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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85화 (85/123)

85. 당신의 목소리

렉스가 육중한 몸을 필립과 볼레르 사이로 꾸역꾸역 끼워 넣었다. 조그만 모닥불을 중앙에 두고서 둥글게 모인 이들의 수가 어림잡아도 서른은 넘다 보니 자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헤이븐 윈터의 얼굴을 아는 렉스와 필립이 자리를 잡고 술자리를 함께할 기미가 보이자 일리안은 서둘러 에릭의 큰 덩치 뒤로 기어갔다. 마침 사람들이 자리가 좁다며 옆으로 옮겨 달라고 성화였던 탓에 리트릭이 일리안의 빈자리를 대신 채웠다.

에릭의 등 뒤에 바짝 붙어 당장 이 자리를 도망칠 생각을 하고 있던 일리안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가장 눈에 안 띌지 고민하고 있었다.

헤이븐 윈터의 조그만 몸은 에릭의 뒤에 숨자 제법 완벽하게 가려졌지만,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일리안의 질끈 묶인 채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에릭의 옆구리 옆으로 살랑거렸다.

꼭 꼬리처럼 움직이는 머리칼은 정반대 편에 앉아 있던 렉스의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사내들밖에 없는 자리에 의문의 긴 머리카락이 보이자 미간을 좁히고 주시하던 렉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거, 뒤에 있는 사람은……. 어? 이게 누구냐. 밀튼 경 아니야!”

그러자 필립을 비롯해 렉스의 주변에 있던 상위 기수의 기사들도 에릭에게 시선을 주었다. 에릭이 리하르트에서 기사 수련생 과정을 사사받은 터라 얼굴을 아는 이들이 제법 되었다.

렉스 단장의 곁에 있던 볼레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에릭을 바라봤다. 이제껏 술을 같이 마시던 이가 기사라는 이야기에 놀란 눈치였다.

“밀튼 경? 기사였어? 리트릭, 너 그런 이야기는 안 했잖아.”

“허이고, 윈터 가문에 기사의 맹세를 했다더니. 응? 그런데 여기 무소속 기사들만 올 수 있지 않았나.”

“아까 분명 짐꾼으로 왔다고…….”

볼레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렉스가 껄껄 웃으며 그의 등을 후려쳤다.

“무슨! 저 녀석은 무려 기사 수련생 수석이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볼레르!”

“아, 아니……. 정말 짐꾼이라고 했단 말입니다!”

짐짓 억울하다는 듯 반박한 볼레르가 에릭을 향해 어서 말해보라는 듯 눈치를 주었다. 에릭은 이도 저도 못 하고 흙바닥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은 그를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연신 침묵이 이어지자 에릭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어야만 했다.

“……기사, 관두었습니다.”

필립, 렉스를 비롯해 에릭을 아는 기사들 사이에서 뭐? 하는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개중 몇몇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다른 곳도 아니고 리하르트에서 기사 수련생 과정을 밟고, 거기다 수석까지 차지한 그가 기사를 관두었다는 말은 충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팔다리가 하나 없으면 그러려니 라도 하겠건만 그의 사지육신은 멀쩡해 보였다.

다들 놀란 분위기가 잦아들자 이어서 누군가의 당연한 질문이 들려왔다.

“대체 왜?”

에릭은 그 질문에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차피 더 볼 사람들도 아니니 말없이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에릭의 뒤에서 작은 존재가 연신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뒤로 숨었던 일리안은 도망치려고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에릭에게서 떨어지질 않자 그럴 수가 없었다.

흐음, 하고 길게 숨을 내쉬던 렉스가 갑작스레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아니, 아니. 곤란하면 되었고. 그나저나 에릭 네 뒤에 있는 녀석은 누구냐? 자꾸 꼼지락거리는데.”

렉스의 날카로운 질문에 몸을 비틀던 일리안이 멈칫했다. 사실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터라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로서도 이곳을 탈출할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그때였다. 사실상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리트릭이 이제야 눈치를 채고 에릭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덩치 큰 남자 둘이 붙자 삐죽 튀어나왔던 일리안의 옷깃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려졌다.

리트릭이 헤헤 웃으며 제 뒤로 고개를 힐끔 돌렸다. 일리안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 몸짓에는 다소 어색함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다.

“야, 헤……. 음. 여기서 자면 어쩌냐? 어?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그렇지.”

그 말을 듣자마자 일리안이 몸의 힘을 풀고 에릭의 등 뒤로 기대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무게에 놀란 에릭이 상체를 반쯤 앞으로 숙였다.

볼레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리트릭의 말을 거들었다.

“헤이가 술을 많이 마신다 싶더니, 결국 취했어?”

“네놈들이 준 게 한, 두 잔이었어야지! 야, 숙소 가서 자라, 어?”

뒤로 완전히 몸을 돌린 리트릭이 주섬주섬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릭은 곁에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술을 한 모금씩 홀짝이긴 했지만, 사실 그 또한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렉스와 필립이 바로 맞은편에서 그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탓이었다. 에릭은 고개를 모로 돌린 채 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산 너머를 바라보았다.

한편, 에릭의 등에 기댄 채 있던 일리안은 리트릭과 눈이 부딪치자 성난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그가 볼레르에게 제 친구를 소개해 주겠다느니, 뭐라느니 헛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게 아닌가.

리트릭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녀의 등과 무릎 뒤로 손을 넣어 들어 올릴 준비를 마쳤다. 공식적으로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이가 된 일리안은 제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어윽!”

야, 이, 너 왜 이렇게 무거워!?

일리안을 단숨에 들어 올리던 리트릭이 삐그덕거리며 제 품에 안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사 자격증을 취득할 만큼의 운동은 했으니 가볍지만은 않을 터였다. 눈을 감은 일리안이 바깥에선 보이지 않는 손으로 리트릭의 탄탄한 배를 꼬집었다.

그래도 기사이긴 했던 리트릭은 그 괴롭힘을 참을성 있게 버텼다. 이를 악물고 웃는 낯을 보인 리트릭이 렉스, 필립 그리고 볼레르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어, 그럼 제 친구 좀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어이, 리트릭. 친구 맞지? 응?”

일리안의 긴 머리가 아래로 떨어지자 여자임을 안 필립이 낄낄거리며 리트릭을 놀렸다. 리트릭은 얼굴을 잔뜩 구기고 말했다.

“이 녀석이랑 엮으시면 저 진짜 접싯물에 코 박고 죽을 겁니다!”

그러자 눈을 감은 일리안의 미간으로 슬며시 주름이 졌다. 당장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상황을 보아 참기로 결정했다.

말을 마친 리트릭이 그제야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벗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렉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잠깐, 리트릭.”

뒤로 돌아 있던 리트릭은 에이씨, 라고 입술만 달싹이며 중얼거리고선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예, 예?”

“그 친구, 이름이 뭐라고?”

“헤, 헤이…….”

븐.

이번에도 입술만 살짝 달싹여 들릴 듯 말듯 속삭였다. 물론 모닥불 너머에 앉은 렉스에겐 턱도 없이 작은 목소리였다.

“헤이? 흐음, 이상하다.”

“뭐… 말씀이십니까?”

“그 손. 손에 난 굳은살 모양이 헤이븐 윈터 님이랑 비슷하단 말이지. 거, 발도 그렇고. 발 사이즈가 딱 그분 크긴데.”

렉스에게 삿대질 당한 일리안의 손이 남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움찔거렸다. 리트릭은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시작했다.

저 자식은 꼭 이상한 곳에서 예리하다니까.

눈을 감고 있던 일리안이 렉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예전부터 렉스는 그런 구석이 있고는 했다.

“그런데 그분은 내가 알기로 머리가 짧단 말이야.”

“그, 그럼요. 다른 사람인데.”

“그렇지? 내가 예민했나?”

아닌데, 내 감은 꽤 확실한데.

렉스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제 턱을 매만졌다. 그래도 굳이 일어서서 확인할 생각은 없는지 엉덩이는 바닥에 붙인 채였다.

“가봐. 친구 데려다주고 다시 오고!”

렉스가 되었다는 듯 손을 내젓자 리트릭은 연신 딸꾹질을 해대며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았을 때였다.

“밀튼 경, 자네는 어디 가나?”

“저… 도 친구를 데려다주러.”

“셋이 친구? 흐음, 그러고 보니 헤이븐 윈터 님도 둘과 친구 사이였지 않나? 이거 안 되겠군. 실례가 아니면 내가 그분 얼굴 좀 봐도 되겠나?”

그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렉스가 무릎을 짚고 슬슬 일어섰다. 허허실실 웃는 낯이기는 했지만 리트릭과 에릭의 거절을 받아줄 눈치가 아니었다.

리트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몸을 굳혔다. 리트릭의 입에서 딸꾹질이 나오는 횟수가 거의 1분에 30번은 될 정도였다.

에릭도 가만히 선 채로 굳어버린 뒤였다. 제 친우 둘의 상황을 깨달은 일리안이 리트릭의 품 안에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품 안에서 뛰어내렸다.

“아이고, 내가 정신을 잃었나 보네. 하하. 자려면 숙소에 가서 자야지.”

바닥에 제 다리로 선 일리안이 콧소리를 조금 섞어 독백이라도 하는 마냥 중얼거렸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음을 안 렉스도 더는 다가오지 않고 잠시 멈춰 섰다.

“에닉, 리트닉, 나는 먼저 돌아가 봐야겠다!”

라울이 사람을 부를 때의 발음이 생각난 일리안은 그것을 그대로 따라 하며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최대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발을 움직였다. 뒤를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어, 율리어스 전하!”

렉스의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잰걸음으로 빠져나가던 일리안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그것은 비단 일리안만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리하르트 기사단 전원이 숨소리조차 멈추고 렉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선을 받던 렉스가 저녁부터 마신 술로 인해 붉어진 코를 킁, 거리며 씨익 웃었다.

“구란데.”

그러자 곳곳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공작 전하를 뵐 생각에 긴장하고 있던 리하르트 기사들의 긴장이 탁 풀리는 순간이었다.

렉스는 흐흐 웃으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던 일은 새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자리의 분위기가 렉스의 짓궂은 장난을 나무라는 쪽으로 향하자 엉거주춤 서 있던 리트릭과 에릭도 움직이기가 수월해졌다. 둘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자리를 빠져나와 일리안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코너를 돌아 저들의 눈에 띄지 않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일리안은 다소 다급하게 발을 떼려고 들었다.

“율리어스 님!”

아직 술자리를 지키는 이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장난 좀 그만치라며 소리를 지른 이를 나무랐다.

또 누가 장난 쳤나 보네.

일리안은 어서 자리를 빠져나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방금 전까지 왁자지껄하던 등 뒤가 묘하게 조용했다.

그들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죽어도 뒤를 보지 않았던 일리안은 어쩔 수 없이 아주 조금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모든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반대편을 보았다. 그녀의 곁에 있던 에릭과 리트릭이 제 앞에 있는 이로부터 눈을 피하고 있었다.

그제야 돌아가는 분위기를 눈치챈 일리안이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커다란 키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가슴팍이 있었다.

“피… 곤하다. 어서 가서 쉬어야지.”

그녀는 죽어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거의 턱이 목에 닿을 정도였다. 이대로 고개라도 들었다가 앞에 있는 이와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정말 돌이키지도 못할 것 같았다.

이전에 내었던 콧소리를 섞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일리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앞에 있는 사내의 옆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일리안의 뒷머리에 커다란, 그리고 차갑게 식은 손이 닿아왔다. 손이 너무도 커 그녀의 머리를 한 손에 감쌀 정도였다.

그 손이 강제로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린 것도 아니었는데, 일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헤이븐 윈터의 얼굴이 있었다.

“제가 아무리 병신이라지만,”

“…….”

“당신의 목소리도 못 알아듣겠습니까.”

율리어스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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