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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87화 (87/123)

87. 활잡이

일리안이 눈 아래가 까맣게 죽은 채로 천막에서 빠져나왔다. 그녀의 뒤에는 에릭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술자리가 중간에 파투 되기는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각에 잠이 든 터였다. 더군다나 상관으로부터 오늘 토벌 작전이 갑작스레 잡혔다는 소식에 새벽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어젯밤 일리안과 에릭, 리트릭을 따라온 율리어스였다. 천막 바로 앞까지 따라오던 그는 일리안과 에릭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자신도 걸음을 멈추었다.

리트릭은 분위기에 휩쓸려 제 숙소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그곳까지 간 뒤였다. 에릭이 다른 기사단의 것에 비하자면 낡고 초라한 제 숙소를 힐끔 보고서 곤란한 투로 말했다.

“……그, 어디까지 오시는 겁니까?”

“이곳인가.”

율리어스가 무감한 시선으로 녹이 슨 지지대나 오염물이 묻어 있는 천막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그다지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일리안과 에릭, 그리고 리트릭은 그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속으로 앓고 있었다. 감히 공작 전하를 누가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보다 못한 일리안이 나서서 그를 돌려보내려 할 때였다.

“율리어스 님!”

멀리서 가이우스가 달려왔다. 그를 발견한 리트릭의 얼굴은 밝아졌고, 에릭과 일리안 또한 그의 등장을 반겼다. 가이우스는 제법 숨 가쁘게 달려온 듯 이마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율리어스 님, 대체 어딜 가셨던 겁니까. 이곳엔 왜…….”

말을 잇던 가이우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일리안이 있었다.

가이우스는 그 순간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비밀로 해달라고 했던 그녀가 율리어스의 앞에 있다는 것은, 결국 모두 들켰다는 말이 아닌가.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녀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율리어스가 알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것은 가이우스였다. 결국에는 율리어스에게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입술을 달싹이던 가이우스가 어떻게든 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다.

“가이우스.”

“예, 예. 율리어스 님.”

율리어스는 그때까지도 가이우스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서 천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그곳에 귀신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내 숙소는…….”

“예.”

“어째서 동쪽 끝에 있는 거지.”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서쪽 끝이었다. 베이스 캠프의 동서로 나뉘어 가장 끝과 끝에 있는 율리어스와 일리안의 숙소는 사실 우연히라도 마주치기가 힘들었다.

그의 중얼거림에는 한탄이 담겨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가이우스가 혹시나 싶어 율리어스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뱉은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을 뿐이었다.

가이우스는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곧 서쪽으로 옮겨두라 하겠습니다. 대신, 오늘은 모두 바쁜 터라 내일 밤 중에는 반드시 처리해 두겠습니다.”

“그래.”

가이우스가 반드시 해내겠다는 얼굴로 말하자 율리어스가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일리안에게 한 번 눈길을 주고서 이내 돌아섰다.

그가 자리를 떠나자 셋만 남은 에릭, 리트릭, 그리고 일리안이 멍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다. 그 중 리트릭이 가장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헤이븐……. 내가 지금 뭘 본 거냐. 너 맨날 저분에게 저런 대우 받았어?!”

리트릭이 말하는 저런 ‘대우’란, 필시 방금 전 일어난 숙소 이동 문제만이 아니었다. 숲을 지나쳐 오는 내내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곁에 붙어 그녀에게 잡다한 벌레 1마리 하나 붙지 못하도록 했다.

도중에는 에릭이 낮에 만났던 식인 나무 몬스터를 만나기도 했다. 사실 숲에서는 제법 자주 보이는 종류의 몬스터라 그다지 놀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움직이지도, 그렇다고 가지의 길이도 늘리지 못하는 나무 몬스터는 위험한 종에 들어가지 않았다.

식인 나무의 뿌리 중 하나가 땅 위로 올라와 있었다.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그것이 일리안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으직.

조용한 숲속에서 나온 소리에 일리안이 문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옆에는 에릭도 있었다.

율리어스의 발아래에는 식인 나무의 뿌리가 밟힌 채 으깨져 있었다. 나무의 뿌리가 제법 굵어 사람의 무게로는 으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율리어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것을 밟아 으깨고 지나갔다.

“……나도 익숙하지는 않은데.”

그렇게 말하며 일리안은 멋쩍게 웃었다. 사실 율리어스의 그런 태도는 일리안에게도 익숙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난 저분이 널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줄 알았어.”

리트릭의 말에 일리안이 픽 웃었다. 그 율리어스가?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일리안의 머리카락 한 올, 발목 한 줌을 잡을 때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수없이 망설이는 이였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일리안에게 있어서만큼은 몇 번이고 고민하고, 망설이고, 주저하는.

그에게 일리안이란 그런 존재였다.

“뭐… 됐다. 너 알아서 잘하겠지. 나도 이만 숙소로 돌아간다? 내일 토벌 작전……. 아, 렉스 단장! 짜증 나 죽겠어!”

제 머리를 엉망으로 흩트리던 리트릭은 이내 성난 걸음으로 돌아갔다. 렉스 단장으로 인해 달콤한 내일의 휴가가 사라진 게 몹시도 화나는 모양이었다.

에릭과 일리안은 그런 리트릭이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렸다. 슬슬 숙소로 들어가 잘 준비를 마쳐야 했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일리안을 멈춘 것은 에릭의 목소리였다.

“널 함부로 대하지 않으면, 되었어.”

고개를 돌리자 에릭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고개를 들어 일리안을 향해 웃었다.

“허락해 준다, 뭐 그런 뜻이 아니라. 친구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에릭이 먼저 그녀의 어깨를 툭 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내부는 종이 바닥에 1인용 침낭 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라 어서 춥지 않은 안쪽 자리를 차지해야만 했다.

일리안을 스쳐 지나간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네게는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 * *

“그러니까 우리가 왜 로체로 가냐고요. 그 봉우리는 우리가 가봤자 골렘 1마리에 10명이 붙어서 낑낑거릴 텐데!”

일리안과 에릭이 서 있는 행렬의 가장 앞에서 성화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늘도 그들의 지휘관은 하프 울프 때와 마찬가지로 나이가 든 할아범이었다.

“차암. 거 성격 급하기는. 로체가 아니라 오크 토벌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응? 그리고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로체가 있는 거고. 몇 번을 말혀?”

“이봐요, 지휘관. 아니 할아범. 보십쇼. 그러니까 결국엔 오크 토벌을 거쳐서 로체로 간다는 말 아닙니까! 다 죽으러 가자는 거요? 아무리 돈이 좋아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지!”

가슴팍에 지휘관 배지를 단 노인이 연신 혀를 찼다. 그의 곁에서 연신 노성을 지르는 남자는 중년쯤 된 이로, 제법 산전수전을 겪은 용병인 모양이었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인데 내가 어찌 그걸 거스르나? 응? 허어…….”

“그건 나는 모르겠고! 이딴 식이면 이만 돌아가겠소! 내 목숨값이 고작 이 정도인 줄 알아?! 사람 귀한 줄 모르고 말이야.”

남자는 당장이라도 돌아가려는 듯 흙바닥을 퍽퍽 짓밟았다. 그것을 듣고 있던 다른 젊은 용병들 또한 죽으러 가는 길이라는 말에 선동되고 있었다.

노인은 남자가 돌아가든 말든 그다지 상관이 없어 보였다. 대신 그는 로체 봉우리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로체에는 리하르트 기사단이 있는데, 무어가 걱정이라고.”

그 말에 세 걸음 정도 움직였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다시 노인에게로 돌아와 초라한 어깨를 짚었다.

“리하르트 기사단?”

“그래, 이 사람아. 우리는 저어기 오크 토벌이나 조금 하고 로체로 가면 리하르트 기사단이 이미 길을 다 닦아뒀다고. 보시게, 토벌의 규모에 따라서 보상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을 게 아닌가. 로체에 발만 담가도 수당이 다르다, 이 말이야!”

남자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리곤 웃는 낯으로 다시금 변해 노인을 마주했다.

“아이고, 영감님. 그걸 왜 이제 말하십니까? 고매하신 영감님의 뜻을 제가 몰라뵈었습니다.”

그가 과장스럽게 손을 싹싹 비비자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도 웃음기가 서렸다. 얼음이 녹듯 풀린 분위기에 다시 진군이 시작되었다. 앞쪽에서는 가끔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헤이븐.”

“어, 왜?”

에릭은 그런 앞쪽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다 일리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찌 되었든 리하르트 기사단과 목적지가 같다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얼마나 위험할지, 그리고 혹시 율리어스나 가이우스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일리안에게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실현되지 못했다.

“……너 뭐 하냐.”

에릭이 내려다보았을 때 일리안은 어디 나무의 앞에 쭈그려 앉아 흙을 파내고 있었다. 그녀가 볼에 흙을 묻힌 채로 에릭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엄청 비싼 약초인데. 나중에 라울 마법 장난감값 정도는 나오겠다.”

일리안이 약초에 묻은 흙을 후후 불어가며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뿌리째 뽑혀 나온 약초가 바람결에 달랑거렸다.

그녀는 그것을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주머니로 미처 털어내지 못한 흙이 굴러 들어가도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약초는 왜……. 아니, 아무리 비싼 약초라도 그렇지. 흙이 묻어 있는데 그걸 거기 넣으면 어떻게 해?”

“그럼 이걸 손에 쥐고 가? 그러다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잃어버리면 잃어버리는 거지.”

“에릭 너 인마……. 토벌 작전하면서도 틈틈이 이런 걸로 돈 벌어야 해. 그래야 부자 된다.”

나처럼.

일리안이 제 코를 쓱 닦으며 히죽 웃었다. 약초와 잡초를 가려내는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지혜였고, 종종 작전에 참가할 때면 이렇게 캐가고는 했었다. 그때에도 다른 용병들은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에릭과 일리안이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눌 때였다. 선두에 서 있던 흔적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의 두려움과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레드 오크다!”

그러자 대부분의 기사들이 검을 빼어 들었다. 그것은 에릭도 마찬가지인 터라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자신의 검을 꺼내 양손으로 잡았다. 언제라도 전투에 참가할 준비가 되었다.

일리안은 다소 설렁설렁한 태도로 제 어깨에 메고 있던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활에 걸쳤다. 하프 울프 떼를 상대할 때처럼 긴장한 태도의 그녀는 없었다.

“……헤이븐, 너는 긴장도 안 되냐?”

“레드 오크 엄청 느리잖아. 네가 걸어가도 못 쫓아올걸.”

그렇게 말한 일리안은 제 어깨를 한 번 풀고서 활을 당겼다. 피잉,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몬스터의 이마에 적중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맞추기 쉽다는 뜻이지.”

오크 하나가 쓰러지자 그것들의 뒤에 있던 부락에서 오크 떼가 쏟아져 나왔다. 숫자는 많아 보였지만 그녀의 말대로 모두 하나같이 느렸다.

몇십 분이 흐르도록 차분하게 검을 사용해 오크들을 처치하던 에릭은 문득 일리안을 바라봤다. 쉬워서 대충한다, 라는 뉘앙스로 말했던 그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하나씩 침착하게 오크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쉬워서 대충하는 게 아니었다. 레드 오크는 느리고 잡기 쉬운 대신 수가 몹시도 많은 터라 페이스를 길게 가져갈 필요가 있었다. 위험하고 개체 수가 적었던 하프 울프와는 다른 사냥 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진짜, 이상해.

에릭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그의 검은 흔들림 없이 몬스터를 처치하고 있었지만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북동 방향이 마지막이다! 손 남는 놈들 모두 저리로 붙어!”

처음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남자 용병이 소리를 질렀다. 슬슬 붉은 피부색이 전장에서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토벌이 끝나가는 모양이었다.

연신 일리안에 대해 생각하던 에릭 또한 그 소리에 북동쪽으로 움직였다. 물론 그가 가지 않아도 많은 기사들이 뛰어간 터라 급하지는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에릭은 이내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토벌 작전에 처음 참여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야, 헤이븐……. 헤이븐?”

에릭이 뒤로 돌았을 때에는, 그가 찾는 사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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