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죽음을 바칠 시간-83화 (83/123)

83. 즈용히 해

“이런 미친, 하프 울프가 왜 여기서 나와?!”

“흔적꾼이 실수한 거 아니야? 분명히 오크가 있는 곳이라며!”

깡, 달려드는 하프 울프의 발톱을 겨우 막은 기사 중 하나가 소리쳤다. 그 말에 다른 기사들 또한 동요되어 흔적꾼의 부족함을 나무랐다.

그들을 이곳으로 인도했던 흔적꾼은 이미 후미로 빠져 가장 안전한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하프 울프 떼를 상대하는 것은 온전히 기사들의 몫이었다.

에릭과 일리안 또한 그들의 이야기를 못 들은 게 아니었다. 단지 흔적꾼을 나무라기에는 너무도 바쁠 뿐이었다. 에릭이 제 검을 물어버린 하프 울프를 상대하고 있었다.

“에릭!”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에릭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피잉, 푹.

그러자 그의 귀 바로 옆으로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다행히 그것은 에릭에게 부딪치지 않고 하프 울프의 목을 완전히 관통했다. 그러고도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화살 두어 개가 더 날아왔다.

순식간에 처리된 하프 울프에 에릭이 멍한 눈으로 사체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눈썹을 구기고 일리안이 있는 곳을 향해 말했다.

“헤이븐, 너……!”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라고 덧붙이려던 에릭은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반대편에서 하프 울프 1마리가 튀어나와 에릭에게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치자 하프 울프는 깨갱,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기사에게 달려갔다. 그 탓에 에릭은 더는 일리안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위험하게 화살을 쏘았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잠시 숨을 돌린 에릭이 입을 꾹 다물고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화살을 하나씩 하프 울프에게 맞추고 있었다. 그것들은 대개 치명상이 되어 하프 울프를 처치하는데 큰 전력이 되었다.

슬슬 하프 울프의 수가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일리안은 그럼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연신 위험에 처한 기사들 몇 명을 화살 하나로 구해주기 바빴다.

에릭 또한 전투가 끝나갈 기미가 보이자 천천히 일리안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1마리, 2마리씩 처치하다 보니 붙어 있던 둘의 거리가 제법 벌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해봐야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적어졌던 하프 울프 몇 마리가 하울링을 시작했다. 에릭은 그것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에릭!”

“……헤이븐?”

“이리 와!”

제 손목이 잡히자 에릭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일리안이 에릭의 손목을 덥석 잡고서 어딘지 다급한 얼굴로 그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녀를 따라가던 에릭은 자신들이 남아 있던 하프 울프와의 거리가 제법 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들이 모인 곳 중심부에 에릭과 일리안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짐승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윽, 악! 사, 살려줘! 제발, 제발 살려줘!”

어디선가 나타난 하프 울프 1마리가 기사의 발을 물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한곳에 모인 기사들을 새로운 하프 울프 떼가 둥글게 포위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 그즈음이었다.

발이 물린 기사는 끌려가는 내내 기사들을 향해 절실히 손을 내뻗었다. 그러나 그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기사들이 검을 세운 채 언제 달려들지 모를 하프 울프를 상대해야만 했다.

“젠장, 망했네.”

활시위에 화살 하나를 걸친 일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에릭이 의문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하울링을 하기 전에 모두 잡아내야 했어. 늦어져서 이렇게 된 거다. 망할, 여기 지휘관은 어디 갔어?!”

전투에서는 웬만하면 침착한 태도를 고수하는 일리안이 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3차 지원군 중에서도 3팀으로 나뉜 일리안의 팀은 지휘관조차 중급 기사를 넘지 못한 터였다. 아무리 제일 약한 이들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지휘조차 못 하는 이가 이끌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하프 울프면 3차 지원군 전부가 와도 잡아내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에릭과 일리안이 꽤 선전을 하기는 했지만 2명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사냥이 시작되면 하울링으로 주변에 있는 녀석들을 모으는 게 하프 울프의 습성이니까.

다른 기사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일리안은 가능하다면 에릭과 함께 전선을 이탈할 생각도 있었다. 아무리 능력이 좋다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지키지 못하는 이까지 책임져 줄 수는 없었다.

어제 함께 했던 황실 기사단이라도 있으면 할 만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깨갱, 캥!

대치하고 있던 하프 울프 떼에서 갑작스레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외에도 가장 선두에 있던 기사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 가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던 일리안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 하프 울프 1마리를 처치하기라도 했는가, 싶었다.

“리, 리하르트다.”

기사들 뒤에 가려져 있던 일리안이 겨우 발치를 들어 어깨 너머로 반대편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율리어스 공작 전하시다!”

율리어스가 그곳에 있었다. 말에 올라탄 그는 무감각한 눈으로 하프 울프 떼를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리하르트 기사단에게 포위된 하프 울프들이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리하르트 기사단이 손쉽게 하프 울프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산발적으로 달려드는 하프 울프 중 1마리가 높이 점프해 중심부에 있는 율리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달려든 하프 울프의 몸집만 보아도 그것이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몬스터인 주제에 하프 울프는 상대의 머리를 알아보고서 공격을 한 것이었다.

……툭.

3차 지원군의 기사들이 멍한 눈으로 우두머리 하프 울프를 바라봤다. 그것은 목이 잘린 채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검을 꺼내 베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눈으로는 무언가 지나간 것 같기는 했는데,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하프 울프가 반으로 동강 난 채 힘없이 떨어진 뒤였다.

율리어스는 피가 묻은 검을 다시금 제 검집으로 넣었다. 말 위에 올라탄 그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하프 울프를 내려다보았다.

그 광경을 기사들 사이에서 몰래 바라보고 있던 일리안은 이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제 곁에 있는 에릭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헤이븐?”

에릭이 의아하게 그녀를 부르자 일리안은 뒤쪽으로 턱짓했다. 기사들에 가려져 율리어스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장 뒤였다.

아직 율리어스를 만날 수는 없었다.

* * *

리하르트 기사단을 만난 3차 지원군이 베이스캠프로 돌아갔을 때에는, 황궁 기사단과 함께 리하르트 기사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새벽부터 흩어졌던 다른 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연히 만나 좀 더 빠르게 합쳐졌다고 했다. 일리안이 속한 팀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올 생각을 않자 도와주기 위해 리하르트 기사단이 간 것이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그사이, 일리안은 율리어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제 천막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있었다. 저녁 식사조차 거르고 제 숙소에서 가만히 침낭 위에 앉아 있었다.

이젠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본래라면 율리어스를 확인하고 당장 돌아가려 했다. 타피아와 디노에게 맡겨둔 라울이 보고 싶기도 했지만 적어도 가이우스가 율리어스의 곁에 있다면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핀튼 마을 산적단을 본 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조금만 더 지켜볼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헤이븐. 식사는 해야지.”

그녀가 식사를 거른 것을 안 에릭이 식판 하나를 들고서 천막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따끈따끈한 빵과 수프가 놓여있었다.

일리안이 씩 웃으며 그것을 받아 들었다. 식사를 하러 간 에릭이 제 몫을 챙겨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헤이븐, 근데 너.”

“……어?”

“활은 누구한테 배운 거냐? 내가 알기로 렉스 단장이나 가이우스 경도 활은 전문 분야가 아니실 텐데.”

수프를 한 숟가락 뜬 일리안이 목으로 넘기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어릴 때.”

“어릴 때?”

“부모님이 시키셨어. 건강해지라고.”

그때부터 취미. 열두 살 전의 헤이븐 윈터를 본 적이 없던 에릭은 눈을 끔뻑이다 이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녀라면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이 가르쳐 주신 거니 거짓말은 아니다, 에릭?

속으로 덧붙인 일리안이 빵을 으적 뜯었다. 이미 반대편 손으로는 그릇을 통째로 집어 물이라도 마시듯 마시고 있었다.

“가이우스 경은 율리어스 전하 곁으로 돌아갔더라.”

“큽, 뭐?”

그릇째로 수프를 마시다 놀라자 그것이 기도로 흘러 들어갔다. 기침 두어 번을 한 일리안이 자꾸만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겨우 참으며 에릭을 바라보았다.

“내 이야기 …하는 것 같았냐?”

“아니. 3차 지원군 전황에 대해서 보고한다는 것 같던데. 둘만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너 찾는 눈치는 아니었다.”

보아하니 에릭도 바깥을 돌아다닐 때 혹여나 율리어스와 마주칠까 주의하며 다닌 모양이었다. 물론 일리안과 에릭은 직급이 낮아도 몹시도 낮은 터라 율리어스가 활동하는 곳과는 거리가 제법 되었다.

황궁 기사단, 리하르트 기사단, 그리고 외부 기사들이 모인 지원군들이 합쳐지자 베이스캠프는 웬만한 부락의 크기 정도였다. 배급소만 해도 기사단별로 세 개나 되었다.

“……리트릭은 만났고?”

“설마. 리하르트 기사단 얼굴 보기가 금보다 어렵던데. 대우가 다르잖냐.”

임시로 고용된 일리안이나 에릭은 리하르트 기사단과 마주칠 일도 요원했다. 물론 리트릭의 성격상 그가 먼저 둘을 찾아올 것 같기는 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볼 수는 없었다.

“다 먹었어?”

“어.”

“그럼 나가자. 식판도 돌려놓고, 씻기도 해야지. 하프 울프 피 냄새가 아직도 나는 것 같다.”

일리안은 그 이야기에 잠시 머뭇거렸다. 혹시나 율리어스와 마주칠까 싶어 밖으로 나가기가 망설여졌다. 그런 일리안은 재촉한 것은 에릭이었다.

“엄청 넓다니까. 어제보다 훨씬 더 넓어졌어. 배급소만 해도 서너 개는 되는 것 같던데, 돌아보진 않았지만. 율리어스 전하야 우리랑은 거의 끝과 끝이라고.”

그의 말에 겨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이곳에서 며칠이나 더 머무를지도 모르는데 에릭의 말대로 숙소에만 숨어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씻고 화장실만 갔다가 바로 돌아와야지.

그렇게 결정을 내린 일리안이 제가 깨끗하게 비운 식판을 들고서 에릭의 뒤를 따라갔다. 배급소는 그녀와 에릭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숙소에서 멀지 않았다.

“드디어 찾았다!”

배급소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일리안과 에릭은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배급소 입구에서 다른 평민 기사들의 눈총을 한 몸에 받는 리트릭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제복이 누가 봐도 눈에 띄었다. 일리안과 에릭은 그를 애써 무시하며 손에 든 식판을 준비된 물에 대강 씻어 원래 자리에 돌려두었다.

“헤이븐, 에릭! 나 너희 한참 찾아다녔다니까?! 아, 여기 너무 넓어. 기사단 셋이 합쳐져서 그런가? 아니지, 사람 수로만 보면 대여섯은 합쳤겠다.”

무시를 당한 리트릭은 꿋꿋하게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리안과 에릭에게 눈길을 주는 이도 많았다.

일리안이 입을 다문 채 리트릭을 바라도 보지 않고서 속삭였다.

“즈용히 해.(조용히 해.)”

“어? 뭐라고?”

그러자 리트릭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재차 물었다. 에릭은 이미 제 이마를 붙잡고서 리트릭을 향해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리트릭! 여기서 뭐 해? 씻으러 가자!”

“아, 잠시만요! 친구를 만나서요!”

“친구?”

그리고 그 순간, 리트릭을 찾아온 것으로 보이는 리하르트 기사단이 멀리서 그를 불렀다. 리트릭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소개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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