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89화 (89/123)

89. 전열 이탈

“저쪽 잡아! 오른쪽 똑바로 막지 못해?!”

누군가 어깨에 힘을 실어 밀어대는 탓에 에릭은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우측을 막아서야만 했다. 오크 전사 서넛이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헤이븐이 자리에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게 바로 몇십 분 전의 일이었다. 전투 중이니만큼 원래 자리에 없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지만, 에릭이 그 근방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함성을 질러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에릭이 전장을 이탈하려는 순간, 다른 기사들의 떠밀림에 그는 이쪽으로 온 것이었다.

혹시 이곳에 먼저 와서 오크들을 처리하고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아도 헤이븐의 붉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다.

“어이, 형씨! 왜 자꾸 딴생각해?! 죽고 싶어!”

누군가 한 손으로 에릭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손길에 힘이 실린 것이 짜증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제일 선두에 서서 자꾸만 먼 곳을 바라보니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티가 났다.

“아니요.”

“뭐?”

토벌에 참가했던 첫날, 하프 울프 떼를 만나기 전 헤이븐이 말했었다. 모든 전투에서 네 힘을 최대로 발휘하지 말라고.

10할이 있다면 2할을, 100할이 있다면 10할을 발휘하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일리안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에릭은 자신이 짐꾼으로 지원했기 때문인 줄 알았다. 기사인 줄 모르던 주변 사람들이 그가 상급 기사 자격증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귀찮은 일이라도 생길까 봐.

“야, 이 미친 새끼야. 죽으려고 그래?”

기사가 되려고 결심했을 때, 그가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에릭은 다른 이들보다 늦은 나이에 기사 수련생으로 들어갔다. 그의 곁에 있던 리트릭만 해도 일곱 살부터 기사를 꿈꿨으니, 열일곱에 수련생으로 들어간 에릭이 얼마나 늦되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처음 수련생 초급반 과정에 들어갔을 때, 곁에 있던 아이들의 나이는 전부 열 살 언저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그곳에서 가장 최하위 실력이었다. 내도록 범선이나 배우던 그가 검을 쥐는 방법을 알 리가 없었다.

커다란 덩치의 에릭은 제 허리에도 닿지 않는 아이들 사이에서 검을 잡았다. 지나가던 이들이 창피한 줄도 모른다고 혀를 차도 귀가 들리지 않는 척 굴었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중급반에서 기본은 하는 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봤자 제 나이 또래에 비하자면 한참은 늦었기 때문에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늘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런 그에게 렉스 단장이 말했다. 죽고 싶냐, 고.

그렇게 검을 휘두르다간 근육이 터져 죽을 거라고.

“죽을 생각 없습니다.”

반듯하게 검을 잡은 에릭이 턱을 아래로 내리고 앞을 주시했다. 그를 재촉하던 사내는 주변 소음 때문에 에릭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어깨를 짚기 위해 손을 뻗었다. 오크 전사 서넛의 기세가 대단해 한 걸음 뒤로 빠지라는 명령이 내려온 탓이었다.

앞에 몰려 있던 여러 기사들이 점차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리에서 버려지듯 홀로 선 에릭만이 보였다. 기사들 중 몇 명이 그에게 손을 뻗어 데려가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그의 검에서 찬란한 빛이 뻗어 나왔기 때문이다.

에릭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하얀 빛은 이내 물줄기가 흐르듯 검으로 흘러갔다. 그 검이 횡으로 그어지자 오크 세 마리의 몸에서도 흰빛이 작렬했다.

“할 일이 있어서 못 죽습니다.”

죽고 싶은 거냐고 묻던 렉스 단장에게 에릭은 그렇게 대꾸했다. 자신은 할 일이 있어 죽지 못한다고, 죽으면 안 된다고.

물론 그때에는, 다른 이유였지만 지금도…….

오크 전사가 처리되자 에릭이 검을 납도 했다. 그리곤 뒤로 돌아 얼이 빠져 있는 사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에게 죽고 싶냐고 물었던 사내이기도 했다.

“제가 할 일이 있어서, 못 죽습니다.”

에릭은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 벙찐 채 있는 기사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고작해야 하급 기사들 몇 명이 모인 곳에서 검기를 볼 줄은 아무도 예상을 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주변을 훑어봐도 조금도 보이지 않는 헤이븐의 모습에 에릭이 제 목을 양쪽으로 움직이며 근육을 풀었다.

“내 평생의 할 일은 네가 만들어주는구나, 헤이븐.”

* * *

“야, 인마. 리트릭. 어제 재밌었냐? 어?”

“하하……. 재미는요, 무슨.”

옆에서 행군을 하고 있던 기사 1명이 툭 던지자 리트릭은 멋쩍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곤 속으로 망할 렉스 단장, 을 외쳤다.

렉스 단장의 술주정으로 인해 오늘의 토벌 작전이 긴급히 잡혔다는 소문과 함께 그 술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공동 표적이 되었다. 필립 같은 고참들이야 우스갯소리로 흘려들어도 상관없지만 리트릭처럼 신출내기라면 하루 종일 굽신거리고 다녀야만 했다.

오늘 하루만 되어도 저렇게 농담인 척 말을 하는 이들이 수십은 되었다. 물론 그것에는 전부터 까불거리던 리트릭의 성격도 한몫을 했지만 그는 렉스와 율리어스를 원망했다.

“오늘부터는 가이우스 님도 같이 간다며?”

가이우스라는 말에 리트릭의 귀가 앞으로 쏠렸다. 리트릭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존경하는 인물인 탓이었다.

“가이우스 님 역할이 원래 3차 지원군 인도까지였으니까, 뭐……. 원래 자리로 오셔야지.”

가이우스에게는 기사단 내에서 특별한 직함이 없었다. 그는 그저 율리어스의 보좌관이기 때문에, 다들 가이우스 ‘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이 모두 그를 존중하는 것은, 그가 예전부터 유명한 기사이기도 하거니와 전투가 있을 때면 다른 보좌관들과는 달리 검을 빼 들고 전투에 참가하기 때문이었다.

“가이우스 님이라도 있으면 좀 괜찮으려나……. 으윽, 나 비위도 약하단 말이야.

“로체가 그렇게 힘드나?”

“아, 이 새끼 저번 로체 토벌 전에 입단했지? 말도 마라. 황궁 기사단도 웬만해서는 로체 말고 마칼루로 가는 이유가 있다니까.”

“책에서 읽어보니까 핵만 뚫으면 다 바스라진다던데?”

“인마, 글처럼 쉬웠으면 내가 이랬겠냐? 검기로 베어도 잘 안 베어지는데 무조건 다시 붙지, 핵 위치는 골렘마다 랜덤이지. 한 번 싸우고 나면 숨넘어간다, 진짜.”

마찬가지로 로체 전투는 처음이었던 리트릭이 그 대화를 엿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체력전이라니까, 조금 페이스를 느리게 가져가면…….

“장기전이면……. 근데 3차 지원군도 온다며? 그네들 끼면 좀 할 만하지 않겠어?”

“3차 지원군이요?!”

몰래 듣고 있던 리트릭이 앞서가던 두 사람의 어깨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3차 지원군이라면, 제 친우인 에릭과 헤이븐이 속한 곳이 아니던가.

리트릭이 갑작스레 끼어들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리트릭의 성격을 아는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꾹 밀었다. 도로 돌아온 리트릭이 자못 궁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뭐, 들어보니 레드 오크 토벌하고 로체로 넘어온다던데?”

“아니, 대체 왜? 3차 지원군이면 죄다 하급 기사 아니냐? 골렘 잡는데 끼면 더 번거로워질 것 같은데…….”

대화를 나누던 사내가 하급 기사들의 수준이 떠올랐는지 흠, 하는 불편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리트릭이 다급하게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바쁠 때 고양이 손이라도 있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예?”

“그렇기는 한데……. 그래도 말이야.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잖아. 보통 하급 기사들은 산 아래를 맡지 않나?”

“그게, 내가 좀 들었는데.”

남자가 대화의 맥을 끊고서 침을 삼켰다.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라도 들은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사내와 리트릭 또한 그의 입술에 시선을 모았다.

“……위험하대.”

“뭐?”

“율리어스 님이 그러셨다더라. 3차 지원군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같이 있어야 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리트릭과 다른 사내의 얼굴로 비슷한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다 리트릭은 뒤늦게 그곳에 헤이븐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설마, 싶은 마음으로 얼굴을 확 찌푸렸다.

설마 헤이븐에게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시죠, 율리어스 님……?

설마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바로 어제 일련의 상황들을 보자면 신빙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리트릭은 제 이마를 붙잡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러는 사이 이야기를 나누던 다른 이들은 이미 제멋대로 추리를 하고 있었다. 3차 지원군에 스파이가 있다느니 하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위험하다는 거지! 3차 지원군에 사실 율리어스 님을 음해하려는 스파이가 있는 거야.”

“이 자식아. 그러면 보통 멀리 떨어트려 두지 왜 데려가?”

“그야 율리어스 님이니까! 그분이 자기 죽일 수도 있는 놈 멀리 두겠냐? 가까이에 두고 처리하겠다는 거지.”

그 말을 듣던 사내는 이내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리어스’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인 듯했다.

“골렘이다!”

앞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리트릭을 포함해 주변에 있던 모든 기사들이 진중한 얼굴로 허리에서 검을 빼 들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로체 입구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리트릭은 선배들의 조언대로 페이스를 길게 가져가기 위해 다급하게 움직이지 않고 천천히 골렘을 하나씩 상대하기 시작했다.

“핵을 노려라, 이놈들아!”

앞장 서 있던 렉스의 우렁찬 목소리가 산맥을 울렸다.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는 싸움에 체력 관리에 들어간 것은 리트릭 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여유롭게 골렘을 상대하고 있었다.

“야, 리트릭! 그래서 3차 지원군은 언제 온대?!”

“저도 모릅니다!”

리트릭이 버럭 소리 질렀다.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골렘에 전투가 계속되자, 슬그머니 3차 지원군을 찾는 이들이 보였다. 정신없이 골렘들을 상대하던 리트릭도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마침 상대하던 골렘의 핵을 없앤 리트릭은 땀을 닦고서 다시 전장에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리트릭.”

리트릭은 갑작스레 제 어깨를 붙잡는 누군가에 자신도 모르게 뒤로 검을 휘둘렀다. 검이 멈춘 것은 상대의 바로 목 앞이었다.

“죽을 뻔했네.”

“에릭?!”

에릭이 씩 웃으며 그의 검날을 한 손으로 밀었다. 리트릭도 화들짝 놀라며 제 검을 아래로 향했다.

“네가, 왜 여기…….”

“헤이븐이 없어졌어.”

그 순간 리트릭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뭐?”

“로체에 오기 바로 직전에 레드 오크 토벌을 했는데,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사라졌다.”

문득 리트릭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3차 지원군이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같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율리어스의 말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산맥을 다 뒤져볼 수는 없어서. 일단 제일 가까운 너한테 오기는 했는데…….”

리트릭과 에릭이 동시에 앞을 훑어보았다. 그곳에서 누군가의 머드 골렘 무리가 나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트릭은 그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암만 나라도 이 산맥에서 헤이븐은 못 찾거든. 뭐, 여기서 사람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일걸.”

그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리트릭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리트릭은 자신과 정반대편, 가장 선두에 서서 머드 골렘 무리를 처리하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저어기 보이냐. 저기가 율리어스 님이랑 가이우스 님 계신 곳인데…….”

저기 가려면 목숨 걸고 가야 하거든?

에릭과 리트릭이 있는 곳은 율리어스가 있는 선두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사이에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기사들은 물론 이제야 나타난 머드 골렘 따위가 도사리는 채였다.

“하아, 전열 이탈하면 렉스 단장한테 죽는데…….”

“헤이븐한테 책임지라고 해. 율리어스, 그 사람이 하는 거 보니까 책임져 줄 수 있겠던데.”

과장스럽게 제 얼굴을 마른세수하던 리트릭이 고개를 들었다. 에릭과 리트릭이 동시에 검을 빼 든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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