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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1화 (91/123)
  • 91. 죽음은 멀지 않기에

    폭풍이 그쳤을 때에는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옷이나 머리카락 따위가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부는 덕에 눈을 감았던 일리안이 그제야 눈을 떴다.

    그녀의 주변엔 달라진 게 없었다. 황자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핀튼 마을의 사내들 또한 동물원의 짐승이라도 구경하듯 일리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성공… 했습니다.”

    히말이 옆에서 나직이 말했다. 성공? 일리안은 그 말에 제 손가락 몇 개를 접었다 펴며 몸을 확인했다. 달라진 게 없는데, 대체 무엇이 바뀌었단 말인가.

    움직인 것은 황자였다. 그는 성공했다는 말에 제법 성급하게 일리안에게 다가왔다. 아직 몸이 묶여 움직이지 못하는 일리안을 황자가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히말이 제 품에서 짧은 단도 하나를 꺼내 들어 황자에게 건네었다. 날이 날카롭게 서 있어 조금이라도 스쳤다간 손가락 하나가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황자가 그것을 높게 쳐들었다.

    일리안은 순간 자신을 찌르려는 것인가 싶어 이를 꽉 물었다. 그럼에도 검을 주시하는 눈은 감지 않았지만, 곧이어 찾아올 고통을 견디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황자는 일리안에게 검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단도로 제 팔을 베어냈다. 길게 그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성공, 했구나.”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일리안은 제 팔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흠칫 놀라 고개를 내려 바라보았다. 조금밖에 젖어 있지 않던 팔뚝 부분의 옷감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황자가 단도로 일리안의 팔 부분 옷감을 찢어냈다. 그러자 놀랍게도 황자와 똑같은 자리에 상처가 나 있었다.

    황자는 일리안에게 검을 내린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꼭 직접 하셔야 했습니까.”

    “물론이지. 천한 놈들을 어찌 믿고. 일이 잘못되었다간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저를 사용하셨어도,”

    히말이 주섬주섬 붕대를 꺼내 들고 황자의 피가 흐르는 상처를 동여맸다. 묶인 채 눕혀진 일리안은 가만히 그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히말.”

    “예.”

    “널 그런 곳에 쓸 수는 없지. 안 그러니?”

    황자가 녹아내릴 듯 달콤하게 웃으며 히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히말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동여맨 붕대를 단단히 조일 뿐이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일리안 또한 알 수 있었다. 황자가 어째서 직접 제 몸과 일리안의 몸의 운명을 묶는 마법을 행했는지를.

    그는 아무도 믿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가장 충직한 수하인 히말조차도 배신할까 두려워 자신을 마법에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과연 히말이라고 해서 모를까.

    일리안은 제 손등에 흐르는 피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황자의 상처만 집중하는 히말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하아…….”

    에릭이 느릿하게 숨을 내뱉으며 제 볼에 묻은 진흙을 훔쳐냈다. 그의 앞에는 검도 잘 들지 않는 머드 골렘 1마리가 서 있었다.

    어서 율리어스, 저 사람에게 가야 하는데.

    그러나 리하르트 기사단의 수는 워낙 많았고, 때문에 넓은 범위에서 전투를 진행하고 있었다. 보이는 족족 달려드는 머드 골렘들을 뚫고 기사단 사이를 지나가기란 제법 어려운 일이었다.

    에릭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팔로 검을 휘둘렀다. 처음보다는 다소 느려진 그의 검이 머드 골렘의 가슴 정중앙을 찔렀다.

    아, 여긴 이미 베었던 곳인데.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머드 골렘의 조각난 몸뚱이가 원상 복귀되었다. 그곳에 핵이 없는 탓이었다. 다 비슷하게 생긴 머드 골렘을 해치우다 보면 종종 어디를 베었는지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에릭은 미간을 좁히고 전투에 조금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골렘의 느리지만 위협적인 팔이 에릭을 붙잡으려는 듯 다가왔다.

    레드 오크와의 전투 직후 로체로 달려오느라 내내 움직였던 다리가 납덩이라도 맨 것처럼 무거웠다. 그 탓에 에릭이 아주 조금, 주춤거렸다.

    한쪽 팔만 움직인다고 생각했던 골렘이 반대쪽 팔마저 움직여 에릭을 붙잡으려 들었다.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에릭이 아차, 싶었을 때였다.

    “에릭! 너 미쳤냐?!”

    골렘의 손등을 검 하나가 뚫어냈다. 놀랍게도 그곳에 숨어 있던 푸른 핵이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서 있던 머드 골렘이 진흙이 되어 사라졌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 정신 차려!”

    “……아니야.”

    죽을 생각 없다니까.

    에릭은 자신을 구해준 리트릭에게 고개를 까닥여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물처럼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도저히, 체력이 더 이상 버텨줄 것 같지가 않았다.

    리트릭이야 이제 막 전투에 시작했겠지만 에릭은 오전부터 레드 오크 토벌을 해온 터였다. 곧 토라도 나올 것처럼 거칠게 내쉬는 숨 탓에 가슴팍이 욱신거렸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아무래도 저쪽은 끝난 모양이니까, 이쪽으로 올 거야.”

    “……벌써?”

    벌써 전투가 끝났다고?

    에릭이 턱 끝으로 흐르는 땀을 한 번 더 닦으며 율리어스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았다. 너무 멀리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무리 하나가 슬슬 리트릭과 에릭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율리어스 님이 계신데, 뭐. 끝나도 이상하지는 않지. 아마 수십 마리는 넘게 잡으셨을 거다.”

    에릭과 리트릭이 잡은 머드 골렘이라 해봐야 고작 10마리를 넘지 않을 터였다. 둘이 잡은 골렘을 모두 합친 숫자였다. 사람이 아니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에릭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리트릭은 에릭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며 최대한 머드 골렘을 만나지 않기 위해 연신 주변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이곳은 기사들이 제법 많아 머드 골렘이 달려드는 경우가 적었다.

    “빨리 알려 드려야 할 텐데.”

    “그러게.”

    리트릭의 중얼거림에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던 에릭은 문득 웃었다. 자신도 모르게 헤이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어서 율리어스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탓이었다.

    물론 자신이 당장 찾아낼 수도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나 질투했던 사내가 아니던가.

    하지만. 에릭은 자신도 모르게 제 생각을 반박했다.

    “와, 가까워지는 속도가 엄청난데, 어? 잠깐. 가이우스 님! 율리어스 전하! 헤이븐 때문에 드릴 말씀이……!”

    더 지척에 있던 것은 가이우스였지만 먼저 돌아본 것은 율리어스였다. 제법 거리가 되는 데다 워낙 주변 소음이 시끄러워 일반적으로는 들리지 않을 텐데도 그는 ‘헤이븐’이라는 단어에 짐승처럼 반응했다.

    저런 사내를 자신이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당장에 헤이븐에게 필요한 이는 율리어스였으며,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조차도 자신이 그를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 잠깐. 날아오시는데?”

    리트릭과 율리어스 사이에 많은 장애물이 있는 탓에 이동이 쉽지 않자 율리어스의 몸이 가볍게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가 아래로 가라앉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율리어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말하라.”

    리트릭에게 시선을 고정하던 율리어스는 문득 그의 곁에 있던 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제야 에릭이 있음을 안 율리어스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3차 지원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텐데.”

    에릭은 그의 빛이 죽은 것처럼 새까만 눈을 마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헤이븐이 사라져서 먼저 왔습니다.”

    그 순간, 사위가 고요해졌다. 에릭이 놀란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입을 뻐끔거리며 무어라 소리치는 게 보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소리라곤 조금도 없었다.

    앞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율리어스가 그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에릭의 말을 듣기 위해 주변을 조용히 시키는 사일러스 마법을 행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라.”

    “……전투 중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주변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고, 3차 지원군 지휘관은 전투 중 실종자까지 챙길 수는 없다며 일정을 강행하는 탓에……. 여기까지 온 겁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에릭과 율리어스를 감쌌던 사일런스가 풀렸다. 주변 소음이 갑작스레 밀려들자 놀란 에릭이 몸을 움찔 떨었다.

    리트릭은 놀라지 말라는 듯 에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고, 율리어스는 무언가 생각하는지 가만히 있는 채였다.

    “3차 지원군이다!”

    뒤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오자 리트릭과 에릭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누군가의 말대로 하급 기사 일행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그곳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헤이븐의 탁한 붉은색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에릭은 침을 삼키며 율리어스의 반응을 기다렸다.

    “없군.”

    율리어스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릭이 그가 바라보는 곳을 따라 눈을 돌렸지만 에릭의 눈에는 그저 개미 떼처럼 많은 3차 지원군이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율리어스는 일리안이 그곳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던 율리어스가 다시 날아오른 것은 그때였다. 뒤늦게 달려온 가이우스가 에릭의 옆을 차지하고서 율리어스를 향해 외쳤다.

    “율리어스 님! 잠시, 잠시만……!”

    가이우스 또한 리트릭에게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가 어딘지 다급한 태도로 율리어스를 불러 세웠다.

    “헤이븐 님은 제가……! 제가 기필코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니 잠시만……!”

    그리고 그 순간, 날아오른 율리어스의 몸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마법이었다.

    율리어스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율리어스의 아래쪽에 있던 기사들 중 몇몇은 마법의 잔해에 경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율리어스였다. 폭발 마법을 직격으로 맞았으니 인간이라면 당연히 몸이 조각나 죽었을 터였다.

    “이런, 미친!”

    3차 지원군 측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에릭은 돌아가는 상황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아 이곳저곳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연기가 가라앉고서 보인 것은 아직 공중에 그대로 날고 있는 율리어스였다. 그의 옷자락이라도 찢어졌으면 모르겠지만, 율리어스는 폭발 마법을 맞기 전과 후가 동일했다.

    에릭이 그 모습에 섬뜩한 소름이 돋았을 때였다.

    율리어스가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3차 지원군에 섞여 있던 누군가가 죽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서 율리어스를 향해 무언가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에릭은 그것이 누군가를 확실히 죽이기 위해 만든 마법 물품들임을 깨달았다.

    “괴, 괴물 새끼! 목을 잘라! 목을 자르면 뒤질 것 아니야!”

    고함치는 사내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마법을 보내도 율리어스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은 없자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그들 쪽에도 마법사가 1명 있기는 했는지 검은 옷을 입은 사내 1명이 공중으로 날아들었다.

    율리어스는 눈 한 번 움직이지 않고서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검이 율리어스의 목에 닿았을 때였다.

    카앙.

    리트릭이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율리어스의 목에 검이 닿자 꼭 쇠붙이에 부딪힌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놀라운 것은 사내의 검에 분명히 검기가 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검을 잡고 있던 사내가 도리어 놀라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공중에 있던 사내의 몸이 무언가에 짓눌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율리어스 님! 제발, 제발 진정하십시오!”

    가이우스의 간절한 외침을 듣던 에릭은 그제야 깨달았다. 율리어스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에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자신을 암살하려는 이들을 저지하고 있었지만, 그는 제 목숨을 지키려 들지는 않았다. 상대가 하는 공격을 모두 받아내고서 그들이 실패하면 그제야 상대를 죽였다.

    율리어스는 분노하고 있었다. 일리안이 사라졌다는 것, 그를 화나게 한 것은 그 사실임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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