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90화 (90/123)

90. 개의 주인

“이상하다, 왜 아직도 모르지?”

이제껏 일리안의 등 뒤를 지켜주었던 소년의 말투가 뒤바뀐 것을 알았을 때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내내 오크 주술사라 생각해 오던 몬스터가 그림이 망가지듯 어그러지며 사람으로 뒤바뀌었다.

일리안이 먼저 고개를 돌려 소년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실행되지 못했다.

로브를 쓴 사내가 일리안에게 손을 뻗자 닿은 순간 몸이 딱딱하게 경직된 탓이었다. 오랜 감으로 일리안은 그것이 상위 마법 중 하나인 ‘홀드’임을 알았다.

“실례하겠습니다.”

로브를 쓴 이로부터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활을 든 상태로 멈춰 버린 일리안의 허리를 잡아 제 어깨로 올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일리안의 흔들리는 시야로 멀어져가는 오크 무리가 보였다. 그녀와 정반대편에서는 커다란 함성 소리와 함께 오크 전사를 상대하고 있었다. 누군가 일리안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주었지만, 오크들의 커다란 덩치에 의해 가려졌다.

그러고 보면, 무언가 이상했다.

오크 전사뿐만 아니라 이쪽에도 분명히 많은 오크 무리가 있는데도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오크 전사만 있는 것처럼 토벌을 마무리하기 바빴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때였다. 그녀의 주변에 서 있던 오크들이 천천히 정렬해 숲속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오크들, 아니 이제껏 오크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숲속을 빠져나오자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가 손을 움직였다. 사내의 손에서 보랏빛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오크들의 모습이 뭉개졌다.

곧 침을 흘리던 오크들이 사람으로 변했다.

“이런 망할, 기분 더럽네. 동물 가죽이나 뒤집어쓴 기분이잖아.”

일리안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제껏 오크가 되었던 제 몸에 무언가 묻었기라도 한 듯 옷을 탁탁 털어내는 이들의 몸짓은 천박함에 가까웠다.

이전 생에서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던, 핀튼 마을의 사내들이었다.

“이게 맞는 거요? 다짜고짜 우리 쪽 인원 중 반만 빌려 달라더니……. 고작 훔쳐 온 게 이깟 여자애란 말이오?”

난 또 무슨 귀한 보물이라도 훔치는 줄 알았네.

남자가 투덜거리는 어조로 툴툴댔다. 로브를 쓴 사내는 남자의 투덜거림도 못 들은 척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바빴다.

아무래도 무리의 대장 격이었던 듯 투덜거린 남자가 일리안의 이마를 툭툭 찔렀다. 눈을 제대로 깜빡이지도 못한 탓에 일리안의 말라붙은 눈가로 생리적인 눈물이 툭 흘러나왔다.

뒤에서 따라가던 남자는 일리안의 눈물을 확인하고서 수염이 가득 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얼굴을 지켜보던 그가 불쑥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우는데?”

그러자 로브를 쓴 사내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일리안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어디선가 밧줄을 가져왔다.

로브를 쓴 사내가 멈춰 서자 자연스럽게 모든 일행이 자리에 멈추어야만 했다. 로브를 쓴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일리안의 손목과 발목을 묶기 시작했다.

“눈을 감지 못해 많이 아프셨을 겁니다. 곧 홀드 마법은 해제해 드리겠습니다.”

사내가 썩 배려 깊은 어조로 말했다. 납치를 행하고 있는 이라곤 생각지도 못할 정도였다.

직접 밧줄로 일리안의 손목을 묶어가던 사내와 일리안의 시선이 문득 마주쳤다. 로브 아래로 머리를 길게 기른 그는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나지막이 마법의 해제를 알리는 주문을 외웠다.

이미 손목과 발목이 묶인 터라 일리안은 나무에 기대고 앉아 가만히 그것을 바라봐야만 했다. 홀드 마법이 풀리자 손가락을 까닥여 일리안이 제 몸을 확인했다. 그리곤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무슨.”

“그쪽 이름을 물었습니다.”

일리안의 말투는 납치된 이답지 않게 긴장한 구석이 없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저 처음 만난 사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핀튼 마을 사내들이 나타나 놀라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일리안은 핀튼 마을 사내들을 곁눈질로 훑어보며 제 앞에 있는 남자를 주시했다.

돌아가는 상황은 알지 못하지만 로브를 쓴 사내가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것임은 틀림없었다. 사내에게 이름을 물은 것은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 답을 하지 않아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었다.

“히… 말. 히말입니다.”

그 대답에 일리안이 씩 웃었다. 고작 이름 하나를 안다고 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내가 어떤 성정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일리안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느릿하게 머리를 굴려가고 있었다.

“거 소개라도 받은 건 줄 알겠네. 허튼소리 말고 이만 출발합시다.”

손발이 묶인 일리안을 든 것은 이번엔 히말이 아니라 핀튼 마을 사내 중 1명이었다. 짐짝이라도 드는 양 단번에 어깨에 멘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남자의 바로 뒤에서 히말이 따라오고 있었다. 거꾸로 어깨에 메어진 일리안은 우연히 그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자세였다.

“이봐요, 히말. 납치하는 이유가 뭡니까?”

“예?”

“왜 납치하는지는 알고 당해야 할 것 아니야, 나도.”

일리안이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묻자 히말은 오히려 당황해 입을 뻐끔거렸다. 앞머리가 긴 데다 로브에 달린 모자를 쓰고 있어 그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히말이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그를 당황시키기 위해 일리안이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어이, 꼬마야. 네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나 본데, 입 닥치고 조용히 가라. 손에 어린놈 피 묻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입 닥치고 조용히 있으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있나. 그리고 손에 피 묻힐 거였으면 이미 묻혔겠지. 데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살려서 데려가는 거 아닙니까?”

업고 있던 사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일리안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당장 응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와락 찌푸린 사내가 어깨에 멘 일리안을 바닥으로 던지려 했을 때였다. 손발이 묶인 채이긴 했지만 일리안은 조금이라도 낙법을 펼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바닥에 닿기 전, 그녀를 받아 든 것은 히말이었다.

“조심히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셨다?

일리안은 히말의 말을 곰곰이 되짚었다. 히말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보아하니 당장 이들의 윗사람을 만나러 가는 듯했다. 그러자 생각나는 이가 1명 있기는 했다.

황자의 아래에 이런 마법사가 있었나.

이전 생에도, 그리고 이번 생에도 황가에 대해선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어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일리안은 히말의 품에 안긴 채 로브에 그림자 진 그의 턱을 올려다보았다.

“알게 뭐요! 우리가 이딴 잡일 하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사람이나 죽이라고 명령할 때는 언제고, 이딴 헛짓이나……!”

“입 다무십시오.”

“뭐?!”

히말과 핀튼 마을 무리의 대장 격으로 보이던 사내 사이의 분위기가 흉흉하게 변했다. 뒤에 있던 부하들은 더러운 제 대장의 성격을 아는지 함부로 나서서 저지시키기를 주저했다.

그 분위기를 무마한 것은 일리안이었다.

“안 그래도 그쪽 어깨가 워낙 딱딱해서 그대로 가기는 좀 불편했는데, 잘되었네. 기왕 가는 거 이렇게 갑시다.”

“저, 저……!”

일리안은 보란 듯이 태평한 어조로 히말의 품에 안겨 힘을 풀었다. 사내가 그런 일리안의 태도에 뒷목을 짚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녀는 부러 팩 고개를 돌려 히말의 품속으로 얼굴을 숨겼다.

히말 또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팔에는 일리안이 안겨 있는 채였다.

안긴 채 숲속을 지나가던 일리안이 문득 눈을 내리자 그녀의 팔을 짚고 있는 히말의 손이 보였다. 그녀가 자못 궁금한 어조로 물었다.

“귀한 마법사 손에 웬 흉터랍니까.”

오래 보진 않았지만 히말의 성격이 대강 짐작 가기에 던진 말이었다. 대답을 해주면 정보를 얻어 좋았고, 무시하면 그것도 손해는 아닌 질문이었다.

“신경 끄십시오.”

그런데 놀랍게도 수더분해 보이던 히말의 입에서 까칠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일리안은 의외의 반응에 슥 고개를 돌려 히말을 올려다봤다. 그는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걸어갈 뿐이었다.

“그렇게 나오면 더 신경 쓰이는데.”

일리안이 히죽 웃었다. 히말은 일리안과의 거리가 워낙 가까워 들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부러 그녀의 반응을 무시로 일관했다.

그 뒤로도 제법 오랫동안 숲속을 걸어갔다. 그 시간 내도록 안겨 있던 일리안은 히말의 팔이 멀쩡한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렇게 생겼구나, 헤이븐 윈터가.”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남자의 앞에 히말이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인 히말은 제물이라도 바치듯 제 품에 안겨 있던 일리안을 들이밀었다.

바위에 앉아 있던 황자가 가볍게 뛰어 내려와 히말의 앞에 섰다. 허리를 숙인 황자는 좌판에 내놓인 상품이라도 보듯 일리안을 훑어 내렸다.

“고생했어, 히말.”

황자가 손을 뻗어 애완견을 만질 때처럼 히말의 머리를 매만졌다. 히말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그 손길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이상한 관계.

히말과 황자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분위기에 든 생각이었다. 고작 시종과 주인의 관계라기에는 어딘지 긴밀해 보였고, 그렇다고 황자에게 있어 히말이 대단히 소중한 존재라기에는…….

“하지만 히말, 내가 분명히 말했지 않니. 조심히 데려오라고.”

황자가 여상한 목소리로 일리안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녀의 팔 부분 옷감이 붉게 젖어 있었다. 오는 도중에 핀튼 마을 사내가 일리안을 내던졌을 때 우연히 난 상처였다.

그 상처가 워낙 작아 일리안도 미처 신경 쓰지 않던 부분이었다. 붉게 젖은 부분도 범위가 넓지 않아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가리킴을 바라본 히말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히말, 손.”

개를 대하는 것 같았다. 황자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히말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그의 손 위로 올렸다. 흉터가 잔뜩 난 히말의 커다란 손이 얹어졌을 때였다.

푹.

황자의 잘 손질된 손톱이 히말의 손등을 파고들었다. 꼬집었다, 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그의 기다란 손톱이 손등을 반쯤 파고든 것이 일리안의 눈에도 보였으니까.

그러나 히말은 움찔거리지도 않고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리는 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황자는 해맑게 웃으며 히말의 머리를 헤집었다.

“잘했어, 내 강아지.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시작?

일리안의 머릿속으로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들어 황자를 올려다보았을 때에는 이미 그가 제 머리카락 하나를 뽑고 있었다.

그는 우아한 손길로 그것을 히말에게 내밀었다.

히말은 말없이 머리카락을 받아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자는 멀찍이 물러나 핀튼 마을 사내들과 함께 일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요, 히말.”

자리에서 일어선 히말은 일리안의 마법으로 길어진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머리카락 하나와 백금의 머리카락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가 정확히 무엇을 시작하는지는 모르지만, 일리안은 다급히 히말을 불러 세웠다. 그의 손이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는 탓이었다. ‘마법’의 시작이었다.

“당신은 개가 아니라 사람이잖습니까.”

“…….”

그녀의 말에 히말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히말과 일리안의 주변은 거센 바람이 불어 멀찍이 떨어진 황자에게까지 목소리가 들릴 일은 없어 보였다.

히말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것을 확인한 일리안이 연이어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그를 조금만 더 건드려보면…….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야지, 안 그래요?”

허공에 보랏빛 실로 무언가를 그려가던 히말의 손이 잠시 멈춰 섰다. 바깥에 서 있던 황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여기서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히말의 손은 이내 흔들림 없이 움직였고, 마침내 허공에는 마법진 하나가 완벽히 그려졌다.

“헤이븐 님, 개의 이름을 불러줄 주인은 하나뿐입니다.”

일리안의 몸 위로 거대한 보랏빛 폭풍이 몰아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