새낀 이미 처리했을 테니 돈만 주시오. 내 목을 걸고 장담하지!”

사내가 버럭 고성을 지르며 이야기하자 피해를 받은 것은 일리안이었다. 일리안은 피가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묶인 밧줄이 거칠게 흔들리자 손목에 얕은 생채기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황자가 우뚝 멈춰 섰다.

히말이 놀란 눈으로 황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장담?”

황자로부터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제 배를 잡고 꺽꺽거리며 웃자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황자를 바라보았다.

겨우 웃음을 멈춘 황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나른한 눈으로 제 앞에 있는 사내를 훑어보던 황자가 검을 뽑아 들었다.

사내의 목이 단숨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어…….”

사내의 뒤에 있던 부하들이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황자는 제 눈가에 튄 핏줄기를 손목으로 훔치며 미소 지었다.

“황자 전하, 이런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아아, 그렇지. 네가 해야 할 일이지. 그런데, 히말.”

툭, 투욱…….

황자의 손에 쥐어져 있던 피 묻은 검이 허무할 정도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비어버린 제 손을 히말에게 내밀었다. 아니, 내민 것은 정확히 손이 아니라 손목이었다.

“상처가 났지 않니.”

그의 손에는 실금 같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사내가 밧줄을 거칠게 잡아당기느라 일리안에게 났던 상처와 동일한 위치였다.

그것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던 일리안은 섬뜩, 소름이 돋았다. 자신과 황자의 몸을 마법으로 이었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면목 없습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히말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뒤로도 히말을 두드리는 황자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제 상관이 죽었다는 사실에 뒤늦게 항의하려던 핀튼 마을의 사내들도 히말마저 거침없이 때리는 황자의 모습에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들 중 1명이라도 황자의 행동에 반박했다간 상관과 마찬가지로 목이 떨어져 나가리란 것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10대, 15대……. 황자가 히말을 때리는 것은 멈출 일이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볼을 때렸던 손이 연이어 때리느라 머리나 귀를 때리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이봐.”

일리안의 나지막한 부름에 황자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나른하게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손목이 묶인 채이긴 했지만 발은 자유롭게 풀려 있는 채였다. 뒤에 서 있던 일리안이 성큼 앞으로 걸어왔다.

“그건 개가 아니라 사람이라.”

“…….”

“아니지, 개도 그렇게 때리면 안 되거든.”

히말이 부들거리는 고개를 들어 겨우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목이 묶여 있었지만 조금도 기죽은 기색이 없었다. 제 앞에 서 있는 사내가 방금 누군가를 죽인 직후라는 사실을 알 텐데도 불구하고.

일리안을 내려다보던 황자는 이내 감흥 잃은 눈빛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히말 또한 허겁지겁 그를 따라가야만 했다. 일리안에게 고마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일리안도 히말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생각은 없었는지 묵묵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는 사라진 상관을 대신해 핀튼 마을의 누군가가 일리안의 밧줄을 끌고 걸어갔다.

가장 시끄러웠던 사내가 죽자 일행에게는 고요가 찾아왔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나뭇가지 소리만이 전부였다.

“죽여! 죽이라고!”

“미친 새끼들! 그것밖에 못 해?!”

멀리서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다가가자 상대를 죽이라는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고 있었다.

황자는 반가운 것을 만나기라도 하는 마냥 활짝 웃었다. 그리곤 조급한 걸음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분명한 곳으로 움직였다.

가장 후미에서 뒤따라가던 일리안은 일행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자 당겨오는 밧줄에 어쩔 수 없이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안내판 하나가 보였다.

낡은 나무판에는 누군가의 조악한 솜씨로 ‘로체’라는 글씨가 패어 있었다.

로체?

로체에서 토벌을 하고 있는 무리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멍하니 끌려가던 일리안이 핀튼 마을의 사내들을 제치고 달려간 것은 그때였다.

“율리어스…….”

황자의 바로 옆, 손목이 묶인 채 선 일리안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허공에 떠오른 율리어스였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 순간, 율리어스가 이곳을 바라봤다.

그가 시선을 준 것과 동시에 율리어스의 몸에서 다시금 폭발이 일어났다. 그 소리에 놀란 일리안이 몸을 움찔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폭발 마법은 율리어스에게 상처 하나도 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장담하지 말았어야지.”

곁에 있던 황자로부터 웃음기 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는 제 옆에 있는 일리안에게 무언가 재미난 것이라도 알려주려는 듯 떠들었다.

일리안을 발견한 것이 분명한 율리어스가 천천히 이곳으로 향해오고 있었다.

“저 괴물 새끼를 제깟 것들이 죽일 수 있다고, 목을 걸고 장담하지는 말았어야지. 안 그러니?”

이곳에 오기 전 죽은 핀튼 마을의 사내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에 오지 않아도 율리어스가 그들의 공격에 죽지 않으리란 것은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듯, 황자는 양손으로 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일리안이 그제야 정신을 번뜩 차렸다. 다가오는 율리어스를 향해 일리안이 소리쳤다.

“오지 마. 율리어스, 오지 말란 말이다!”

괴물을 죽일 수 있는 마지막 방법.

다른 이가 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일 수 없는 저 사내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일리안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잖습니까.”

낮은 목소리였다.

무릎을 꿇은 일리안의 어깨를 누군가 부드럽게 감쌌다. 율리어스의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지만 그의 손길은 얕게 떨려오고 있었다. 소중한 것을 이제야 겨우 되찾은 사람처럼.

이곳에 도착한 일리안이 율리어스, 라고 속닥이던 소리마저 들은 율리어스였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일리안의 외침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일리안을 향해 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아, 오랜만에 뵙는군요. 리하르트 공?”

“손목에 상처가 났습니다.”

황자가 율리어스를 불렀지만 그는 듣지 못한 척 일리안의 손목을 묶은 밧줄을 끊기 바빴다. 그의 말대로 일리안의 손목에선 얕은 핏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시당한 황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일리안, 손목을 보여주세요. 치료해야겠습니다.”

일리안의 어깨를 감싼 율리어스가 그녀의 귓가로 속삭였다. 그가 그녀를 일리안, 이라고 부르는 것은 황자에게까지 닿지는 않았다.

황자의 의도를 깨달은 일리안은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채였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밧줄을 이미 자르고서 그녀가 손목을 내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일리안이 손목을 내밀 일은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손목에 흰빛을 가져가 제멋대로 치료를 시작했다.

“호오, 죽어도 마법은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굴기에 얼마나 무서운 능력인가 했더니. 율리어스, 당신도 힐링 마법은 제법 따뜻하군요.”

황자가 제 오른쪽 손목을 들어 보이며 히죽 웃었다. 그의 말을 듣던 율리어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황자의 손목에 나 있던 생채기들이 시간이 되감기는 것처럼 희미해지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 일리안의 손목에 났던 상처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였다.

그것을 확인한 율리어스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한 손으로 황자의 목을 움켜쥔 뒤였다.

“커억, 컥. 하하. 아하하!”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황자는 숨을 컥컥대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놀란 것은 뒤에 있던 히말이었다.

“뒤를 봐요, 리하르트 공. 으응?”

황자의 목줄기를 쥐고 있던 율리어스가 뒤돌아보자, 무언가에 조이는지 제 목을 양손으로 잡고 있는 일리안이 보였다. 율리어스는 자신도 모르게 쥐었던 황자의 목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일리안이 옆으로 쓰러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마찬가지로 숨을 몰아쉬는 황자는 히말이 껴안았고, 율리어스는 일리안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

얼굴이 붉어진 일리안이 겨우 숨을 고르고서 율리어스를 불렀다. 쓰러진 일리안의 몸을 품에 안은 율리어스가 새까만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가.”

“…….”

“가라.”

율리어스의 품에서 빠져나와 홀로 선 일리안이 그의 어깨를 밀었다. 일리안의 힘없는 손길에 밀려나면서도 율리어스는 꿋꿋이 그곳에서 버텼다.

“리하르트 공, 이제 아시겠어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아, 아직 모르는 것 같군요. 제가 알게 해드리죠!”

황자가 단도를 빼 들었다. 그는 미친 것처럼 웃으며 검으로 제 팔을 길게 긁었다. 분수처럼 피가 쏟아져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황자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일리안의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라고 했다, 율리어스.”

일리안은 부러 제 뒤에 서 있는 율리어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제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제 옷을 찢어 분주히 지혈을 시작했다.

그런 일리안의 팔에 닿아온 것은 차갑게 식어 있는 누군가의 체온이었다. 그의 손으로부터 흰빛이 흘러나왔다.

“리하르트 공,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리는 마법은 이런 느낌이었군요.”

황자는 히말이 힐링 마법을 시전하려는 것은 제지했다. 그가 그럴 필요도 없이, 율리어스가 일리안에게 힐링 마법을 시작함과 동시에 황자의 팔도 치유가 시작되었으니까.

“바라는 게 무엇인가.”

“드디어 저와 대화할 마음이 생기신 겁니까? 리하르트 공, 이제야 말이 통하겠어요!”

일리안의 팔이 치료가 끝나자 율리어스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커다란 등이 일리안의 앞을 막았다.

때문에 일리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보이지 않는 황자의 말을 듣는 것뿐이었다. 그가 힐링 마법을 해주기는 했지만 크게 베였던 팔이 완전히 치료되는 것은 아니라서, 제 오른쪽 팔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죽어요.”

웃음기 없는 황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리안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황자와 일리안의 사이를 막아선 율리어스의 등은 그의 죽으라는 말에도 움찔거리는 기색이 없었다.

“이곳에서, 지금 바로. 죽으세요, 리하르트 공.”

그러면 당신의 소중한 사람은 가만둘 테니.

황자의 이야기를 듣던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가 어떤 반응일지 궁금한 게 아니었다. 단지, 율리어스가 자신이 생각하는 일만은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일리안의 바람을 듣기라도 한 듯 율리어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죽음을 바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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