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기웃거리지 말라니까
일리안의 정처 없는 눈동자가 올가미에 구속이라도 된 듯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그는 한 마디만을 내뱉고서 입을 다문 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율리어스 님! 아시는 분입니까? 무슨 사입니까!”
그 분위기를 깨트리는 목소리가 일리안의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나마 율리어스와 가장 가까운 렉스가 술에 얼큰하게 취해 눈치 없이 휘파람을 불어댔다.
일리안은 뒤를 돌아볼 수도, 그렇다고 이대로 율리어스에게 붙잡혀 있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움찔거리는 사이 뒷자리에서는 의미 없는 추측성 이야기가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율리어스가 일리안의 뒷머리를 잡은 그대로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추위 탓에 싸늘하게 식은 일리안의 볼에는 율리어스의 부드러운 옷감이 닿아왔다.
“오, 오오! 율리어스 님!”
“레, 렉스 단장… 그… 그만하시는 게…….”
렉스가 술에 취해 상대도 알아보지 못하고 소리를 꽥꽥 질러대자 보다 못한 볼레르가 그의 팔뚝을 잡아챘다. 렉스는 제 팔을 붙잡은 볼레르의 손을 보더니 코웃음을 치고서 그 손을 털어냈다.
술에 취한 렉스는 이미 정신을 놓고 별의별 주접을 떨고 있었다. 자기는 율리어스 님이 어서 사랑에 빠지기를 바랐다, 얼굴이라도 보자……. 그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정도였다.
품에 안긴 일리안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한 잔 마신 술의 탓도, 그렇다고 렉스의 저질스러운 주접 탓도 아니었다.
가만히 귀를 기댄 율리어스의 가슴팍에서 쿵, 쿵, 쿵…….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어대고 있었다.
“키스해! 키스해!”
“아우, 단장님! 진짜 왜 이러십니까! 예?”
혼자서 주먹을 쥔 채 구호에 맞춰 흔들어대는 렉스를 볼레르가 일어나 제지했다. 필립도 율리어스의 눈치를 보며 손으로 렉스의 입을 강제로 막았다. 몇몇 기사들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기도 했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품에 넣은 채 그런 렉스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오히려 다른 이들이 찔끔 몸을 떨었다. 깊은 밤중의 호수를 보는 것처럼 새까만 눈동자는 어딘지 두려운 구석이 있었다.
“키스해! 키스,”
“렉스.”
렉스가 흐리멍덩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율리어스가 나직이 제 이름을 부르자 만취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몸을 바로 세웠다.
“내일, ‘로체’로 토벌을 간다.”
“예?”
“예?!”
‘로체’란, 여러 봉우리가 있는 에오피아 산맥에서 네 번째로 높은 봉우리였다. 산세가 험하기도 하지만 악명 높은 몬스터인 그리폰이나 골렘이 자리를 잡은 곳이었다.
흔들고 있던 손도 슬그머니 내린 렉스가 멍청한 얼굴로 율리어스를 바라봤다. 로체 토벌이라는 이야기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을 안고 있던 손을 놔주고서 뒤로 돌아 자리를 떠났다. 일리안이 오도 가도 못 한 채 서 있자 먼저 걸어가던 그가 고개를 힐끔 돌려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 안 옵니까.”
그 말을 남긴 율리어스가 다시 움직이자 일리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느릿하게 그를 따라갔다.
“렉스 단장! 단자앙! 이거 어쩔 겁니까!”
“이거 놔! 술 취했을 때라도 내가 때려둘 테니까!”
누군가 쥐어 잡은 멱살로 인해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렉스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율리어스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이미 마실 만큼 마셨으니 술자리가 파투 난 게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기사단장에 위치한 렉스에게는 이제 어디 구석에서 흩어져 술을 마셔대고 있을 리하르트 기사단을 모두 모아 밤새도록 토벌 작전을 세워야 하는 임무가 내려진 탓이었다.
* * *
“예전에는 사막이든, 바다 한가운데든 늘 수도 밖으로 나가 목숨을 던져대고 살지 않았습니까. 나는 늘 그런 당신을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고.”
호숫가는 인기척이라곤 하나 없이 조용했다. 불빛이 반짝이는 캠프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음들이 조금씩 들려오고 있었다.
율리어스는 일리안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그녀의 머리를 감싸 제 품 안에 넣었던 이답지 않게 부러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그러셨어야죠.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당신의 목숨을 나만 겁내고, 나만 두려워하고. 그러느라 감히 당신을 손에 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그랬던 그가 성큼 다가왔다. 놀란 일리안이 뒤로 물러나기도 앞서 율리어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발목을 제 손으로 붙잡았다.
차갑게 식은 손이 닿자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는 붙잡은 발목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내 주변에서 기웃거리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율리어스의 얼굴은 무감각해서, 당장이라도 일리안의 발목을 부러뜨려 어딘가에 가둬둘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반대편 손에서 흰빛이 흘러나오며 그녀의 발목으로 향했다.
가벼운 힐링 마법이었다. 계속된 행군과 오늘 있었던 하프 울프와의 전투로 인해 그녀가 가볍게 발목을 다쳤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헤이븐!”
그때였다. 일리안의 뒤편에서 리트릭과 에릭이 튀어나왔다.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떠야 하는 렉스 단장과 그를 원망하는 기사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자리에서 겨우 빠져나왔던 둘은 묘한 장면에 잠시 멈춰 섰다.
그러나 리트릭과 에릭이 왔음을 알고도 그녀의 발목에서 시선 하나 떼지 않던 율리어스는 끝까지 치료를 마치고서 손을 떼었다. 발목을 놔준 그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헤이븐, 그러니까…….”
리트릭이 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율리어스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힐끔 에릭을 향해 시선을 주기도 했다.
아씨, 더럽게 불편하네.
리트릭은 볼레르의 꼬드김에 당해 술자리를 만들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모두 일어난 일이 아니던가. 리트릭은 어깨를 펴고 당당한 걸음으로 일리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그 모습에 율리어스가 리트릭의 팔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율리어스 님. 이 녀석은 이만 데려가 봐도 될까요?”
뒤에 있던 에릭도 일리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리트릭처럼 팔을 올리진 않았지만, 정중한 태도로 율리어스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헤이븐, 숙소로 가야지. 곧 점호도 있어.”
일리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했다. 율리어스가 제 어깨에 올려진 리트릭의 손을 자르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이전에도 에릭의 팔을 자르려 들었던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가 고민한 것과는 달리 율리어스는 일리안의 어깨를 감싼 리트릭의 팔에서 얼마 가지 않아 시선을 떼었다. 그 사실에 놀란 일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율리어스는 대신 에릭의 말 중 걸리는 부분을 물어올 뿐이었다.
“숙소?”
“예, 3차 지원군은 천막이 부족해서 꽤 많은 인원이 같이 쓰는 터라…….”
에릭과 일리안의 숙소에는 둘을 제외하고도 스물이 넘는 인원이 함께 숙소를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 자정에는 인원을 확인하기 위해 점호를 한다고 했으니 둘 또한 곧 돌아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에릭은 리트릭의 걱정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율리어스를 대하고 있었다. 그는 율리어스를 한 번 바라보고선 이내 등을 돌렸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가자, 헤이븐.”
“……그래.”
율리어스가 가만히 있자 알아들은 줄 알았던 일리안 또한 발을 움직였다. 둘의 곁에 서 있던 리트릭은 음, 하고 고민하더니 둘의 뒤를 따라갔다.
3차 지원군이 있는 캠프로 빠르게 가기 위해서는 리하르트 기사단 캠프를 거쳐가는 것보다 숲 하나를 가로질러 가는 게 빨랐다. 조용해진 숲속에서 나무들이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움직이던 중, 에릭이 다소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율리어스 님. 리하르트 기사단 숙소는 저쪽입니다만.”
가장 선두에는 에릭과 일리안. 그리고 바로 뒤에서 따라가는 게 리트릭. 그들과 세 걸음 정도 떨어져 따라오고 있는 이가 율리어스였다.
처음에는 가는 도중에 꺾어 리하르트 기사단으로 가려나 싶었는데, 그들이 걸음을 멈추면 따라 멈추고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는 게 아무리 봐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보다 못한 에릭이 질문을 던졌다.
“왜 따라오십니까?”
“숙소를 간다고 하지 않았나.”
“……율리어스 님 숙소는 제가 알기로 정반대 편인데요.”
그 말을 듣던 율리어스가 가만히 에릭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다 천천히 손을 들어 리트릭을 지목했다.
갑작스레 지목당한 리트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찔러댔다. 율리어스가 자신을 가리켰다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나, 나? 저요?”
“저 녀석은 내 숙소의 바로 옆일 텐데.”
그 말에는 그런데 어째서 저 녀석은 가도 된다는 거지, 라는 암묵적인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이야기를 듣던 에릭이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야, 리트릭은 저희 친구지 않습니까.”
“친구라.”
친구. 그만큼 율리어스와 인연이 없는 단어가 또 있을까. 돌아가는 상황을 보던 리트릭은 문득 율리어스에게 친구라고 말할 이가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무리 가까운 가이우스라 하더라도 친구로서 함께 있는 것은 아닐 터였다.
그 단어를 곱씹듯 다른 곳을 바라보던 율리어스는 이내 고개를 기울이고서 에릭을 바라봤다.
“친구. 하면 되겠군.”
“……예?”
“뭐라고요?”
리트릭이 멍청한 얼굴로 검지를 들어 에릭을 한 번, 자신을 한 번, 마지막으로 율리어스를 한 번 가리켰다. 친구……?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후미에서 멀찍이 떨어져 가던 율리어스는 이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일리안의 반대편 빈자리를 차지했다.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리안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일리안의 눈가를 제 손으로 턱, 덮었다.
“그만 보세요.”
리트릭이 허리에 매고 있던 검집을 툭 떨어트렸다. 그보다 더 아래로 떨어진 것은 리트릭의 턱이었다.
“아픕니다.”
그는 무엇이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일리안은 무엇이 아픈지 알 수 있었다. 자신과 가까워지면 매번 아플 정도로 뛰어대던 그의 심장이 이번에도 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해댄 주제에 얼굴 표정만큼은 무감각한 율리어스는 이내 손을 떼고 먼저 걸어갔다. 일리안을 비롯해 다른 이들이 따라오지 않으면 자리에 가만히 멈춰 그들을 기다리기도 했다.
율리어스의 존댓말, 그리고 그런 면모들을 처음 보았던 에릭과 리트릭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4명이 자리를 떠나자 조용해진 숲에는 음산한 바람 소리만이 들려왔다. 거세게 불어대는 바람으로 나무들이 흔들린 것도 잠시, 어느새 숲은 다시금 적막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간 곳의 옆에는 나무들에 가려진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위에 앉아 있던 이가 다리를 꼬고서 목 근처까지 내려오는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히말, 마법 풀어도 좋아.”
“예, 알겠습니다.”
바위에 앉은 황자의 옆으로 히말이라 불린 시종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그가 뒤에 시립하자 황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지. 저 몬스터 새끼가 히말 네 미천한 마법도 못 알아채고 말이야.”
“그의 의식을 헤집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렇겠지. 아니고서야 우리가 이렇게 대놓고 있는데도 몰랐겠어.”
황자가 길게 하품을 했다. 어딘지 지루한 것 같았지만, 그의 눈빛은 그렇지 못했다. 황자는 제 옆에 서 있는 히말의 손 하나를 조심스레 붙잡아 올렸다. 그가 다정한 손길로 손을 쓰다듬었다.
히말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로브로 몸을 전부 가린 히말에게서 노출된 것이라곤 손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는 조그만 흉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히말, 네가 그랬었지. 율리어스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죽어버렸다고.”
여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황자가 갑작스레 쓰다듬던 히말의 손을 강하게 꼬집었다. 그의 잘 손질된 손톱으로 인해 히말의 손에서 핏줄기가 주륵 흘러나왔다.
“내가 볼 때는, 아직 있는 것 같은데.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