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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84화 (84/123)
  • 84. 술친구

    리트릭의 해맑은 외침에 기나긴 한숨을 내쉰 것은 에릭이었다. 리트릭 또한 그 한숨 소리를 듣고서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트릭을 불러 세웠던 리하르트 기사단 몇 명이 다가왔다. 다행스럽게도 그들 또한 신입이었는지 일리안이 아는 얼굴들은 아니었다.

    그녀가 슬쩍 눈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뒤로 질끈 묶은 기다란 머리가 흔들거렸다.

    “와, 리트릭. 이분들은 누구시냐?”

    “내 친구. 에릭이랑 헤이, 악!”

    일리안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서 리트릭의 발등을 꽉 밟았다. 제 발등을 쥔 그가 낑낑대는 것이 보였지만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리트릭에게 미안하지는 않았다.

    헤이븐 윈터, 라는 이름이 엄청난 유명 인사인 것은 아니지만 알 만한 이라면 아는 이름이었다. 특히나 율리어스와 자주 관련되곤 했으니 리하르트 기사단이라면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알지도 몰랐다.

    “헤이?”

    “……응, 소개할게. 헤이.”

    “반갑습니다, 헤이입니다.”

    일리안이 말쑥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장 선두에 있던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활짝 웃으며 그 손을 확 낚아챘다. 팔이 떨어질 정도로 손을 흔든 것은 그다음이었다.

    “이름이 특이하네! 나는 볼레르고, 여기 리트릭이랑은 입단 동기!”

    “아, 예. 힘이 좋으시네요.”

    리트릭과 입단을 같이했던 때라면 마침 일리안이 공작성으로 가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볼레르는 헤이븐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지 흰 치열을 드러내며 연신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무식해서 힘밖에 모르거든! 리트릭 저놈이야 치사한 검술을 쓰기는 하지만.”

    “볼레르, 네가 무식한 거야 동기 놈들이 다 안다고 쳐도 왜 갑자기 내가 나와? 그리고 치사하다니. 난 빠르게 치고 빠지는 걸 좋아할 뿐이야.”

    “그게 치사한 거지! 기사가 검을 뽑았으면 상대 목을 썰기 전까지는 뒤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어?!”

    둘이 작게 실랑이를 벌이자 볼레르의 곁에 있던 다른 이들이 그들을 말렸다. 그러나 볼레르와 리트릭을 말다툼을 한 게 언제였냐는 듯 짧게 웃으며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리트릭, 밥은 먹었냐? 그, 리트릭 친구분들도 식사는 하셨나?”

    “방금 먹고 나오는 길입니다.”

    “잘됐네! 우리도 마침 밥 먹고 오는 길이거든. 그러면 같이 술이나 한잔하러 가는 건?”

    에릭이 부러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볼레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제 뒤를 엄지로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리하르트 기사단을 비롯해 상급 기사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율리어스의 숙소가 있는 방향이기도 했다. 눈썹을 조금 구긴 에릭이 입을 열기에 앞서 일리안이 사람 좋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토벌단으로 임시 고용된 거라 술은 좀 어렵습니다. 볼레르 경이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아, 3차 지원군에는 아직 전달이 안 된 모양인가 본데. 내일은 토벌 작전이 없어. 그래서 렉스 단장이 술 마실 거면 오늘 마셔라, 라고 했거든. 곧 전달되면 그쪽도 술판 거하게 벌어질 텐데 기왕 마시는 거 이쪽으로 와서 같이 마시자고!”

    “토벌 작전이 없다고요?”

    “음, 그게, 사실 정확히는 근방에 몬스터가 없어. 3차 지원군이 오늘 하프 울프 떼를 만났다면서? 거기가 원래 하프 울프 출몰 지역이 아닌데 나온 게 그 영역 주인인 트롤들 수가 확 줄어서거든.”

    아직 한 해의 초에 이르는 겨울 즈음이라면 에오피아 산맥을 비롯한 모든 몬스터 출몰 지역이 몬스터 떼로 고생을 할 때였다. 토벌 작전에 한두 번 참여해 본 게 아닌 일리안은 의아한 눈으로 볼레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게……. 안 믿을지도 모르겠는데, 율리어스 전하께서 이 근방 몬스터를 모두 쓸어버렸어.”

    “쓸어버렸다고요?”

    “응, 그분이 손 한 번 흔드니까 하늘에서 벼락에, 불덩이에, 아무튼……. 그래서 우리 쪽 사상자도 1명도 없고.”

    볼레르는 사상자가 제법 나온 황궁 기사단과는 다르게 경상자도 몇 없는 제 기사단이 못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의 눈에는 율리어스에 대한 단단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이상하시지? 원래는 검만 사용하셨다고 들었거든. 마법은 웬만해서는 안 쓴다고.”

    율리어스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만나게 된 그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일상생활에서 마법을 사용했다.

    이전 생에서는, 일리안의 앞에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그가 마법을 보다 자주 사용하게 된 기점이 있었다. 바로 이 세상의 일리안 하인리히가 사망한 뒤부터였다.

    “아무튼 헤이랑 에릭이라고 했나. 너희도 가자. 리트릭, 응?”

    “어? 나는…….”

    “거기 선배들 아무도 없다. 우리가 끝이야. 자리랑 술도 기가 막히게 준비했다니까!”

    “그러면 그럴까?”

    리트릭이 일리안의 눈치를 슬슬 보다 볼레르의 옆으로 슬며시 움직였다. 일리안은 그런 리트릭의 정강이를 남몰래 차주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헤이, 너도 갈 거지?”

    “갈 필요 없어.”

    볼레르가 친근하게 묻자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에릭이었다. 그는 일리안이 거절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제가 먼저 볼레르의 제안을 잘라냈다.

    그러나 일리안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에릭이 그 말을 던지는 순간 대여섯 정도 모여 있던 자리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일리안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볼레르도 호의로 던진 질문이 거절당하자 마냥 좋은 기분은 아닌 듯했다. 볼레르가 그러면 되었다며 등을 돌리려던 때였다.

    “재밌겠는데? 에릭, 가서 한잔하자.”

    일리안이 웃음으로 분위기를 무마하며 에릭의 등을 두드렸다. 에릭은 무언가 불쾌한지 그런 일리안을 내려다보았지만, 그녀가 볼레르들에게는 보이지 않게끔 미묘히 각도를 조절해 눈으로 말했다.

    등신아, 저 사람들 리트릭 직장 동료라고.

    에릭이 그 말에 슬쩍 리트릭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리트릭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에릭의 편도, 볼레르의 편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볼레르는 리트릭을 향해 입사 동기라고 말했지만 사실 얼굴만 보아도 볼레르가 리트릭보다는 나이가 제법 많아 보였다. 아무리 입사 동기라고 하더라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볼레르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그런 리트릭의 얼굴에 에릭은 잠시 자신의 기사 지망생 시절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사회에 던져진 그 또한 입사 동기, 그리고 선배, 후배들에 의해 얼마나 피곤했던가.

    하아, 낮게 한숨 쉰 에릭은 이내 제 얼굴을 갈무리했다. 대신 일리안의 곁으로 붙어서며 말했다.

    “……흑맥주는 있겠지?”

    “하하! 재밌는 친구네! 흑맥주야 당연히 있지!”

    볼레르가 사람 좋게 웃으며 에릭에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리하르트 기사단의 막사로 향하는 누군가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누군가의 발걸음은 물에 젖은 솜처럼 축 처졌다.

    * * *

    볼레르의 호언장담대로 자리가 좋기는 좋았다. 그 또한 리트릭과 마찬가지로 신입이기는 했는지 선배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모닥불 하나를 중앙에 지펴놓고서 둥글게 모여 앉은 볼레르 일행은 주섬주섬 모아온 음식이나 술 따위를 꺼내 들었다. 그것들의 메뉴나 양이 제법 고급스러웠다.

    “자아, 이거. 로블랑 30년산. 이거 사려고 내 월급의 3분지 1은 털었다, 이 말이야. 이걸 내가 여기서 푼다.”

    “오! 볼레르 이 자식, 오늘 좀 센데?”

    로블랑은 가격이 제법 나가기는 했는지 엔틱한 느낌의 나무 상자에 담겨 있었다. 볼레르가 그것을 과장스러울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며 포장지를 뜯어냈다.

    로블랑 외에도 다들 준비한 술이 도수가 제법 나가는 것들이 대다수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에릭이 일리안에게 슬쩍 몸을 붙이며 귓속말을 속삭였다. 에릭은 일리안의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마시기 싫으면 버려라.”

    그 말에 일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에릭이 어째서 그런 걱정을 하는지 모르진 않았지만, 일리안은 이전 생에서 술꾼으로 유명한 것은 물론 일찍이 사회생활에 뛰어든 이였다.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 버티는 법쯤이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술을 꺼내든 이들은 대체 어디서 챙겼는지 안주들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치즈와 빵은 물론 따뜻하게 데워진 수프나 소시지도 있었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안주들을 바라보던 볼레르가 그 안주의 주인에게 물었다.

    “그라게스, 이거 왜 따뜻하냐?”

    “흐흐……. 아는 마법사가 있어서 데워 달라고 했거든. 장난 아니지?”

    볼레르가 그라게스의 등을 우악스레 쳐댔다. 그렇게 모인 안주와 술의 양을 보자 술자리가 밤새도록 이어져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자 이번엔 일리안의 왼쪽에 앉아 있던 리트릭이 그녀에게 몸을 가까이했다.

    “야, 술 버릴 거면 나 줘.”

    “뭐?”

    “술 버릴 거면 날 주라니까? 내가 대신 마실게.”

    거기까지 말한 리트릭은 짐짓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볼레르와 대화를 이어갔다. 일리안은 그런 리트릭을 한 번 보고서 ‘뭐야, 이건 또.’라고 중얼거렸다.

    볼레르가 먼저 한 잔을 가득 따르고서 높이 들어 올렸다. 일리안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제 술잔을 가득 채워 그를 따라 잔을 들었다.

    터엉.

    술이 담긴 나무잔들이 서로 부딪치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어찌나 강하게 부딪쳤는지 잔에 담긴 술들이 공중으로 몇 방울 튀어 오르기도 했다.

    “크으, 비싼 맛 한다!”

    “목으로 넘어가는 거 부드러운 것 좀 봐라. 이게 술이지!”

    한 모금을 크게 들이켜자 크으, 거리며 고개를 내젓던 볼레르의 눈에 문득 일리안이 들어왔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제 손보다 훨씬 큰 나무잔을 벌컥, 벌컥 넘기고 있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일리안의 앞에 빈 잔이 놓였다. 그 속을 확인한 볼레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야, 헤이. 너 술 좀 마시나 본데?”

    “어, 진짜네? 그걸 한 번에 다 마셔?”

    볼레르의 말에 다른 이들도 일리안의 빈 술잔을 확인했다. 그러자 시선이 몰린 일리안이 혀를 내밀어 술이 조금 묻은 제 입술을 핥고선 씩 웃었다.

    “다네.”

    머리를 길러도 하는 짓이 소년 같던 그녀가 그렇게 웃자 어딘지 어른의 분위기가 풍겼다. 그러자 볼레르가 술기운인지, 아니면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혔다.

    이어서 다른 이들이 일리안의 술잔을 다시금 채워주었다.

    그런 일리안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은 에릭과 리트릭이었다. 그들이 아는 그녀는 고작해야 무도회장에서 한두 잔 와인을 홀짝이는 것 말고는 제대로 술자리를 경험해 본 적이 없을 테니, 걱정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에릭이 눈을 찌푸리고 일리안을 바라보며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리트릭도 몰래 손을 뻗어 일리안의 술잔에 따라진 술을 제 잔으로 옮기려 들었다.

    일리안은 그런 에릭과 리트릭을 번갈아 보다가 픽 웃었다. 그녀는 의외로 볼레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볼레르. 토벌 작전이 처음은 아니지?”

    “어? 어……. 어떻게 알았냐? 내가 용병으로 굴러먹다 들어왔거든.”

    “그때 이야기 좀 듣자. 재밌겠네.”

    그러자 볼레르가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리안은 간간이 그의 말에 웃거나 공감하며 능숙히 대화를 이어갔다. 다른 이들 또한 볼레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볼레르가 신나게 떠드는 사이, 그녀의 술잔에 가득 담겨 있던 술은 바닥으로 졸졸 흘러갔다. 이야기를 듣던 일행 중 1명은 일리안의 빈 술잔을 보고선 정말 주당이라며 치켜세우기 일쑤였다.

    일리안이 첫 잔을 완벽히 마시자 모두 꼼짝없이 그녀가 다 마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에릭과 리트릭은 그런 일리안을 보고서 졌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무난하게 술자리가 이어지려던 순간이었다. 구석진 곳에 앉아 있던 그들에게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이게 누구냐. 리트릭이랑 볼레르 아니야! 우리 귀염둥이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다 있었어?”

    “필… 립 경, 하하, 여긴 어떻게…….”

    어리둥절한 에릭과 일리안을 제외하고서 다른 모든 기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리안과 에릭 또한 분위기를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서야만 했다.

    “이야, 여기 안주 장난 아닌데? 우리도 같이해도 되지?”

    거의 열댓 명을 이끌고 온 남자가 볼레르의 어깨를 감싸며 말하자 볼레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인원과 새로운 무리가 합쳐져 거의 스물에 다다르자 술자리의 소음이 커져갔다.

    얼떨결에 다시 자리에 착석한 일리안은 문득 볼레르의 어깨를 감싼 이의 얼굴을 보고서 멈칫했다. 필립?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가 했더니 일리안이 헤이븐 윈터로 공작성에서 검술 수업을 들을 때 친해진 이였다.

    물론 그 뒤로 따로 연락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도 분명히 기억은 할 터였다. 일리안은 모닥불에 제 얼굴이 비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필립만 제외하면 별일은 없겠지. 저쪽도 술을 꽤 마신 것 같으니 잘만 하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녀의 뒤로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시끄럽나 했더니, 네놈들이냐? 필립, 볼레르!”

    전생의 술친구, 렉스 단장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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