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토벌 작전
“……헤이븐,”
속삭이듯 말하려던 에릭을 저지한 것은 일리안이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막자 에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봐야만 했다.
핀튼 마을 사내들의 앞에 놓인 것은 마법으로 만들었음이 분명한 무기들이었다. 종이를 찢으면 내장된 마법이 튀어 나가는 것도 있었고, 혹은 각종 마법이 인챈트 된 검도 보였다.
“목이 잘려도 살아 있을 수 있다잖냐.”
그 말이 일리안의 뇌리에 박혔다. 가이우스는 언젠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손목에서 피가 터져 나오도록 칼을 찔러도 그는 살아남았다고.
타닥.
그때, 어둠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한 돌멩이 하나가 에릭의 발에 걸렸다. 그것이 굴러 나가 사내들의 앞까지 가자 번뜩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야!”
일리안이 에릭의 손목을 붙잡고 순식간에 뒤로 돌아 달려갔다. 그들이 배치된 천막이 멀지 않은 터라 곧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고서도 바깥에선 누군가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욕설이나 떠드는 소리도 가끔 들려왔다.
잠잠해진 것은 그러고도 10분여가 흐른 뒤였다.
일리안과 에릭은 천막의 입구에 붙어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안에는 둘 뿐만 아니라 다른 기사나 짐꾼들도 잠들어 있어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겨우 사태가 진정된 것 같자 에릭이 먼저 목소리를 내었다.
“헤이븐. 저거… 맞지?”
“뭐?”
“공작 전하를 죽이려는 거… 맞지.”
리트릭에게도 들은 바가 있었지만 그다지 실감은 나지 않던 터였다. 그것을 제 눈으로 직접 보자 에릭은 어째서 일리안이 이곳까지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도와줄게.”
“무슨…….”
“공작 전하를 살리고 싶은 거잖아. 도와준다고.”
그 말에 일리안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실, 어째서 그가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다. 일전에 에릭이 라울을 납치했을 때, 그는 율리어스를 몹시도 싫어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 사람이 좋은 건 아닌데.”
“…….”
“난 너는 좋거든.”
그의 ‘좋다’라는 말에는 성애의 의미가 담기지 않았다.
에릭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친구. 일리안이 그은 선을 넘지 않기 위해 그는 무던히도 애쓰고 있었다.
“네가 우는 건 싫으니까.”
일리안은 사실 에릭이 어떠한 마음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마음을 접기 위해 노력 중인 건지, 혹은 이미 끝난 건지.
단지 에릭을 다시 받아들여 준 것은, 그가 적어도 자신이 한 말은 지킬 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에릭은 아마도 일리안이 그은 선을 다시는 넘으려고 하지 않을 터였다.
어둠 속에서 일리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릭이 어둠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꼭 커다란 강아지 같기도 했다.
“고맙다.”
그러자 에릭이 조금 더 크게 웃었다. 일리안의 어깨를 짚기 위해 손을 올렸지만, 이내 그 손은 닿지 못하고 내려갔다. 친구, 그거 어렵지 않네.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에릭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제 마음을 정리해 가고 있었다.
* * *
새벽부터 시작된 오크 토벌은 아침이 되도록 진전이 없었다. 앞쪽에서는 오크들의 흔적을 따라가고 있다는데, 기껏해야 보이는 것이라곤 오크들이 먹다 남은 동물들의 잔해뿐이었다.
하급 기사인 일리안은 후미에서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발로 툭툭 차대며 사람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곁에는 짐꾼 주제에 검을 찬 에릭이 있었다.
“그런데 너 짐꾼으로 지원한 거 아니었냐.”
“같이 가고 싶다니까 말리진 않던데. 아, 목숨은 책임 못 져준다고 하더라.”
에릭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도 몬스터들이 가득한 에오피아 산맥이 우습지는 않았는지, 연신 경계심 어린 얼굴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물론 그들의 곁에는 몬스터의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지만.
“그리고 너 혼자는 못 둬. 리트릭이 자기가 있는 1군이랑 만나기 전까지 감시 잘하라고 했거든. 또 혼자 튀어 나간다고.”
“리트릭이?”
“그래. 리트릭이.”
일리안이 다소 귀찮은 얼굴로 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걱정을 해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일리안은 리트릭과 에릭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몬스터 토벌이라면 그녀가 가장 자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대체 몬스터는 언제 보는 거야. 있기는 한 건가?”
에릭이 키가 큰 나무 하나를 손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상급 기사 자격증을 가지기는 했지만 살면서 제대로 몬스터를 상대한 적은 없었다. 치안이 좋은 수도 내에서 딱히 몬스터를 잡아야 할 일이 없는 덕택이었다.
오크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떠난 게 새벽이었고, 곧 점심때가 다가오니 그가 그런 투정을 부릴 법도 했다.
그가 스쳐 지나가듯 중얼거린 말을 용케 들은 일리안이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나무에 손을 짚은 에릭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였다.
“거기 있는데. 네가 지금 손 짚은 곳에.”
그러자 에릭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제가 짚은 나무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일반적인 나무의 꺼끌꺼끌한 겉면뿐인데, 대체 무슨 몬스터란 말인가. 그러다 문득 어젯밤의 귀신이 떠오른 에릭이 슬쩍 손을 떼었다.
“으, 으악!”
소리가 난 것은 에릭의 바로 뒤에 있던 이였다. 에릭이 도리어 제가 더 놀란 얼굴로 뒤를 바라보자 방금 에릭이 만졌던 커다란 나무의 나뭇가지가 한 기사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팔이 붙잡힌 기사는 그것을 떼어내기 위해 다급하게 흔들어댔지만, 오히려 기사의 팔이 먼저 몸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에릭이 신중한 얼굴로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을 때였다.
푹.
움직이는 나무의 사이로 화살 하나가 꽂혔다. 그러자 살아 움직이던 나무가 쥐 죽은 듯 잠잠해졌다.
팔이 붙잡혔던 기사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스르륵, 기사의 팔을 붙잡았던 나뭇가지도 어느새 풀린 뒤였다.
에릭이 조심스럽게 잠잠해진 나무의 옆으로 갔다. 그러자 그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죽은 거 아니다. 잠깐 못 움직이게 해둔 거라고. 내버려 두고 이리 와.”
옆을 바라보자 일리안이 제 귀를 새끼손가락으로 후벼 파며 심드렁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화살통이 메어져 있었고, 나머지 손에는 일리안의 손 크기에 맞춘 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다시 나무 몬스터를 바라보자 에릭은 자신이 만졌던 꺼끌꺼끌한 나무 표면이 다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세로로 난 나무의 주름 사이로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눈알이 있었다. 그 위로 화살이 꽂힌 채였다.
“거기, 무슨 일이냐! 대열 제대로 맞추지 못해?!”
나무 몬스터와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본대와 제법 거리가 나 있었다. 일리안은 앞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귀찮아하면서도 빠르게 뒤를 따라갔다. 그녀의 바로 뒤에는 에릭이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에릭은 일리안을 따라가면서도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몬스터를 보는 것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처음일 텐데 어쩐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저는 일반적인 나무로 보였던 게 몬스터라는 사실에 놀라 움찔할 정도였는데.
그러나 의문스러운 눈으로 일리안을 바라보자 그녀는 태평하게 하품이나 해대고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이 너무도 평화로워서 몬스터를 보는 게 처음이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어. 이 방향 아닌데.”
“뭐?”
“저쪽으로 가야 할 것 같거든. 여기 흔적꾼이 초보인가 보다, 에릭.”
흔적꾼은 보통 토벌단에서 전문적으로 몬스터들의 흔적을 찾아주는 이였다. 보통 용병단에 소속된 흔적꾼들을 고용을 해오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후미에 있는 일리안이나 에릭과는 반대로 선두에 있었다.
“……왜?”
“저기. 포식 흔적이 남아 있잖아. 이빨 모양이 트롤이랑 비슷하기는 한데, 일부러 머리를 남기는 건 여기 오크들 습성이거든.”
“여기?”
“어, 에오피아 산맥 오크들. 레드 오크족일걸.”
에오피아 산맥에 오는 것은 정확히 15년 만이었던 일리안이 제 턱을 매만졌다. 젊었을 때 이곳으로 잠깐 의뢰를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기억으로 보자면 에오피아 산맥에 사는 건 레드 오크족이 맞았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에릭만이 희한한 얼굴로 일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포식 흔적이라고 가리킨 동물의 사체도 에릭의 눈에는 그저 뼈만 남기고 뜯어먹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뭐, 됐다. 오늘 오크 안 잡고 뺑뺑이만 돌면 나야 좋지.”
“왜 좋은데?”
“여기서 살아남으면 받는 돈이 얼만 줄 아냐? 덜 잡고 돈만 받으면 당연히 좋지.”
일리안이 히죽 웃으며 포식 흔적과는 정반대로 가는 기사들의 뒤를 따라갔다. 일급을 루팡 하는 게 무척이나 행복한 모양이었다.
“도중에 돌아가도 돈은 받을 텐데. 흠, 라울이랑 타피아한테 선물이나 사갈까. 가는 길에 아마도 해오른 마을이 있었지? 거기 흑맥주가 최곤데, 아니 최고라던데…….”
일리안이 실실 웃는 얼굴로 기념품이나 생각할 때였다. 그 모습에 에릭은 픽 웃었지만,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왜인지 그녀가 자꾸만 기분이 좋아 보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 탓이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토벌이 지속될 때였다. 팔랑거리는 걸음으로 기사들을 따라가던 일리안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헤이븐? 왜 그래?”
“에릭, 이거…….”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가벼워 보이던 그녀가 갑작스레 무거운 분위기를 잡자 에릭 또한 웃음을 지웠다. 일리안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앞에서부터 커다란 노성이 터져 나왔다.
“하프 울프 떼다!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하프 울프. 늑대의 습성을 닮아 무리 지어 다닌다는 그것은 오크보다도 상대하기가 힘들기로 유명한 몬스터였다.
기사들이 모두 검을 빼서 들었다. 그것은 에릭도 마찬가지였다. 검을 곧게 세운 에릭이 전방을 주시하며 일리안을 힐끗 바라보았다.
일리안은 이미 제 등 뒤에 멘 화살통에서 화살 3개를 꺼내고 활에 걸쳐둔 채였다. 그녀가 가라앉은 얼굴로 앞을 주시했다. 키가 작은 그녀의 눈높이에는 앞을 가린 기사들 탓에 하프 울프의 털 한 올조차 보이지 않는 데도 그러했다.
쿵.
앞에서부터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사들은 물론 방패잡이들도 있으니 아마도 달려든 하프 울프들을 받아내는 소리였을 터다.
“으, 으아아악!”
쿵, 쿠웅, 우드득.
앞에서 들려오던 소음은 단말마의 소리와 함께 어느 순간 끊겼다. 대신 일리안과 에릭의 앞을 가득 채우던 기사들이 다급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에릭의 눈에도 무언가 들어왔다. 양쪽으로 흩어진 기사들 사이로 일반적인 늑대로는 보이지 않는 크기의 몬스터가 있었다.
그러다 에릭의 발치에 무언가 부딪쳤다. 그가 고개를 내리자 그곳에는 아마도 누군가의 방패였을 물건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방패를 잃은 방패잡이.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이미 고깃덩이가 된 무언가가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높아봐야 중급 기사로 구성된 제3차 지원군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선두에 있던 기사들 중 두어 명이 슬그머니 산속으로 사라지는 것도 보였다.
빈 공간이 나자 하프 울프 여럿이 대열 안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높이로 점프를 한 하프 울프 한 마리가 에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에릭 또한 하프 울프의 발톱을 검으로 맞받아칠 준비를 했을 때였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곧장 하프 울프의 아래에 깔려 목덜미를 뚫릴 것이었다.
피잉, 퍽.
그때였다. 공중으로 치솟았던 하프 울프가 갑작스레 옆으로 푹 쓰러졌다. 에릭이 검을 내리고 하프 울프를 보자 눈동자에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에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일리안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활잡이가 그녀 하나인 것도 아닌데도 그러했다.
일리안이 멀지 않은 곳에서 붙잡은 활을 아래로 내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급박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게 씩 웃었다.