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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88화 (88/123)
  • 88. 이상하다

    일리안은 느릿하게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활대에 걸쳐진 화살에 바짝 힘이 실렸다. 이전 생의 몸처럼, 어느새 조금 굳은살이 박인 검지가 그것을 탁 놓는다면 그대로 날아가 오크를 잡을 터였다.

    피잉―.

    화살 하나가 빠르게 날아가 미간에 적중했다. 그것을 마주하고 있던 한 기사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활을 들고 있던 일리안과 눈이 마주치자 꾸벅 고개를 숙여왔다. 일리안은 대강 턱짓하곤 이미 다른 쪽을 훑어보았다.

    “이런, 망할. 이쪽이 레드 오크 전사다!”

    한 남자의 외침에 그 소리를 들은 대부분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렸다. 남자의 말대로 다른 오크들보다 현격히 크기가 큰 놈들이 조악한 무기를 든 채 달려오고 있었다.

    소리친 남자는 검을 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 수가 제법 되기도 하거니와 다른 레드 오크들에 비해 속도가 빨랐다. 이제껏 상대하던 느려 터진 것들과는 달라 지레 겁이라도 먹은 모양이었다.

    “여, 여기 도움!”

    레드 오크가 휘두른 조악한 막대를 남자가 검으로 막았다. 그러나 그의 바로 옆으로 또 다른 오크 1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남자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들어주는 이가 없자 그가 숨을 들이켜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피이잉, 푹.

    그의 귀에 무언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질끈 감았던 남자가 천천히 실눈을 떠서 주변을 살폈다. 그는 그제야 눈을 크게 뜨고 제 옆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눈 감으면 죽어요, 아저씨.”

    20대 초반? 아니, 10대 후반?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얼굴의 여자가 씩 웃었다. 옆으로 쓰러진 2마리의 레드 오크는 화살 몇 대를 맞고 눈을 뜬 채 죽은 뒤였다.

    “고, 고, 고맙다…….”

    일리안은 그 말에는 대강 고개를 끄덕거리고서 제 뒷목을 긁으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급박해 보이기에 도와줬을 뿐, 다른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용병이 된 나이는 스물이었다.

    그 뒤로 마흔이 되기까지 용병으로 활동하였으니, 이 바닥에서 구른 지만 스무 해였다. 남들은 마다한다는 그리폰 전문 토벌 작전이나 크라켄 바다 사냥에도 뛰어들었으니 레드 오크를 토벌하는 것쯤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목숨이 걸린 위험한 작업일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진지한 얼굴로 오크들을 상대하고 있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에릭이 보였다. 아마도 태어나 몬스터를 처음 만나봤을 에릭은 기사 수련생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정석적인 움직임으로 하나씩 처리해 가고 있었다.

    일리안이 그의 전투를 돕기 위해 다시 화살을 뽑아 들었을 때였다.

    “사, 살려줘요!”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번뜩 고개를 돌렸다. 아직 소년으로 보이는 기사 1명이 레드 오크 전사를 상대하다 검을 놓쳐 버린 상태였다.

    일리안은 에릭을 도와주는 것은 미뤄두고서, 레드 오크 전사를 향해 화살을 겨눴다. 조금이라도 빗맞았다간 소년의 어깨를 관통할 수도 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급박했다. 탁, 시위를 놓자 경쾌한 바람 소리가 화살을 스쳐 지나갔다.

    “허억!”

    소년은 자신의 귀 바로 옆을 화살이 지나가자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가 숨이 넘어갈 듯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바로 제 눈앞에서 레드 오크가 뒤로 쓰러지자 삐거덕거리는 목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이제 숨 쉬어도 되는데.”

    일리안이 활을 한 손에 쥔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활을 잡지 않은 손으로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일리안이 내민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 난 소년이 소심하게 일리안과 바닥을 번갈아 훔쳐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 고마워…….”

    “여기, 검.”

    “어? 어……!”

    일리안이 허리를 굽혀 떨어진 소년의 검을 주워주자 그것 또한 어딘지 엉성한 모양새로 받아들었다. 소년은 허둥지둥 검을 양손으로 쥐고서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런 소년을 보던 일리안은 이내 픽 웃었다. 그의 움직임이 기사나 용병이라기엔 어딘지 부족함이 많아 보이는 탓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이들이 대개 토벌 작전에서 어떤 말로를 맞는지쯤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돈이 부족해 정확히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지원부터 한 케이스일 터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어렸던 율리어스와 라울이 생각나 마음이 가던 찰나였다.

    “저, 저기…….”

    “어.”

    “무서워서 그런데……. 나,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요?”

    도와줘?

    일리안은 소년의 질문이 어딘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이런 토벌 작전에서 목숨을 구해주면 고맙다고 하거나, 다음에도 잘 부탁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무언가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소년이 자꾸만 어딘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훑어보자 그저 전장을 몹시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일리안은 곧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도움.”

    “어? 어?”

    “무슨 도움이냐고 물었는데.”

    “저기 보여? 저어기 있는 건데…….”

    소년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일리안이 눈을 찌푸리고 그가 가리킨 곳을 보자 레드 오크 서너 마리가 그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레드 오크 주술사가 저기 있어. 저, 저걸 잡아야 해서…….”

    “왜.”

    “으, 응?”

    “왜 잡아야 하냐고.”

    일리안은 부러 무뚝뚝한 어조로 물었다. 율리어스와 라울이 생각나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는 했지만, 그의 부탁에 제 목숨을 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던 소년이 이윽고 결심한 듯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그러나 막상 눈이 마주치자 그는 움찔 몸을 떨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아버지가 레드 오크 주술사에게 돌아가셨어. 유품이라도 얻고 싶어서 여기 지원했거든…….”

    “레드 오크가 에오피아 산맥에 몇 마리나 있는 줄은 아냐. 부락만 해도 서넛은 넘는데, 저놈이 네 아버지를 죽인 놈인 줄 어떻게 알고.”

    “화, 확실해! 유언으로 초록색 뼈 목걸이를 했다고 하셨단 말이야. 저 녀석이 분명해!”

    소년은 숫제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일리안에게 매달렸다. 울먹거리는 모양새가 어딜 보아도 토벌 작전에 지원할 마음씨는 아닌 것 같았다. 돈 때문에 지원한 것인가 싶었더니, 무슨 기막힌 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는 할 줄 아는 거라곤 검밖에 없어서 멀리 있는 저 녀석에게 다가가기가 어려워. 너는 중간에 빠져도 좋아! 같이 가기라도 해줄 수 있어?”

    소년의 눈에는 자그마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일리안이 자신을 구해줬으니 제 부탁도 들어주리라 생각한 듯했다.

    일리안은 그런 소년을 바라보다 이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에게는 단호한 말투의 대답이 돌아갔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

    제 말을 마친 일리안은 이내 아래로 내렸던 활을 다시금 고쳐 잡았다. 어디선가 북동 방향으로 도움을 달라는 목소리가 들려와 그곳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소년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부탁한 것은 일리안의 실력으로 어렵지는 않았지만 소년과 함께 전선을 이탈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토벌 작전은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리안은 걸음을 떼었다. 아니, 떼려 했다. 그것을 저지한 것은 발치에 매달린 무언가였다.

    “제발. 제발! 한 번만 부탁할게! 너, 어제부터 지켜봤는데 활을 정말 잘 다루더라. 너 정도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응? 이렇게 부탁할게, 제발.”

    이제껏 소심하기 짝이 없던 소년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일리안의 발치에 엎드려 발목을 양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쥐고 있던 검은 이미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뒤였다.

    이런 식으로 굴면 이 바닥에선 죽기 딱 좋은데.

    일리안은 그런 소년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겁도 없이 전장에서 제 목숨을 구해줄 무기를 내동댕이친 걸 보니 딱히 목숨에 대한 경각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인마, 투정은 집에 가서 하자.”

    일리안이 다소 귀찮은 기색으로 발목을 흔들어 소년의 양손을 털어냈다. 사실, 그렇게 어렵기만 한 일은 아닌 터라 들어줄 수도 있었지만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리안의 오래된 감이 자꾸만 적색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주, 죽을 거야!”

    “뭐?”

    “죽을 거라고!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난 가서 죽어버릴 거야!”

    그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은 제 목숨이 남에게는 사실 그다지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도.

    원래 그런 곳이었다, 이곳은.

    “검 들어라. 정말 죽고 싶은 게 아니면.”

    고개를 숙인 채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소년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일리안이 성가시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려는 기색은 없었다.

    죽어버리겠다는 협박에 마음이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모습에 율리어스가 잠깐이나마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자신이 없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은 눈을 하던, 그 아이가.

    “유품이 얻고 싶은 거냐, 아니면 복수를 하고 싶은 거냐.”

    일리안이 나지막이 묻자 꽥꽥 소리 지르던 소년은 다시금 돌아와 대답을 주저했다. 그러나 이내 머뭇거리는 모양새로 속닥였다.

    “유, 유품…….”

    “망할, 귀찮게.”

    그 대답에 소년이 잔뜩 얼어붙어 일리안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바닥에서 검을 주워 들고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레드 오크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일리안이 화살 2개를 활대에 걸쳤다. 몸을 조금 아래로 숙인 채 다른 기사들과 싸우기 바쁜 레드 오크들 사이를 슬그머니 걸어갔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기사들보다 레드 오크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부족마다 하나밖에 없는 주술사들은 가장 후미에 있기 때문에, 위험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 맞냐.”

    “으, 응!”

    소년 또한 좌우를 살펴보며 일리안의 등에 제 등을 맞댔다. 그녀가 활로 오크 주술사를 노릴 동안 다른 오크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일리안은 걸쳐두었던 화살로 주술사를 노렸다. 1발. 다른 오크들에 비하자면 가죽이 두껍지 못하니 주술사를 죽일 화살은 단 1발이면 충분했다.

    숨을 멈췄다. 화살 하나가 오크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어?”

    곁에 있던 소년이 작게 의문 어린 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리안이 날려 보낸 화살을 다른 오크가 움직이는 바람에 대신 맞은 탓이었다. 화살을 맞은 오크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거리가 너무 멀었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느라 그다지 가깝게 다가가지 않은 탓이었다. 가까스로 주술사가 활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정도였으니, 다른 오크가 뛰어들다 맞아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시금 화살을 꺼내든 일리안이 천천히 주술사를 향해 몇 걸음 더 다가섰다.

    “이, 이상하다…….”

    소년이 속삭였다. 그 속삭임에는 미묘한 부추김이 들어 있었다.

    쏘아낸 다음 화살도 다른 오크가 맞았다. 후, 하고 숨을 깊게 내쉰 일리안은 조금 더 주술사를 향해 가까이 갔다.

    이제는 다른 오크가 끼어들기도 힘들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당장 이곳에서 빠르게 주술사를 화살로 맞추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이상하다, 왜 아직도 모르지?”

    등 뒤에서 속닥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껏 소심하고, 말을 더듬던 소년의 목소리는 오간 데 없었다. 일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있던 주술사의 형상이 그림이 망가지듯 헝클어졌다. 그 대신 나타난 것은 온몸을 가리는 로브를 입은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남자의 손에는 이유 모를 흉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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